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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노 Oct 21. 2023

기차역을 가진 마을 1

역의 탄생

어린 시절 내가 살던 동네에는 기차역이 있었다.

호남선이 지나가는 철도에 작은 역사를 가지고 있던 감곡역은 1914년 일제 강점기 시절 역 주변의 지역들을 하나로 통폐합하면서 감산면의 '감'과 사곡면의 '곡'을 한 글자씩 땄고 그때부터 '감곡' 역이라 불리게 되었다.


1953년 11월 15일 직원이 배치되지 않는 무배치 간이역으로 이용되기 시작하여 1960년 직원을 둔 배치간이역으로 승격이 되기도 했지만 1976년 화물취급 중지, 1993년 무배치 간이역으로 다시 격하, 2003년 새벽 한 시 역 근처에서 보수공사를 하던 인부 7명이 무궁화호 열차에 치여 목숨을 잃는 사고가 발생하는 연혁을 거치게 되었다.

그 후 감곡역을 비롯한 주변 소도시에 속한 읍면 지역주민들의 이주 등으로 이용객이 현저하게 줄어들면서 2008년 1월 1일 자로 여행취급이 중지되고 무인역으로 운영되다가 호남고속철도 공사자재 등을 보관하는 창고로 이용되었고 결국은 역사가 철거된 채  기차역은 폐쇄되고 말았다.


지금은 폐쇄된, 역사가 있던 자리


부모님이 마을을 떠나고 그 보다 훨씬 전에 마을을 떠난 나, 또 나보다도 더 먼저 마을을 떠난 사람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의 온기가 빠져나가 스산함 마저 느껴지던 그곳을, 언젠가  고향의 품이 못내 그리운 사람들이 다시 돌아오기라도 할 것을 알고 있듯 기차역은 굳건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가끔 목포행 호남선 기차를 이용할 때면  김제역에서부터 목을 빼고 눈 깜짝할 순간에 지나쳐버리는 역과 주변의 마을 풍경을 놓치지 않으려 차창밖에 시선을 고정시켜 둔 채 눈동자도 깜빡이지 못하고 그 찰나의 순간을 지켜내었다.

그러고 나면 긴장한 채 잔뜩 눈동자에 힘을 준 눈 때문인지 갑자기 증폭되던 그리움의 수위 때문인지 모를 눈물이 감정도 없이 흘러넘쳐 마음은 어느새 홍수로 가득 차고 쉽사리 배수되지 못한 채 그 안에서 오랫동안 꿀렁거리곤 했었다.

많은 사람들이 떠나왔을 그곳을 기차역이  빛바랜 모습으로나마 여전히 그곳에 남아있는 것을 확인하고 나면 부모님을 중심으로 풍요롭진 않았지만 형제들과 웃고 떠들고 이상하게도 즐거웠던 기억만이 되살아나는 어린 시절 내 집의 광경이 눈앞에 펼쳐지곤 했다.

그 동네에서 평생을 살아왔던 어른이나 아이들 , 또는 주변의 먼 마을사람들, 그것도 아니면 타지에서 들어와 잠깐을 머물렀던  이주민들 역시도 버스가 없던 동네에서 (그 당시에는)의 그 기차역은 단순히 목적지를 위해 이용하는 대중교통으로써의 소임뿐만이 아닌 각자의 삶 속에서 희로애락으로 명료하게 기억되고 있는 존재일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리운 역 


어린 시절 기차를 타고 학교에 가야 하는 나는 역 도착을 알리는 기차의 기적소리와 일찍 나가지 않는다는 아빠의 호통소리를 함께 들으면서 대문을 박차고 나가 역까지 뛰어 가까스로 기차를 타곤 했었다.

'빵' 하고 길게 기적소리를 내며 역사에 진입하던 기차를 향해 너도나도 가방을 움켜쥔 채 전력질주를 하며 릴레이 육상선수들처럼 바통터치를 하듯 기차 안으로 하나둘씩 골인했던 그 학창 시절은 적어도 그날을 함께했던 우리들에게는 결코 지워지지 않을 부동의 기억으로 가슴속에 남아 있을 것이다. 




잠깐 나열하자면 열차의 기적소리에 는 여러 가지의 숨은 뜻이 담겨있다.

짧게(0.2초), 보통(2초), 길게(5초), 대게 이렇게 3가지의 기적소리가 있는데  국토교통부의 '철도차량운영규칙'에 근거하여 열차운영사 별로 만들어진다.

기적소리의 규칙에는 위험을 경고하는 경우와 비상사태가 발생한 경우 가 있다.

기차 도착 전과 철도 건널목 진입 전  5초 정도의 기적소리는 조금 있으면 기차가 도착하니 건널목 주변의 차량이나 행인은 주의를 기울이라는 의미이며  짧게 연속적으로 울려대는 몇 차례의 ' 빵' 소리는 운행 중인 기차의 기관사가 철로 위에 사람이나 동물, 차량 등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빨리 피하라는 경고로 울려대는 기적소리이다.


초등학교 시절 기차에 치일뻔한 나는 지금도 가끔 그 기차가 내었던 기적소리의 공명이 귓가를 스쳐가며 아득한 울림으로 다가와 과거의 그 순간이 내 몸을 잠식하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그 외에도 기차에는 2개의 기적이 함께 설치되는데 위험을 알리는 큰소리의 '고음혼'과 작지만 멀리 퍼지는 음을 내는 관제용도로 신호를 보낼 때 사용하는 '저음혼'이 그것이다.

도시를 관통하는 기차가 많은 만큼 기적소리는 인구밀집 지역의 주민들에게 작지 않은 지장을 주기 때문에 수도권 등 주택 밀집 지역에서의 '고온흠' 사용은 최대한 자제하기도 한다.




이상하게도 가을이 오면 오래전 떠나왔던 고향마을의 기차역이 생각난다.

찌는듯한 더위로 인해 지칠 대로 지쳐있던 마음속에 어느 순간 찬 바람이 '휘익' 하고 들어오기 시작하면 어딘가로 떠나고 싶은 마음을 붙잡기 위해 필사의 애씀을 감내해야 하는 나는 아마도 기차역이 있던 마을에서 태어난 그날부터 떠나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던 듯도 하다.


기찻길 옆 육교에 올라 지나가던 기차를 향해 손을 흔들던 그 시절의 아이는, 평범한 과거의 어느 한 날에 아지랑이 피어오르던 기차역 플랫폼에서 한낮을 서성이다 아쉬운 마음만을 실어 떠나보냈던 무심한 기차를, 지금은 역사의 흔적 속으로 사라진 작고 아담한 플랫폼을 가졌지만 그곳을 살았던 사람들한테는 결코 작지 않았을 기차역을, 내 삶이, 그때를 함께했던 사람들의 삶이 기억해 주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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