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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노 Dec 28. 2023

한 시간 반의 설렘

나만의 시간을 즐기다

이른 아침부터 서둘러 기차를 탔다.

눈 내리는 날 기차역까지 이동하는 불편함을 감수하고라도 기차 안에서 점점 짙어지는 창밖의 회색풍경을 바라본다는 것은 쉽게 만날 수 없는 겨울날 중 하루가 될 것이다.

전주역 부근 주차장에 차를 대고 내리자마자 진눈깨비가 날리기 시작하더니 이미 예고가 된 대로 영하로 내려간 날씨에 어깨가 웅크려지고 걸음걸이마저 뒤뚱거려진다.

역사 안에는 이른 시간임에도 제법 많은 사람들이 배웅하고 마중하면서 분주한 시선을 교차시킨 채 서성인다.

여수 출발 수서도착으로 전주 익산 공주 동탄까지 가는  SRT 기차는 빠르고도 안전하게 목적지까지 갈 수 있다는 믿음을 준다.

남편과 나는 플랫폼으로 나갔고 타는 곳과 내가 앉을 좌석을 다시 한번 체크해 준 뒤 기차에 오르고 자리에 앉는 나를 확인한 후에야 남편은 배웅을 마치고 종종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간다.

호남선만 운행하던  SRT 기차가 전라선까지 확장된다는 소식을 들은 후부터 9월까지 괜한 설렘이 그동안 익산까지 다니며 기차를 이용했던 불편함마저 한순간에 싹 사라지게 만들었다.

아직은 상행선 하행선 모두 오전 오후로 한 번씩만 운행하고 있지만 기차를 이용하는 승객들이 많아지면 자연스럽게 운행 시간대도 더 늘어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기차를 타면 괜히 기분이 들뜨곤 하는데 그 기분을 부추겨줄 눈까지 내리고 있으니 걷잡을 수 없는 마음이 소리 없이 나대기 시작한다. 

그렇게 자리에 앉자 비로소 자유로워진 눈 이 창밖의 풍경을 바라본다.

전주에서 탑승 후 내 옆자리는 비어있었는데 익산역을 지나 공주역을 출발할 때까지 여전히 빈자리다.

어차피 내 몫의 자리는 정해져 있지만 빈 옆자리 좌석까지 덤으로 얻은 듯 해 괜스레 기분이 좋아진다.

그 무엇에도 방해받지 않은 온전한 나만의 시간을 갖기가 어려운 요즘인 때문이다.

이런 날 운전대를 잡고 있다면 좌불안석 신경이 곤두설 텐데 달리는 기차의 중력으로 인해 옆으로 달리기를 하는 눈발을 보고 있으려니 그렇게나 이쁠 수가 없다.

한참을 멍하니 창밖만 바라보다 기차가 오송역에 도착할 즈음엔 어느새 눈은 그치고 회색구름 사이로 환한 햇살이 드리우더니 저 멀리 산의 모양까지 선명하게 드러난다.

각 지역을 지날 때마다 시시각각 변하는 날씨가 변덕스러운 사람마음과 똑같구나 하고 있는데 핸드폰을 든 채 연신 두리번대던 남자분이 다가온다 내 자리로.

영하의 날씨로 인한 찬 공기의 기운을 잔뜩 품어 팽창한 것 같은 패딩을 입은 그 남자는 내 옆자리에 풀썩 앉고 그 찬기운이 내 몸에까지 고스란히 전해져 나도 모르게 움찔하다 고개를 다시 창밖으로 돌린다.

여전히 창밖엔 눈이 날리고 햇살이 잠깐 비추인 어느 마을을 지나다가 내 마음도 그 눈을 따라 하염없이 떠돌고 과거 어느 한 시점으로 돌아간다.




예전에도 기차여행을 좋아했던 나는 캐나다 횡단열차인 10일짜리 CAN레일 패스를 구입하여 밴쿠버에서 퀘벡까지 기차 여행을 했었다.

기차가 역에 정차하면 짧게는 몇 분 길게는 몇 시간까지 여유가 있었기에 마음에 드는 도시가 있으면 가볍게 둘러보다 다시 기차를 타거나 그곳에서 숙박을 할 수도 있었다.

다음날 오는 기차를 그곳에서 다시 타면 되기 때문이다.

재스퍼라는 기차역에 내리자마자 하얀 눈이 소복이 쌓인 아기자기한 마을과 눈 덮인 단아한 산을 바라보다 넋을 잃었다.

세상이 멈춘듯한 착각마저 일으키게 만드는 동화에서나 존재하는 상상 속의 마을 같은 모습이었다.

지금도 내 머릿속에는 그 마을의 모습이 사진처럼 박혀있다.

지역에 따라 시차가 다르기에 기차에서 내리기 전 시계를 그 지역시간으로 맞추는 것 또한 잊어서는 안 될 일이다.

예쁜 마을덕에 놓칠뻔한 기차에 전력질주하여 올라타고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느라 한참이 걸렸다.

그때는 많은 도시를 거쳐 퀘벡까지 가는 것이 여행의 목적이라고 생각했던 탓에 그 동화처럼 예쁜 마을을 기어이 떠나버렸다.

                                                     캐나다 재스퍼 (네이버사진)


다시 올 수 없을 것 같은 과거의 그리움에는 큰 아쉬움이 폭풍처럼 밀려든다.

과거의 지나온 것에 대한 아련함과 찬란했던 순간은 또 다른 미래를 꿈꾸고 그 꿈을 향해 나아갈 방향을 모색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과거의 영향력 있는 한 순간이야말로 내 삶에서의 진정한 가치가 무엇인지 깨닫게 해주는 밑거름이 되기도 한다.

잘 보냈던 어제가 오늘 나를 지탱시켜 주고 새로운 내일로 나아갈 수 있는 에너지를 주는 이치처럼 말이다.

내가 오늘 보냈던 기차에서의 이 시간이 내일 혹은 몇 달 아니면 몇 년 후 결코 얕지 않은 과거의 시간이 되었음을 증명해 줄 것이다.

굳이 바다라는 존재 앞에 마주 서지 않고도 그 크기를 가늠할 수 있는 것처럼 매 순간 의식하지 않고 보내는 지금 이 순간이 나의 삶을 바로 서게 해주는 초석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듯이 말이다.

예전의 나는 굵직한 도표를 그려내어 선명해진 나의 그래프를 보는 것이 확실한 내 인생의 발자취라고 느꼈었다.

하지만 그렇게 겉으로 표가 나지 않아도 잔잔한 나의 삶은 내 안에서 의미 있게 지속되고 있다고 이제는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오늘 하늘이 회색빛이었다 해도 내일은 밝고 찬란한 태양이 떠오를 테니 그저 오늘은 회색빛 하늘이 좋았고 더 환한 빛으로 다가올 내일의 희망을 기대할 수 있으니 그것 또한 행복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도 같다.


드디어 내가 내려야 할 목적지에 도착한다는 안내방송이 흘러나온다.

주섬주섬 옷이며 가방을 챙기는 상기된 표정의 사람들을 보며 나와 목적지가 같은 이 사람들의 오늘 하루는 어떨지... 어떤 하루를 보내든 각자의 시간 속에서 편안하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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