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곳에서 일하며 살며
파키스탄, 이슬라마바드의 생활이 4개월에 접어들었다. 이 전에는 캄보디아 씨엠립에서 5개월, 호주에서는 멜버른에 5개월, 번다버그에 4개월, 게인다에 10개월을 살고, 잠비아 루사카에서 2년 2개월을 살았다. 이렇게 외국에서 살면, 해외여행하는 기분을 느낄 수 있을까?
한국 직장인이 일반적으로 외국으로 휴가를 한 2주 정도 가려고 하면 품이 꽤 많이 든다. 법적으로 일 년에 휴가 15일부터 시작하는 한국에서 주말을 낀다고 해도 연휴가 아닌 한 휴가를 10일은 써야 하는 데다가 회사마다 직무마다 상황이 다르겠지만 연이어 2주간 자리를 비우는 게 쉬운 일도 아닐 거다. 게다가 이동하는데 시간도 오래 걸리고, 사전 준비도 꽤 해야 하고, 비행기 값에 숙소 값 등 여행경비도 많이 들고. 직장인이 훌쩍, 외국으로 떠나기는 어렵다.
나는 그 어려운, 돈을 써가면서 오는 외국을, 돈을 받아가며 왔다. 년 단위로. 비행기 값도 내가 안 냈고 집도 여기에 있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출퇴근을 하지만 주말이나 퇴근 이후에는 해외여행 온 것 같은 기분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라고 하기에는 좀 많이 미묘하다.
여행 온 기분이라. 외국에 여행 온 기분이 나려면 어떤 게 있어야 할까? 낯선 풍경, 이국의 사람들, 이국의 말, 다른 기후 등 물리적인 변화와 함께 나의 심리적 여유, 해방감, 호기심, 모험심 등에 더해서 볼거리, 먹거리, 즐길거리가 있으면 외국에 여행 온 느낌이 나겠지? 즉, 내가 사는 곳이 얼마나 새롭고 '여행지' 같은지, 그리고 내가 놀만큼 마음의 '여유'가 충분한지, 이 두 가지가 가장 크게 영향을 미치는 것 같다.
내가 살았던 곳 중 일상에서도 여행하는 느낌을 줬던 곳은, 캄보디아 씨엠립과 호주의 멜버른, 번다버그였다. 캄보디아 씨엠립 같은 경우는 그 유명한 세계 7대 불가사의(말하다 보면 한 20개는 되는 것 같지만) 중 하나인 '앙코르 사원'의 도시이다. 도시 전체가 관광지이다. 호텔/백팩커스도 많고, 야시장도 있고 다양한 식당과 먹거리, 공연도 많고, 술과 음악과 마사지도 있고, 날씨도 덥고, 사람들의 옷차림도 가볍고, 관광객도 많다. 도시 자체가 자유로운 여행의 느낌을 팍팍 준다. 씨엠립에서는 일 끝나고 매일같이 자전거를 타고 달려나와 '단골집'에 1+1 샷을 시켜놓고 한가로이 앉아 있었다. 앙코르와트까지 자전거 타고 가고, 맛있는 식당이랑 카페도 자주 찾아다니고, 길거리 음식도 많이 사 먹고, 이 시장 저 시장 구경도 많이 했다.
호주 멜버른도 볼거리가 많아 관광객이 많은 도시이다. 특히 여름의 야라강변은 산책과 일광욕을 하러 나온 사람들로 북적인다. 바둑판 도시의 구석구석에 아기자기한 카페들과 층고가 탁 트인 원통 구조의 아름다운 도서관을 특히 좋아해서 자주 갔다. 시장에서는 커다란 오크통에 담긴 와인을 바로 병에 담아 팔고, 갓 짜낸 오렌지 주스는 너무 맛있어서 그 자리에서 다 마실 뻔했다. 게다가 나는 여름의, 크리스마스와 새해를 멜버른에서 보내서 도시가 늘 축제 분위기였다. 불꽃놀이도 하고, 행사도 많고. 그리고 어학연수/교환학생을 온 학생들이 많아서, 참가할 수 있는 이벤트가 꽤 많았다. 나는 당시 어학연수 온 동생을 따라서 야라강 유람선 위에서 하는 선상파티를 갔었는데, 정말 신났다.
호주의 번다버그는 상대적으로 크지 않은, 작은 시골도시였고 볼거리나 먹을거리가 많은 곳은 아니었지만, 해변이 있었다. 그리고 나는 해변 바로 옆에 살았다. 사람도 많지 않은 조용한 해변가에 살았더니 한적한 휴양지 기분이 났다. 농장의 하루는 빨리 시작하고 빨리 끝나서 아무리 늦어도 오후 세네 시 정도면 일이 끝난다. 그러면 집에서 맛있는 거 해 먹고, 해변 산책하고, 가끔 수영도 하고, 낚시도 하고. 밤하늘에는 별이 쏟아지고, 저 멀리서 비구름이 몰려오는 걸 구경하기도 하고(비가 많이 오면 농장 일은 자동으로 쉰다), 같은 농장에서 일하는 같이 사는 사람들이랑 모여서 파티를 하기도 하고. 정말 여행 온 느낌이 났다.
반면에 여행지가 아닌 곳은 자연히 일상에서 여행하는 느낌이 덜하다. 잠비아는 세계 3대 폭포인 빅토리아 폭포가 있지만, 나는 빅토리아 폭포가 있는 리빙스톤에서 500km 정도 떨어져 있고, 도로 사정을 감안하면 차로 최소 7시간은 걸리는 잠비아의 수도 루사카에 살았다. 루사카는, 물론 매력이 있긴 하지만, 딱히 볼거리와 먹거리가 있다거나 여행지로서의 특색이 있는 곳은 아니다. 그냥 사람 사는 곳이다. 다른 곳을 여행하다가 루사카를 경유하거나 루사카에 일이 있어서 오는 게 아니면, 굳이 루사카를 구경하러 오는 여행객은 거의 없을 것이다. 가끔 문득 내가 잠비아에 있구나, 외국이구나, 싶기도 하지만, 그냥 일상을 살아간다.
파키스탄도 K2 등반을 위해 여행을 오는 사람이 적지 않고, 훈자마을은 공기 좋고 경관이 아름답기로 유명하다고 한다. 나는 거기서 600km 떨어진, 도로 사정을 감안하여 차로 최소 15시간은 떨어진 이슬라마바드에 살고 있다. 이슬라마바드는 계획된 행정수도다. 바둑판으로 짜인 구역에, 구역 중심에는 상업지구가 위치하고 주변은 주거지가 둘러싸고 있으며, 국회, 수상/대통령 거주지, 정부기관, 대사관, 국제기구, 기업 본사 등이 모여있는 곳이다. '이슬라마바드는 파키스탄과 20km(체감하는 심리적 거리감에 따라 사람마다 숫자가 다르다)쯤 떨어져 있다'라고 할 정도로, 파키스탄 고유의 느낌과는 거리가 먼 도시라고들 한다. 도시 자체가 특정 기능을 목적으로 지어져 있고, 여기에서 일하는 사람 위주로 살고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 종교적 특색이 더해져 유흥거리가 많지 않다. 그 와중에 소소한 재미를 찾아볼 수 있을 것 같기는 한데, 코로나19 때문에 찾아보러 돌아다닐 수가 없다....
외국에서 산다고 해도 일상에 시간적 여유가 있고 일단 어디든 돌아다닐 수 있어야 여행을 하는 기분을 낼 수 있다. 일단 나는 이 나라에 일을 하러 왔기 때문에, 생각보다는 놀 수 있는 시간이 많지 않다. 그래도 캄보디아에서는 자원활동, 호주 멜버른에서는 파트타임으로 일을 해서 근무시간이 길지 않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놀 수 있는 시간이 많았다. 농장 일은 일찍 시작하고 일찍 끝나서 근무시간이 길다고 해도 좀 여유로운 느낌이었고. 자연히 많이 돌아다니며 재미거리를 찾아다니고 구경을 많이 했다.
반면에 직장생활은, 특히 사무실에 출퇴근해서 일을 하는 직장인은 어디나 비슷할 것 같다. 평일엔 놀기 힘들다. 그나마 한국처럼 밤늦게까지 상점들이 문을 여는 곳이 아니면 더더욱 구경 다니기 힘들다. 잠비아의 직장에서는 보통 8시에 출근해서 5시에 퇴근했고, 야근이 많지는 않았다. 파키스탄의 직장은 8시 15분쯤 사무실에 도착해서 6시쯤 퇴근하려고 노력하지만 야근이 잦은 편이라 7~8시를 넘길 때도 많다. 집에 왔다 쳐도 소파에 누워서 폰 좀 들여다보다가 저녁 차려서 먹으면 이미 어디 나갈 시간은 못 된다. 다음날 출근하려면 집에서 책 읽거나 인터넷 좀 하면서 쉬다가 씻고 자야지.
물론 외국에서 살면 평소에 장을 보거나 외식을 하는 정도로도 우리나라와 다른 새로움을 경험할 수 있다. 처음 먹어보는 음식도 있고, 우리나라에 없는 식재료랑 제품도 많고, 가격도 우리나라보다 싸거나 비싸기도 하고, 돈도 다르고, 환율을 따져서 얼마인지 감을 잡아야 하고, 제품이 영어나 현지어로 설명되어 있어서 살펴보는데 시간도 더 들고, 사람들도 대부분 현지인(내가 외국인)이고, 산 물건을 포장해 주는 방법도 다르고. 그렇다고 외국 마트가 뭐 유달리 다르고 너무 새롭고 그렇지는 않다. 나는 우리나라에서도 백화점 지하 식품매장이나 이*트, 홈**스 등 마트 구경, 시장 구경을 좋아하는데, 딱 그 정도다, 소소한 일상의 재미.
대신 평일에 못 논거 주말에 열심히 놀면, 여행하는 '기분'이 아니라 말 그대로 여행이다. 외국에서 여기저기 돌아다니면 해외여행이지 뭐. 잠비아에서는 주말에 루사카 주변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도 많이 돌아다녔다. 여행을 좋아하는 친구들을 몇 사귄 덕에 여행을 꽤 많이 갔다. 잠비아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자연경관이 아름다운 곳이 정말 많다. 캠핑장비를 꾸려 아무도 없는, 캠핑장도 없는 산속 계곡 폭포 아래의 천연 수영장에서 우리끼리만 수영하며 놀기도 하고, 한적한 강가의 캠핑장에서 배를 빌려 강 한중간의 모래언덕에 가서 코끼리와 하마 떼를 보며 바비큐를 해 먹기도 하고, 전파도 잘 안 터지는 지역에 숨어있는 야외 온천도 가고. 빅토리아 폭포는 연휴를 이용해서 네 번이나 다녀왔다. 잠비아는 우리나라 수준으로 치안이 좋지는 않지만 해외안전여행 경보가 내려지지 않을 정도로 정세가 안정된 편이라 운전해서 여기저기 다니기에 위험하지는 않다, 경찰들에게 '삥'을 많이 뜯기긴 해도.
파키스탄에서는, 주말에는 그래도 좀 돌아다닐 시간이 될..... 줄 알았는데. 2월 초 파키스탄에 도착한 직후에 현지 코로나19 상황이 시작해서 점점 심각하게 악화되고 있다. 안전상 집-사무실만 반복하며 최소한의 필요한 일이 아니면 외출을 하지 않고, 현지 직원들도 주로 재택근무를 한다. 이렇게 살면 한국 사무실에서 일하나 파키스탄에서 일하나 크게 다를 게 없다. 도착한 첫 주, 파키스탄의 코로나19 확진자가 발생하기 전에 회사에서 내 환영회 외식을 했던 것과 주말에 파키스탄 전통악기 공연을 보러 갔던 게 내가 파키스탄의 향기나마 맡을 수 있었던 전부다.
나는 한국에서는 서울에 산다. 서울도 볼거리 많고, 놀거리 많고, 먹거리 많은 관광도시이다. 한강 고수부지는 수영장, 캠핑장, 자전거도로, 산책로 등이 잘 조성되어 있고, 남대문시장, 광장시장 등 전통시장도 많고, 명동, 영등포, 강남 등 쇼핑할 곳이 넘쳐난다. 광화문, 숭례문, 경복궁, 덕수궁, 창경궁 등 역사적 유적지도 많고, 홍대, 이태원, 가로수길, 인사동, 삼청동, 인사동, 서래마을 등 유행 있고 특색 있는 곳도 참 많다. 게다가 불이 꺼지지 않는 도시다. 마음만 먹으면 밤새도록 돌아다니며 놀 수 있다. 교통도 편리해서 주말 동안 근교뿐만 아니라 부산, 제주도까지도 갔다 올 수도 있다. 해변, 계곡, 산, 스키장 등 작은 나라에 이렇게 구색 갖추기도 힘들지 싶다. 한국에 살면서 일할 땐 잘 못 느꼈지만, 외국에 있다가 한국에 들어가면 오히려 여행 온 기분이 확 느껴지기도 한다. 결국 여기저기 옮겨다니는 내 삶이 장소에 새로움을 더해줘 일상을 더욱 여행처럼 만들어 주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