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무렵 집에 들어갔더니 그날따라 고모부가 먼저 와 계셨다. 거실에 있다가 인사를 받으며 나를 보는 얼굴빛이 좋지 않았다. 괜히 눈치가 보여 내가 쓰는 주방 옆의 작은 방으로 들어가 숨을 죽이고 있었다. 잠시 후 고모가 나를 부르며 저녁을 먹으라고 했다. 나갔더니 고모부는 벌써 식탁 앞에 앉아있었다. 방에서 나오는 나를 보며 고모부는 ‘거, 밥 먹을 때는 나와서 좀 거들고 그러시오.’라고 했다. 양반은 처가 쪽 질녀에게 말을 놓지 않는 법이라며 쓰는 존댓말은 들을 때마다 거북했다.
대학에 입학하면서 처음 서울살이를 시작한 곳은 고모 댁이었다. 큰언니네는 방이 두 개이고 시부모님을 모시고 있어서 같이 살 수 없었다. 고모네는 부자였다. 복층 단독 주택에 오래 살다가 그때는 60평 가까운 아파트에 살았다. 큰언니가 종종 찾아뵌 고모에게 나를 부탁하니 와있으라고 했단다. 신세 지게 되어 미안한 마음을 담은 아버지의 친서를 품고 그리로 갔다. ‘고맙네......오빠가.’라는 아버지의 낯익은 글씨체가 떠올라 가슴이 뜨거워진다.
처음 같이 밥을 먹게 된 날, 내가 밥솥에서 밥을 풀까 하니 고모는 내가 한 밥을 왜 네가 푸냐고, 내가 다 해놓은 밥을 며느리가 푸면 밉더라고 했다. 그럼 국도 반찬도 내가 뜨면 안 되나 싶어 ‘거들기’도 어려웠다. 설거지만 맡아놓고 할 뿐이었다.
고모는 별 말이 없어 밥이 목구멍으로 잘 넘어가지 않았다.
아버지의 동생인 고모는 아들이 열 살 때 병으로 돌아가셨다. 내가 묵은 집에서 아지매라 불렀던 분은 고모와 사별한 고모부가 새로 결혼한 사람이다. 아버지가 만날 일은 거의 없지만 매제가 새로 맞은 아내와도 오빠, 동생이라 칭하는 모양이었다. 고모가 돌아가시기 전 고모의 아들은 방학 내내 외갓집에 와서 놀다 갔고 큰언니는 한 살 많은 고종사촌과 친했다. 가끔 언니 따라가서 오빠도 만나고 그분들도 뵈었지만 이런 사정이 있기에 그 집에 들어가는 게 마음 편하지 않았다.
나에게 자상했던 사촌 오빠는 결혼해 나간 뒤였다. 함께 산 작은 오빠는 아주 어른인 척했는데 알고 보니 겨우 세 살 위였다. 거의 맞먹은 형과는 띠동갑이었다. 놀기만 한다고 고모부가 성화랬는데 ‘대학 가요제’에 입상한 경력이 있었다. 순우리말로 된 그룹 이름만 기억난다. 나에게는 별 관심 없었다.
어느 아침, 화장실에서 씻고 나오니 오빠가 화장실을 못 써 짜증 냈다며 아지매가 ‘없던 게 하나 있어 걸리적거리니 불편하지.’라고 했다. 고모부는 행실이 개차반이라 돌아가신 고모 속을 많이 썩이고 병이 나게 했지만 아지매는 정이 많고 사람이 괜찮다고 언니는 말했다. 그런데 아지매의 말하는 방식은 정말 괜찮지 않았다. 듣는 사람이 어떨지 생각하지 않고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말했다.
오빠도 비슷했다. 아지매가 먼저 나간 뒤 밖에 있던 나에게 오빠가 나간다기에 별 뜻 없이 어디 가느냐고 물었던 적이 있다. 동생 같은 정을 내고 싶었던가. 그 말에 오빠는 ‘그건 네가 알아서 뭐해?’라고 했다. 얼마나 무안하던지. 날 싫어하는구나, 확실히 느꼈다. 그 집의 누군들 나를 좋아할까만. 생각해 보니 셋 중 나와 피로 연결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무 상관 없는 내가 갑자기 끼어들어 신경 쓰이게 하니 좋을 거 없겠지. 그런 말 들으며 걸리적거리는 존재로 사는 게 싫었지만 어찌할 수 없어서 무참했다.
고모부는 사업을 했는데 전국을 다니는지 집에 없는 날이 많았다. 아지매와 오빠랑 세 사람이 집에 있을 때 아지매가 오징어 세 마리를 구워 한 마리를 내 방에 들이밀었던 일이 생각난다. 두당 한 마리라니!
부자가 아닌 우리 집에서는 오징어를 간식으로 잘 먹지도 않았지만 어쩌다 제사 지내고 남은 거라도 한 마리 굽게 되면 온 식구가 나눠 먹었다. 얼른 삼키고 조금이라도 더 먹으려고 왕성하게 턱 운동을 하며 입속에 든 오징어 다리나 가느다랗게 찢어낸 몸통을 맹렬하게 씹어대곤 했다.
방문을 닫고 혼자 접시에 오징어 한 마리를 통째로 놓고 앉았으려니 먹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형제간에 나눠 먹을 때는 오징어 한 번 실컷 먹어봤으면 했는데 여럿이 떠들썩하게 웃으며 나눠 먹어서 맛있었던 거였다.
원하던 학교가 아니어서 마음을 못 붙이고 있을 때 학보사의 기자 모집 공고를 보았다. 기자는 언감생심인 꿈이었다. 기자가 되려면 문장력, 관찰력, 판단력 행동력 등 모든 ‘력’자 붙은 능력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중 하나도 갖추지 못했으니 그 공고를 마음에 둘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 자꾸 마음이 갔다. 급기야 응시라도 한 번 해볼까, 하는 데 이르렀다. 언제 신문사 시험을 봐 보겠어,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아무도 몰래 시험 보는 강의실로 갔다. 일반 상식과 한자, 어떤 기사에 대해 논술하기 같은 문제가 나왔다. 없는 실력이나마 열심히 작성했다. 필기시험을 본 뒤에 기다렸다가 면접도 본 것 같다. 필기시험을 잘 본 것 같지 않아 침울하게 앉아있는데 누군가가 말을 걸었다. 무슨 과냐고. 작은 체구의 그 사람은 3학년으로 현재 기자라는데 내가 같은 과임을 알고는 온 얼굴을 활짝 펴며 반가워했다. 마치 십 년 만에 같은 과 후배를 본 사람 같았다. 나에게는 발에 채는 게 같은 과 선배였는데. 나는 어정쩡한 웃음으로 화답했다.
면접 자리에 그 선배도 있었다. 긴장을 풀어주고 응원하려는 건지 중앙의 면접관이 질문할 때도, 내가 대답할 때도 시종 나를 보며 웃고 있었다. 소리 내어 웃기도 했다.
면접관이 시험을 잘 본 것 같으냐고 물어서 잘 못 본 것 같다고 대답했다. 만약 문제가 다른 식으로 나왔다면 더 잘 봤을 것 같으냐는 물음에는 아는 게 별로 없어 그렇지도 않을 것 같다고 했다. 어떻게 나와도 잘 볼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럼 시험을 왜 봤는지. 참 딱하다 했을 것 같다. 지방 출신이라 듣고는 서울의 인상에 대해서도 물었다. 그 외의 질문은 기억나지 않는다. 입학시험이라도 본 것처럼 에너지는 소진되고 당연히 떨어졌으리라 여겨 돌아 나오는 발걸음이 몹시 무거웠다.
‘수습기자 발표’ 공고가 붙었는데 세상에, 내 이름이 있었다. 믿어지지 않아 눈을 비비고 몇 번이나 다시 보았다. 분명히 내 이름이 거기 맨 앞에 있었다. 어떤 문제에도 그리 훌륭한 답을 써낸 것 같지 않은데 어찌 내가 붙었을까 했다.
합격자는 모월 모시에 학보사로 모이라고 해서 갔다. 반가워했던 과 선배가 나를 보더니 시험날처럼 환히 웃으며 축하한다고 말했다. 학보사 담당이라는 우리 과 교수님도 계셔서 인사했다. 같이 된 영문과 친구는 대학에 합격한 것보다 더 기뻤다고 말했다. 나는 기쁨보다 내가 신문 기사를 잘 쓸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과 진짜로 내가 신문을 만들게 될까 하는 의구심과 함께 막연한 불안감이 들었다.
면접 때 가운데서 질문했던 사람은 신문사 주간이었다. 내가 지방에서 올라온 걸 알고 기거는 어디서 하느냐고 물었다. 친척 집이라고 했더니 신문을 만들다 보면 밤늦게까지 해야 할 수도 있는데 그분들께 집에 늦게 들어가도 되는지 물어봤느냐고 물었다. 물어보지는 않았지만 될 것 같다고 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때야 내 불안감의 정체가 뭔지 알았다. 안 된다고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환영식이라 저녁을 먹고 헤어졌으니 좀 늦었다. 9시나 10시쯤 되었을까. 집에 갔더니 고모부가 있었다. 문은 아지매가 열어주었는데 거실로 들어서니 고모부가 못마땅한 목소리로 ‘왜 이렇게 늦게 다니시오?’ 했다. 아지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분위기가 별로 좋지 않았지만 하루라도 빨리 물어보아야 했다. 숨을 고른 뒤 두 사람 앞에 가 여쭤볼 게 있다고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최대한 공손하게, 학교 신문사 기자가 되어서 신문을 만들다 보면 좀 늦을 수도 있다는데 그래도 되겠냐고 물었다.
“늦게 들어오면, 다 늙어서, 밤중에 자지 않고 있다 문 열어줄 사람이 누가 있소?”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고모부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건수를 잡았다는 듯이 늙은 사람이 일하는데 일찍 들어와서 거들 생각을 해야지 어딜 늦게 들어오려고 하느냐고 호통을 쳤다. 60세 언저리가 그리도 늙은 나이인지.
언니는 고모부가 아닌 아지매의 허락을 얻어 나를 맡겼다. 고모부는 전처의 친정 조카가 와서 공밥을 먹는 게 싫었던 모양이다. 현재의 아내에게 미안해하는 방식이었을까? 고모부가 그러는 동안 아지매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부모 밑에 있다 남의 집에 사는 건 처음 하는 사회생활과 같았다. 존댓말만 쓰면 뭐하나, 말단 직원 꾸짖듯 하는데. 나를 천하의 몰염치한 사람으로 몰아 상사처럼 혼내는 큰소리에 눈물이 나 더는 말을 못 했다.
할 수 없이 학보사에 가서 주간에게 못하겠다고 했다. 그분은 안타까워하더니 신문을 한 번 만들어보고 그만두면 더 아쉬울 테니 차라리 시작하기 전에 관두는 게 나을 수도 있으리라고 위로했다. 나는 한 번도 못 만들어본 게 아쉬웠다. 졸업 후 신문사 기자 되기는 바랄 수도 없으니 학교에서라도 경험해 보고 싶었는데 그조차 물거품이 되었다. 그날 주간의 말로 우리 과 선배가 나를 추천한 줄을 알았다.
몇 주 뒤에야 그 선배를 교정에서 우연히 만났다.
“야! 너 어떻게...... 말도 안 하고 그만뒀어?”
하는 말에 굉장히 미안했다. 추천했던 내가 갑자기 그만둬버렸으니 퍽 놀랐을 테다. 무얼 보고 나를 추천했는지 모르나 고마웠고 기대를 저버려서 오래 미안했다.
나 때문에 다른 사람이 뽑히지 못했다면 그것도 미안한 일이다. 시험 보는 날에는 누가 같이 봤는지도 몰랐는데 우리 과 대표도 본 모양이었다. 그 애가 ‘신문사도 떨어지고 이제 뭐 하지?’ 하는 말을 들었다. 글에 자신감이 있었는지 <이방인>을 읽고 한 세미나에서 자신이 써온 시를 발표한 적도 있다. ‘뫼르소, 자네가 받은 고통만큼...’ 하던 그 애를 놀라워하며 쳐다본 기억이 난다.
하루는 그 애가 여러 아이가 있는 데서 내 이름을 부르며, ‘느네 신문사에 글 보내려고.’ 했다. 내가 조금 웃으며 ‘느네 신문사?’ 하고 따라 했더니 다른 애가 ‘얘, 기자 안 해.’하고 아는 척을 했다. 그러자 걔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왜?’ 했다. 나 대신 말했던 애가 또 ‘그냥 실력 테스트해 본 거지~’했다. 내가 서둘러 그건 아니라고 말했지만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 애한테 괜히 미안했다. 그 애가 될 수도 있었는데 나로 인해 피해를 본 것 같아서였다.
밤늦게 문을 열어줄 수 없다는 이유로 기자를 못하게 했기에 그분들이 나와 오래 같이 살려는 줄 알았다. 그런데 부동산에서 자주 전화가 오길래 물어보니 집을 팔고 이사할 거란다. 나를 데려갈 생각은 없어 보였지만 혹시나 하여 짐짓 ‘저도 어디 갈 데를 알아봐야겠네요?’ 해보았다. 아지매는 ‘네가 갈 데가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어디로 갈지도 모르겠다.’고 했다. 아지매의 말투는 끝까지 나를 아프게 했다.
내가 먼저 그 집을 나왔다. 그들이 얼마나 더 오래 그 집에 살았는지는 모른다. 내가 그 집에 머문 기간은 딱 한 달이다. 고작 한 달 살 걸 아버지가 그리 낮은 자세로 편지까지 쓴 게 속상했다. 내가 아니었다면 그런 편지를 쓰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친고모도 아닌데 널찍한 공간에서 작은 방이나마 따로 주어 한 달이라도 있게 해 준 걸 고맙게 생각해야 한다고 마음을 추슬렀다. 하지만 계속 같이 살 생각도 없으면서 기자 되기를 그토록 반대한 건 몹시 원망스럽다.
“너, 학보사 안 가길 잘했다. 갔으면 너도 담배 피우게 됐을 거야.”
친한 친구가 말했다. 담배! 그 시절 담배는 의식 있는 여학생이라면 피워야 하는 것 처럼 되어 있었다. 남자는 아무 생각 없이 피워도 되는 담배를 여자는 왜 의미를 넣어야 피울 수 있었는지.
유교 문화에 젖어있던 나는 처음 여자 선배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담배를 꺼내 피우는 걸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영화의 영향도 있어서 불량 여학생이나 타락한 여자나 담배를 피운다고 생각했다. 나만 받아들이기 어려워했던 게 아니다. 지긋한 남자 교수님들도 그랬다. 30대 남자 교수님도 같이 문학 답사 가서 우리를 앉혀 놓고 ‘써클실 구석에서 담배나 피우고 말이지’라 했다. 그러나 신문사며 교지 편집실이며 여러 동아리방에서 선배들은 다 담배를 피웠다. 교양 공통 과목으로 ‘여성학’을 배웠다. 그래서라고는 할 수 없지만 흡연은 남녀가 다를 게 뭐냐, 평등하다, 라는 걸 몸으로 나타내는 행위였다.
학보사 기자가 되었어도 담배는 피우지 않았을 것 같다. 지방에서 학비를 조달하느라 애쓰시는 부모님을 생각하면 양심상 그 돈으로 담배까지 사 피울 수는 없었을 테니까. 결혼 후 남편의 흡연 문제로 많이 싸웠는데 내가 기자가 되고 담배를 배워 지금까지 피우고 있다면 담배로 인한 부부 싸움은 없었겠다. 미래의 부부 사이를 아름답게 할 담배 때문은 아니나 그때 기자를 못 해본 것이 아쉽다.
3년 동안 기자를 했다면 글을 잘 쓰게 되었을 테다.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며 몰랐던 세상도 알게 되고 올바른 사회를 만드는 데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을 것이다. 소극적인 성격도 좀 바뀌고 졸업 후의 진로를 찾는 데도 도움 되었을 것이다.
경제적 여유가 있어 하숙이나 하다못해 자취라도 했다면 기자를 할 수 있었을 텐데. 우리 집은 아버지 혼자 번 돈으로 많은 식구가 먹고 나머지는 다 학교로 들어갔다. 거기에 무언가를 더 부담할 여력은 없는 아버지였다. 그 아버지 덕분에 어려서부터 공장에 가 ‘시다’를 하지 않고 대학물까지 먹었으니 아버지를 원망할 수는 없다. 졸업 후 신문사 기자가 되지 못한 건 100% 내 탓이고.
내가 학보사 기자가 되었다면 아버지가 면하게 해 준 공장 노동자가 되었을까 생각해 본다. 나를 좋게 본 학보사 선배는 시를 좋아했다. 문학 동아리방의 메모장에 ‘시를 사랑하는 건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라고 남긴 문장이 생각난다. 선배는 졸업 후 연고도 없는 남쪽 지방으로 내려갔다. 시를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해서였을까. 공장에 들어갔다. 공장 노동자와 결혼도 했다. 기자가 되었다면 나도 그 길을 따라갔을까?
노동자를 의식화하려고 공장에 위장 취업하는 대학생이나 졸업생이 많았던 때다. 나에게 그런 길을 갈 용기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모를 일이다. 독재 타도, 민중, 민주라는 말이 최고의 가치로 매겨지던 시대였고 외면하면 매국노 보듯 했으니까. 교내에 ‘짭새(사복 경찰)’가 수시로 날아들어 학생회나 학보사, 수상한 동아리 등을 감시했다. 데모하고, 구속되고, 돌아와 다시 데모하거나 변심하는 학생이 허다했다. 격랑의 시대에 내가 위험한 학보사 기자를 하지 않은 건 차라리 다행이었을까?
나는 생각한다. 옥상에서 유인물을 뿌리고 투신하지는 못해도 학생 기자가 되어 칼보다 강한 펜으로 격문을 쓰거나 꽃을 그리지 못한 건 돌이킬 수 없는 손실이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