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둘의 나이에 전태일은 결단했다. 노동자를 위해 자신을 제물로 바치기로. 스무 살 봄에 나도 결단했다. 1년간 몸담았던 문학 동아리를 떠나기로.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친구와 얼떨결에 가입했던 문학 동아리 활동은 쉽지 않았다. 매주 책 한 권을 읽고 모여 토론하는 건데 선배들의 기에 눌려 한마디도 못 하고 끝날 때가 많았다. 그렇게 말 잘하는 사람을 바로 앞에서 본 적이 없었기에 그저 경탄하며 쳐다보기만 했다.
선배들은 말만 잘한 게 아니었다. 아는 게 엄청 많았다. 새롭게 알게 된 게 얼마나 많았던지. '광주 사태'(그렇게 불렀다)를 '폭도들이 도시를 멋대로 파괴하고 유언비어를 퍼뜨리는' 것으로 보도한 뉴스를 그대로 믿었던 나에게 선배들이 알려준 진실은 너무 충격적이어서 벌린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모르는 게 너무 많다는 내 말에 알아야 할 게 많지, 라고 한 선배들은 알아야 할 것들을 소나기처럼 우리 머리에 들이부었다. 소나기를 계속 맞으며 편안할 수 있을까?
1학년이면 누구나 이수해야 하는 교양 과정의 하나로 문학 세미나가 있었다. 이 또한 정해진 책을 읽은 후 열 너덧 명쯤 둘러앉아 책에 관한 토론을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참가자들이 서로 생각을 나누는 걸 세미나라고 배워 요즘 무슨 무슨 세미나라 해놓고 강사 혼자 말하고 끝내는 걸 보면 참 이상해 보인다. 그럴 거면 그냥 강연이라 해야 하지 않나 해서다. 하지만 여기서도 나는 ‘세미나’를 못하고 강연처럼 남의 말을 듣기만 했다. 아이들이 말을 너무 잘했기 때문이다.
지방에서 상경한 나는 책에서 보고 TV에서나 듣던 표준말을 똑 부러지게 구사하는 서울 아이들과는 ‘체급’에서부터 밀리는 기분이었다. 표준말을 쓰는 아이들은 똑똑해 보였고 제 생각을 말할 뿐인데도 아나운서가 전하는 뉴스인 양 사실처럼 들렸다. 표준말이 사투리보다 우수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그때는 그렇게 보였다) 하고자 하는 말을 분명하게 전하는 이점이 있는 건 확실했다. 토론의 도구인 언어가 시원찮아 말하기가 더 어려웠다.
수업이 진행된 한 학기 동안 나는 딱 한 번 말했다. 첫 시간 수업 소감을 돌아가며 다 말하게 했을 때다. 나는 요만큼밖에 생각 못 했는데 다른 친구들은 저만큼까지 넓고 깊게 생각해서 놀랐다, 앞으로는 나도 더 깊게 생각해 보겠다고 했었다. 그러나 그러지 못했던지 그 뒤로도 나는 거의 두 시간 동안 말하는 애들 입만 쳐다보고 있었다. 말할 틈도 없고 할 만한 말은 다른 애들이 먼저 다 해버려 더 할 말도 없었다. 말하지 않은 아이에게 점수를 잘 줄 수는 없다. ‘침묵은 금’이라는 신조를 지닌 평가자가 아니라면. 상대 평가니 누군가에게는 낮은 점수를 주어야 한다. 나는 그 누군가가 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교양 과정 세미나에 동아리 세미나까지, 이중으로 힘들었다. 교양 과목에서는 까뮈의 ‘이방인’, 모파상의 ‘여자의 일생’ 같은 책을, 문학 동아리에서는 고리키의 ‘어머니’, 도스토옙스키의 ‘악령’,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 같은 책과 사회 과학서를 읽었다. 절대 만만하지 않은 책들이었다. 매일 과외 지도를 하면서 한 주에 두 권씩 그런 책을 읽자면 내 생각 정리는커녕 다 읽어가는 것만도 벅찼다. 늘 시간에 쫓기며 숙제하듯 책을 읽다 보니 1주일 내내 아니, 언제나 ‘문학’이나 사회’에 빠져 사는 것 같았다. 차츰 지쳐갔다.
여러 학과가 모여 듣는 전체 강의 시간에 유명한 문학 평론가인 교수님은 세련된 독자라면 책을 비판적으로 읽어야 한다고 하셨다. 하지만 나는 세련된 독자가 되고 싶지 않았다. 그냥 책에 흠뻑 빠져서 읽는 게 좋았다. 매시간 ‘생방송 100분 토론’을 하기도 힘들었지만, <당신들의 천국>에 나온 원장을 비판적으로 보기는 더 힘들었다. 그만하면 훌륭하다 싶고 그만큼이라도 할 수 있는지 묻고 싶었다. 모든 인물을, 모든 행동을 비판적으로 봐야 하는 건 정말 피곤한 일이었다.
전체 강의 때 교수가 했던 말을 세미나 시간에 자기 생각인 양 말하는 아이가 있어 옆에 앉은 애가 비웃었던 일이 생각난다. 나는 '베니스의 상인‘에 나오는 샤일록을 두고 어떻게 말해야 독특한 견해라 할지 몰라 괴로웠다. 그것도 창의성의 문제였을까?
어린이 독서 지도와 관련해서 다니엘 페냑이라는 프랑스 소설가는 책을 읽고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권리가 있다고 했다. 그런데 그때는 책을 읽고 너무 많은 말을 하게 했다. ‘세미나’니까. 쏟아지는 말과 함께 도처에 문학이 넘쳐났다. 문학에 대해 심한 피로감이 들었다.
이문열은 문학을 목매달아 죽어도 좋을 나무라 하고 은희경은 데뷔 전에 ‘사랑한다,문학아.’ 라 써대고 또 어느 작가는 '문학,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라고 했다지만, 그때 나는 문학을 사랑하지 않았고 부르다가 내가 죽고 싶지도 않았다. 문학, 문학, 문학...나는 문학에 넌덜머리가 났다.
경외감을 준 선배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도 점점 듣기 싫어졌다. 매판 자본이니 마르크스, 계급, 혁명, 민중, 민주,..... 우리를 의식화시켜 투사를 만들고자 동아리와 학과 선배들이 동원하는 모든 단어에 염증이 났다.
힘들게 1년을 채우고 새 학년이 되면서 동아리를 탈퇴하기로 했다. 친구 역시 문학에 지쳐 뜻이 같았다. 그런데 회원이 많지 않은 상황에 둘씩이나 그만둔다는 말을 꺼내기가 어려워 차일피일 미루다 가까스로 한 선배에게 말했다. 예상대로 선배는 깜짝 놀라 말리다가 날 보더니 ‘넌 덩달아 그만두려는 거지?’라고 했다. 선배는 몰랐을 거다. 그 말이 내 결심을 확고하게 했음을. 선배에게 말을 꺼낼 때까지만 해도 인정상 그만두는 게 쉽지 않을 것 같아 반은 체념했었다.
성격이 밝고 잘 웃는 친구를 사람들은 좋아했다. 그들은 매번 옆에 있는 나보다 동작이 큰 친구를 먼저 알아봤다. 친구에게 건넨 편지에 쓴 말이 생각난다. '사람들은 네가 웃으면 나도 웃는 줄 알고 네가 찡그리면 나도 그런 줄 안다. 네 그늘에 있으면 편하겠지만 나는 계속 그러고 싶지는 않다.' 선배 덕분에 탈퇴를 결심하고 쓴 편지였다. 그때 읽었던 책의 전태일처럼 인간 선언을 했던가. 나는 기계의 부속품이 아니다, 친구와 독립된 의견을 가진다, 라는.
문학 동아리의 새 학년 첫 모임이 있던 날, 나는 벚꽃 핀 교정을 혼자 걸어 나왔다. 친구는 탈퇴하지 않았다. 맨날 둘이서만 붙어 다닌다고 선배에게 걱정을 사 ‘따로 서기’가 화두였던 친구와 나는 마침내 따로 서게 되었다.
2학년 때는 교양 수업으로 철학 세미나를 했다. 문학 작품 속 인물의 심층 심리만 파고드는 대신 인간이란 존재와 사회 구조, 철학 사상을 두루 섭렵할 수 있어 좋았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비트겐슈타인)처럼 인용하기 좋은 멋진 말도 많이 배웠다. 전체 강의 때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마지막 결론으로 선생님이 ‘인간은 되어가는 존재’라고 하신 게 기억난다. 세미나 시간에는 매주 아이들이 돌아가며 사회를 맡도록 해서 말도 조금씩 하게 되었다. 문학 세미나 때만큼 괴롭지 않았다.
나는 외부의 합창 동아리에 들어갔다. 어린 시절 교회당에서 크리스마스 축하곡을 부를 때의 추억이 좋아서였다. 지휘자의 손끝을 보며 화음을 맞춰 노래 부르면 마음이 밝아지고 영혼이 맑게 정화되는 느낌이 들었다.
친구는 여전히 책을 읽어댔지만 내가 든 동아리는 아무 부담이 없었다. 부족한 시간을 내어 책을 읽어갈 필요도, 엄숙한 얼굴로 불평등한 사회와 계급을 비판하거나 가열하게 투쟁하지 않는 자신을 질타하며 죄책감으로 괴로워할 필요도 없었다.
문학 동아리를 떠올리면 그곳은 언제나 겨울 같다. 회원들은 바람 부는 벌판에 처연하게 모여앉은 독립투사들 같다. 반대로 노래 동아리를 생각하면 거기는 겨울도 봄 같다. 언제나 화사한 봄. 그 봄 속에서는 항상 노랫소리가 들린다. 조용필의 '비련'을 조용필보다 더 잘 부르는 남자도 있고 '단장의 미아리 고개'를 창자가 녹아내리도록 애끓게 부르는 여자도 있었다.
커플도 두엇. 내게도 같은 학년인 한 남자가 괜찮게 보였으나 그를 좋아하는 여자가 많았다. 동갑인 한 애는 라이터를 선물했다는데 그건 고백이며 진지하게 사귀어 보자는 뜻이라고들 했다. 뒤풀이 자리에서 한 학년 아래인 애가 불쑥 그를 좋아한다며 상담을 요청하기도 했다. 표정 관리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정작 그에게는 오래 공들여 얻은, 학교 후배들에게는 형수님으로 불리는 확실한 여자 친구가 있었으니 남녀 관계란 얼마나 웃긴지. 왜 잘생기지도 않은 그 남자에게만 화살표가 몰렸을까?
나는 2주에 한 번씩 나오는 동아리 회지를 만들러 그와 주기적으로 만났지만 여럿이 함께여서 공적인 이야기만 했다. 어쩌다 분위기가 잡힐 만하면 하늘이 돕지 않았다. 내가 버스에서 먼저 내려야 하거나 도착한 열차를 타고 가야 하는 식으로.
한 번은 성당에 갔다 오며 탄 버스 안에서 그를 마주쳤다. 시청 앞에서 친구와 걷다가 데이트하는 그 애를 만나기도 했다. 그때 친구는 ‘누구든 네 옆에도 남자가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했는데 나는 넓은 하늘 아래서 자꾸 마주치는 게 신기했다.
1박 2일 동아리 MT가 있었을 때다. 다음 날 일이 있어 가기를 망설이니 그가 다음 날 아침 일찍 함께 돌아와 주겠다며 같이 가자고 했다. 왜 괜히 같이 오느냐고 하고서 갔다. 그가 아이들 앞에서 ‘우리는 내일 아침에 일찍 가니까 오늘 많이 먹어야 돼.’라고 했을 때 나는 혼자 가겠다고 못을 박았다. 그가 먼저 올 이유는 없으므로.
내 뜻이 굳은 걸 안 그는 이튿날 내가 오려 하자 기차역까지 바래다주겠다고 했다. 길눈이 어두운 데다 낯선 곳이라 그건 받아들였다. 10월쯤이었을 텐데 농촌의 이른 아침 공기는 무척 차가워 이가 덜덜 떨렸다. 역까지는 꽤 멀었다. 눈 닿는 데까지 한껏 길게 뻗어있는 철길을 따라 나란히 걸으며 무슨 이야기를 했던가. 친구에게 빌린 ‘나이키’ 손가방의 끈이 떨어져 옆구리에 끼고 가자니 그 애가 그걸 들어주겠다고 달라고 했다. 그럼 목욕탕 가는 남자 같지 않냐고 하자 언제 그렇게 목욕탕 가는 남자를 많이 봤냐고 했던 말만 생각난다. 흘러내리는 가방을 추켜 올릴 때마다 주머니에서 꺼낸 손이 너무 시려서 결국 맡겼다.
역에 도착해서야 얼굴을 마주 보았다. 그 애가 나더러 얼굴이 빨갛게 얼었다고 했다. 그러는 그도 코와 귀가 새빨갰다. 겨울처럼 추운 날이었다. 기차를 타려고 들어가며 잘 가라, 서로 손 흔들며 헤어졌다. 일행이 있는 숙소로 혼자 돌아가는 길이 또 얼마나 추울까 싶었다.
그 애가 따라오지 못하게 한 건 잘한 일이었을까? 못 이기는 척 같이 돌아왔다면, 두 시간 넘게 둘이서만 오는 동안 더 친해졌을까? 내려서 차라도 한잔, 하며 역사가 달라졌을까? 알 수 없다. 그 애에겐 ‘골키퍼’가 있었으니. 언제나처럼 내가 도의를 지키느라 가능성을 막아버리는 재능을 발휘했음은 안다. 기차역까지 동행하게 한 것도 그에게 여자 친구가 있음을 누구나 알고 있어서였다. 그래서 그도 당당했으리라. 어쨌든 나는 그 ‘골키퍼’를 존중했는데 그 애와 결혼에 골인했는지 모르겠다.
축제 때 시화전을 준비하느라 골몰할 필요도 없고 문학의 '문'자도 꺼내지 않는 생활로 문학에 대한 피로감은 완전히 사라졌다. 작가도 무엇도 아닌 내가 문학, 문학, 하고 있지 않으니 마음이 편했다. 스무 살 그 때 나는 문학을 떠났다.
합창 발표회 때 친구와 가족들이 와서 꽃다발을 안겨주었다. 문학이 사라진 자리에 만발한 꽃들의 함성이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