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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ED컬렉티브 Apr 11. 2021

조지 시걸(George Segal)

:  우리들의 밤은 더욱 길어졌다. 고독과 침묵이 필요한 순간.

“나는(...) 환경 속에 있는 인간을 바라보고자 많은 시간을 보냈다.”

 조지 시걸, 1993  

   


조지 시걸, 1991 


아직도 우리의 밤은 길다. 일상 속의 밤은 1년 전 오늘과 달라졌다. 그리고 현재는 백신이 들어오면서, 코로나팬데믹에서 조금 더 자유로움을 되찾을 수 있을지 지켜봐야하는 상황이다. 그래서 지금의 우리의 현실은 생각보다 더 답답하다. 개인의 삶의 질을 높아졌다고 하지만. 코로나19속에서 가져온 변화 중 하나인 코로나 블루(Corna blue)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비교적 가벼운 우울감조차도, 이제는 자신의 본래감정인지 아니면, 코로나19때문인지는 알 수 없는, 우리의 감정이 요동치고 있다. 보이지 않는 감염병과의 고군분투는 더욱 우리의 삶과 현실을 지치게 한다. 이전과 다르게 조금이나마, 도시는 고요한 듯하다. 서로의 표정을 볼 수 없고, 함께 무언가를 하는 것에 어려움을 겪는다. 베이비부머들의 세대들의 은퇴와 함께 청년층의 실업증가, 일자리 부족, 기후환경 문제까지. 이 변화를 우리는 어떻게 마주해야하는가에 고민들이 날로 커지고 있다. 


# 조지 시걸, 불안한 도시      


SNS활동과 디지털 공간속에서 우리의 활동이 더욱 활발하게 이뤄지면서. 비대면의 일상을 마주하고 있다. 이 또한 우리의 익명성이 더욱 짙어지는 세상으로 나아가는 것일지도 혹은 자신을 드러내기 위한 수단이 될지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현재 우리의 도시는 불안하다. 도시는 쇠퇴와 재생이라는 슬로건을 가지고 변화를 추구한다. 조지 시걸(George Segal, 1924~2000)은 도시의 이런 변화를 예고하였던 것일까? 1960년대 미국의 도시재개발이 뉴욕을 발전시키는 것인가, 아니면 개인의 익명성과 비개성을 더욱 짙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에 대한 숱한 고민들로 현대사회를 바라본 예술가이다.      


# 조지 시걸, 자연과 다른 도시의 일상적 풍경. 나에게 뉴욕이란?     


유년시절. 시걸은 양계장을 한 그의 부모와 뉴저지에서 생활을 하였다. 그리고 자신이 양계장을 운영하면서, 뉴욕이라는 도시와 뉴저지의 자연의 경관 그리고 생활에 차이를 경험하였다. 이 사실은 시걸이 도시를 객관적인 시선에서 바라보고 관찰할 수 있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 “도시는 우리의 배경이며, 우리는 이 풍경에 살고 있다. 나는 매 시간을 조각에 산업적 풍경의 덩어리를 연결시키고자 했다.(...) 그리고 나는 도시에서 거주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졌고 많은 시간을 그들을 보는데 사용했다.”    



조지 시걸, <주류판매점>, 1994 / <주유소>, 1963
조지 시걸, <시네마>, 1963


# 주류판매점, 주유소 그리고 영화관에 도착     


시걸은 실물뜨기 주조법으로 살아있는 인체에 직접 주조한 석고조각을 계획했다. 그리고 그 소재는 일상생활에서 흔히 사용하는 소비상품들을 재료로 연출했다. 한국에서는 1995년 호암갤러리에서 도시 속에서의 인간의 모습과 현장을 읽어낼 수 있는 조각으로 그를 소개하기도 하였다. 당시, 시걸의 조각에서도 <주류판매점 Liquor Store>(1994), <시네마 Cinema>(1963), <주유소 The Gas Station>(1963)가 그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알려졌다. 시걸은 이를 통해서 도시속의 우리의 일상을 포착했다. 예를 들어, <주류판매점>(1994)는 빨강색의 문이 눈에 확연히 두드러지면서, 이곳이 주류를 판매하는 곳이라는 광고가 옆에 전단지 포스터를 통해서 보여준다. 그리고 문 앞에 팔짱을 끼고 앉아 있는 남성의 모습에는 손님을 기다리고 있는 것인지,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인지 고민에 빠진 것인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앉아 있다. <시네마>(1963)에서도 네온사인의 불빛으로 빨강색의 글씨가 강렬하게 주목된다. 영화관이라는 사실을 알린다. 시걸은 여기서 어떤 남성이 영화관 앞에서 마지막 ‘R’을 뜯어내려고 손을 뻗고 있는 모습을 조각했다. 시걸은 <주유소>(1963)에서도, 시계가 걸린 공간에 코카콜라자판기와 주유소를 배경으로 한 주유소. 흔히 주유소에서 볼 수 있는 타이어, 오일깡통 등을 배치했다. 거기에 한 남성은 나무상자에 앉아있다. 그리고 또 한 남성은 유리창 앞에 지나간다. 지극히 일상적인 풍경이다. 


조지 시걸, <펩시 광고를 설치하는 남성>, 1973 / <맥도널드>, 1999


# 도시의 상점들      


펩시광고를 설치하고 있는 한 남성이 있다.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펩시광고판의 왼쪽 모퉁이를 고정시키는 한 남성의 모습이 <펩시 광고를 설치하는 남성 Man installing Pespsi Sign>(1973)으로 보인다. 그리고 맥도널드로 전광판의 노란색이 확연히 눈에 띈다. 그 앞에 한 남성이 양손을 주머니에 넣고 길을 걷는다. <맥도널드 Mcdonald's>(1999)이다. 펩시광고를 설치하고, 흔히 맥도널드를 들렀다가 가는 노동의 일상 그리고 저녁 한끼를 햄버거로 먹은 한 남성의 이야기가 그려진다. 시걸은 이를 우연적으로 자신이 도시에서 발견한 사람들의 모습의 일부를 포착하였다고 하지만, 우리에게 친숙한 이유는 무엇일까?      


시걸은 주류판매점, 시네마, 그리고 뉴저지와 뉴욕을 오가며 본 주유소, 드라이클리닝상점, 지하철, 영화관, 카페, 가정집 등의 네온사인 불빛 아래 비친 도시공간에서의 인간의 모습을 관찰하였다. 고요하고 침묵만이 존재하는 듯 한 도시의 낯설음과 불안함은 고독이 머물러 있다. 실물사이즈로 인체형상을 본 뜬 시걸은 말 그대로 도시의 현대인이다. 받침대에 머물던 조각들이 살아 움직이는 느낌을 받을 수 있도록 시걸의 조각은 현대인의 초상이자 평범한 주변인물들이다. 무표정한 인공물의 마네킹과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는 살아 숨 쉬는 인간의 존재를 동결시킨 인체형상이다. 앤디 워홀이 마릴로 먼로, 엘비스 프레슬리 등을 소비의 스타, 우상으로 표현한 방식과 분명한 차이를 보여준 시걸의 석고조각. 숨을 쉬듯 살아있다.  


고독과 침묵의 밤그리고 네온사인        


조지 시걸, <밤의 타임스퀘어>, 1970


시걸의 도시의 밤은 고독과 침묵이 고스란히 담겨진 하나의 화폭이다. 표현하기 어려운 그 감정들이 그의 도시의 풍경에서 발견된다. 조각 속에 숨겨진 얼굴은 흰색으로 좀처럼 개성을 드러내지는 않지만, 자세와 행동 속에서 특정 누군가가 아닌, 우리 자신의 거울을 비쳐준다. 도시의 한복판을 거닐고 다는 사람들, 익명성과 비개성이라는 의미로 우리의 모습을 무리로 단절시고 고립시킨 군중의 의미가 이곳에서 나온 것인가? 아니면 개인의 주체성이 상실된 체, 사회로부터 소외되고 있는 자신. 수동적인 대중소비자이고 만 것인가? 도시는 오늘 하루도 기나긴 밤을 보내게 하는 장소이자 공간이다. 시걸의 뉴욕에서의 밤은 언제나 네온사인과 가로등 불빛 아래에서 운전을 하며 이곳저곳을 들르거나 거리의 풍경을 구경하는 것에서 주변의 사람들을 발견했다. <밤의 타임스퀘어 Times Square at Night>(1970)는 타임스퀘어의 야경을 보여주듯이 전광판의 네온사인 불빛 사이로 따로 두 명의 남성이 앞과 뒤에 배치되어 걸어 나오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 신호등, 저녁, 버스정류장에서의 하루의 끝   

   

조지 시걸, <저녁>, 1964~1966 / <빨간 신호등>, 1972


그리고 자동차 앞에 한 남성이 서 있는 것이 보이는가? 이는 <빨간 신호등 The Red Light>(1972)이다. 제목에서 빨간 신호등인 것을 잊은 것인지 한 남성이 트럭 앞을 지나간다.  남성의 양손은 코트의 주머니 속에 넣고, 머리는 약간 구부정하다. 남성은 생각에 잠긴 모습이다. 느린 움직임으로 성큼성큼 길을 걷고 있다. 삶에 대한 회의감이 느껴지는 남성의 아우라 속에서 그의 고독을 읽을 수 있다. 한쪽에서는 <저녁 Dinner>(1964~1966)으로 간이식당에서 혼자 저녁식사를 하러 온 것인지 술을 먹으러 온 것인지, 묵상에 잠긴 고독한 남성의 모습이 보인다.


# 함께하지만, 우리는 혼자이다.   

  

조지 시걸, <러시아워>, 1983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장면. 그들은 어디론가 무리지어 가고 있다. 서로 알고 있는 사이인가? 그들의 시선은 앞을 향해 있다. 핸드백을 들고 가는 여성이 중앙에 보인다. 하지만 그 여성은 주인공은 아니다. 6명 모두가 함께 <러시아워 Rush Hour>(1983)의 주인공이다. 출퇴근으로 교통이 몹시 혼잡한 시간 때에 무표정한 특징으로 일시적으로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서 마주한 타인들이다. 그들은 서로 간격을 두고 의식하지만, 알고 있는 사이는 아니다. 같은 장소로 우연히 타이밍이 맞았을 뿐이다. 그들 사이에는 고요한 정적이 뒤섞여 있다. 누가 침묵을 하라고 지시한 것이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서로가 간격을 두고 그들은 어디론가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오늘 아침 출근을 하는 이들에게. 이 모습은 지하철에서 마주하는 무리. 떼를 지어 나오는 우리의 모습을 상기시킨다. 지하철안에 흐르는 무거운 공기와 코로나팬데믹을 뚫고 오늘 하루를 무사히 보내야하는 우리의 걱정. 도시에서의 삶은 더욱 넉넉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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