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종의 고민
우리집 딸은 소위 ‘관종’이다. 학교에서 맡은 포지션은 단연 ‘개그맨’이고.
친구들 앞에만 서면 일부러 웃긴 말투를 쓰고, 어리숙한 표정을 지으며 넘어질 뻔하다 괜히 휘청거린다. 그렇게 분위기를 띄우고, 아이들이 그 모습을 보며 깔깔 웃어줄 때 그게 세상에서 제일 행복하다고 느낀다. 보통의 여자아이들의 수줍게 앉아서 소꿉놀이를 할 시간에, 이 아이는 창문에 얼굴을 들이밀고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어, 방과 후 수업을 듣는 친구들을 웃겨 혼나게 만든다.
손수건을 들려주면, 머리에 뒤집어 쓰고는 “이거 내 팬티야!” 하고 소리친다. 핸드벨 수업 시간에는 “앞에 나와서 춤추는 사람에게 마이쮸 준다!” 라는 선생님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번개처럼 나가 엉덩이를 흔들며 아이들의 환호를 독차지한다. 간식을 쥐고 돌아올 때는 세상을 다 얻은 표정을 지어보인다.
그런데 아이가 오늘, 뜻밖의 말을 했다.
“엄마, 나 이사 가고 싶어. 새 학교에 가서 이미지를 새로 만들거야. 공부도 잘 하고 얌전한 이미지로.”
“왜? 지금 학교에서는 어떤데?”
“지금은 개그맨이지. 남자애들도 다 나보고 웃기대. 근데 이제는 조금 다르게 보이고 싶어. 청순하게 머리를 귀로 살짝 넘기는 것도 괜찮고, 쿨하고 시크해 보이는 것도 멋있을 것 같아.”
나는 잠시 말을 잃었다. 사람들에게 웃음을 주는 일로 행복해하던 아이가, 그 웃음을 내려놓겠다는 이유가 ‘이미지’라니.
사람은 누구나 가끔씩 그런 생각을 한다.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에서 새롭게 시작하고 싶다는 생각 말이다. 하지만 어딜 가든, 결국 나를 데려가는 건 나 자신이다. 주변이 바뀌면 약간의 색깔은 달라질 수 있어도, 본질은 크게 달라지 않는다. 내 아이도 그렇다. 남들이 웃는 걸 보며 스스로 가치 있다고 느끼는 아이. 그건 이미 타고난 역할이다. 누군가의 웃음을 만들어 주는 사람. 그건 생각보다 드물고 굉장히 귀한 자리이기 때문이다.
기억을 거슬러보자면, 학창시절의 나도 아이와 비슷했다. 좋아하는 선생님의 관심을 받고 싶어서 괜히 더 시끄럽게 떠들고, 친구들을 웃기고 싶어서 영어 시간에 낭독할 차례가 돌아오면 익살스러운 전라도 말투로 읽어서 친구들을 빵 터지게 했다. 어수룩한 말투로 사람들의 호감을 사고 싶어했고, 악성곱슬이라 비가 오는 날에는 친구들과 선생님이 내 머리를 보고 ‘초가집’같다며 놀릴 때도, 그게 그렇게 웃기고 자랑스러웠던 시절이 있었다. 나이가 들어 조금씩 움츠러들고, 관심받는게 부담스러워지긴 했지만, 지금도 시댁에 가면 온갖 행사와 게임의 총대를 맨다.
그 때의 나를 닮아서일까. 아이가 친구들을 웃기는 데 인생을 거는 걸 보면. 한편으로는 웃기고, 또 한편으로는 저 포지션이 좀 짠하기도 하다.
사실 ‘깔깔이 이미지’는 벗기가 힘들다. 이제 와서 청순미를 드러내거나, 시크한 척 도도하게 굴어도 단번에 이미지가 바뀐다거나, 남자애들이 갑자기 이상형으로 봐주지는 않을거다. 그래도 괜찮다. 세상에는 특이한 취향을 가진 사람들이 반드시 존재하니까. 그 특이한 취향 덕분에 엄마랑 아빠도 서로를 알아본거고.
그리고 아이 역시 언젠가 스스로도 얼마나 가치있고, 눈부시게 빛나는 존재인지를 알게 될 것이다. 결국 웃음을 주는 사람 곁에는 늘 웃는 사람들이 있다. 다른 사람들에게 웃음을 주는 내 아이 곁에는, 늘 웃는 사람들로 가득하겠지.
이미지 변신을 꾀하는 아이에게는 퍽 안타까운 일이지만, 부모된 심정으로는 참 다행인 일이다.
오늘도 나는 아이를 바라보며 생각한다. 누군가를 웃게 만들고, 스스로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삶. 그 단순해 보이는 장난 속에는 자기만의 중심과 선택이 담겨 있다. ‘깔깔이 포지션’은 단순한 역할이 아니라, 아이가 세상과 관계를 맺는 방식이자, 자신을 지켜내는 방식이기도 하다. 더불어, 아이가 다른 사람을 위해 즐거움을 주려는 이타성을 보여주는 행위이기도 하다.
아이를 바라보며, 나 역시 삶을 조금은 가볍고, 그러면서 단단하게 살아가는 법을 배운다. 그리고 언젠가, 아이가 웃음을 잠시 내려놓고 자신만의 속도로 살아가더라도, 그 선택 역시 아이의 행복임을 이해할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