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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의가 아니라, 눈치보는겁니다

500원짜리 죄책감

by 도토리


아이가 지금보다 더 어렸을 때의 이야기이다.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을 다니다 보면, 어느 오후 놀이터 앞에서 원 차량이 서고, 아이들이 우르르 쏟아져 내린다. 그리고 매일 마주치는 엄마들, 아빠들, 혹은 할머니, 할아버지들과는 가벼운 눈인사를 하게 된다.

짧은 인사를 나누고, 높은 곳에 올라가려는 아이를 말리고, 싸우는 아이들을 달래다 보면 어느새 아이들은 하나같이 배가 고프다고 투덜댄다.

5시쯤이니 ‘조금만 기다렸다가 집에 가서 씻기고 밥 먹이자’ 싶지만, 꼭 누군가는 간식을 사주겠다고 나선다.
고마운 마음이 들기도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부담이 더 크다.

한 번 얻어먹으면 그다음엔 내가 사야 할 것 같고, 또 그다음엔 다시 얻어먹게 되는 순서가 생기니까.
아무도 안 사주면 다 같이 편할 텐데, 괜히 돈도 새고, 집에서는 밥도 덜 먹는다.


나만 이런 생각 하는 걸까.
누군가의 호의를 편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나 자신이 때로는 좀 삐뚤어진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도 아이들이 친구들과 나란히 앉아 같은 간식을 먹으며 낄낄대는 걸 보면, 그게 또 얼마나 귀엽던지.





나는 카페인을 전혀 못 먹는다.
커피, 녹차, 밀크티, 박카스, 콜라까지.
감각이 예민해서 몸이 단번에 반응한다.
술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카페에 가면 늘 디카페인 아메리카노만 마신다.
티백은 왠지 돈이 아깝고, 시럽 섞인 음료들은 너무 달기 때문이다.
그나마 디카페인도 오후 세 시를 넘기면 피한다. 10% 정도는 카페인이 들어 있으니까.


그런데 꼭 누가 커피 한 잔 사준다고 하면 입이 떨어지질 않는다.
‘디카페인으로 주세요’ 한마디가 뭐라고 그렇게 조심스러울까.
아메리카노는 2천 원인데, 디카페인은 3천5백 원이 넘는다. 혼자 괜히 비싼 걸 시키는 사람처럼 느껴져 그냥 아메리카노를 주문한다.


예의 바르게 산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눈치 보며 살고 있었다.

커피를 마신 날 밤에는 어김없이 손이 떨리고, 가슴이 두근거려 잠을 이루지 못한다.
비 맞은 강아지처럼, 이불 속에서 달달 떨며 ‘괜히 그랬다’고 후회한다.


아이에게도 그랬다.

누가 아이스크림을 사준다고 하면, 콘이나 샌드류는 안 된다고 했다.


“이모들 부담스러우실 수 있어. 그런 건 엄마가 사줄 때 먹자. 이모들이 사주시면 메로나 같은 걸로.”


과자도 마찬가지였다. 천 원이 넘는 건 고르지 못하게 했다.


“폐 끼치면 안 돼.”
나는 그렇게 가르쳤다.


그러다 보니 아이는 자연스럽게 어른들과 친구들의 눈치를 보는 아이가 됐다.


나는 그걸 ‘예의 있는 태도’라고 착각했는지도 모른다.
결국 내 미니미를 만든 셈이다.




이제 아이는 초등학교 2학년이 됐다.

같은 학원에 다니는 한 살 어린 동생의 할머니가 있다.
그분은 매번 학원차에서 내리자마자 손녀와 함께 간식가게로 향한다.
그리고 꼭 우리 아이에게도 “같이 가자, 할머니가 하나 사줄게” 하신단다.

아이는 매번 거절했다.
“제가 용돈 모아서 사 먹을게요. 괜찮아요.”
나는 그 사실을 전혀 몰랐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이가 집에 와서 말했다.



“엄마, 오늘은 할머니가 계속 사주신다고 해서 제일 싼 거, 500원짜리 골랐어.
원래 괜찮다고 했는데, 계속 말씀하시길래 괜히 죄송해서… 얻어먹어도 돼?”


순간, 숨이 턱 막혔다.
이건 내가 바라던 예의가 아니었다.

그래서 말했다.
“괜찮아. 그런 건 받아도 돼. 너무 거절하는 것도 예의가 아닐 수 있어.”






나는 아이에게 ‘예의’를 가르친 걸까, ‘눈치’를 가르친 걸까.

물론 눈치는 필요하다.
부장님이 짜장면을 시킬 때 혼자 쟁반짜장을 고르는 건 사회생활의 자살행위라는 걸, 우리 세대는 잘 안다.


세뱃돈도 “아니에요, 괜찮아요”를 세 번쯤 하고 나서야 받는 게 미덕이라 배웠다.


하지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왜 내 한마디조차 솔직히 못 하면서, 아이에게도 그렇게 살라고 알려준 걸까.
‘폐 끼치지 말라’는 말 속엔 결국, ‘네가 작아져야 한다’는 뜻이 숨어 있었던 건 아닐까.


세상 앞에서 주저하는 법만 배우는 아이.
500원짜리 쥐포 하나 얻어먹으면서도 죄책감에 시달리는 아이.
그건 내가 바란 그림이 아니었다.


아이는 정말 흰 도화지다.
부모가 칠하는 색으로 세상을 배운다.

나는 지금, 아이에게 어떤 색을 물들이고 있을까.


어쩌면 이건 아이에게 묻는 질문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 던지는 물음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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