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개발, 재건축
국토가 작아서일까.
우리는 유독 부동산에 가정 경제의 거의 전부를 올인한다.
과거에는 그렇지 않았다.
그러나 강남 개발과 신도시 유치로 원주민과 투자자들이 벼락부자가 됐다는 소식이 퍼지면서, 너 나 할 것 없이 부동산 시장으로 몰려들었다.
가까운 일본은 재개발·재건축이 정부 주도로 이뤄진다. 우리처럼 조합이 주도하는 구조가 아니다.
선진국인 유럽과 미국은 리모델링이나 보존을 통해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연결한다.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부동산 열기가 한국처럼 뜨겁지 않다.
이제 재건축·재개발은 최대 숙원사업이 됐다.
이익에 따라 합의가 이뤄졌다가, 곧 분란으로 바뀌기도 한다.
서울 모처의 한 교회는 재개발 한복판에 자리 잡았다. 보상금과 조건이 관철될 때마다 찬성과 반대를 오갔다. 그 과정에서 요구 사항은 점점 변했을 것이다.
과거에는 어떻게든 수용을 전제로 움직였다면, 요즘은 배제한 채 사업을 밀어붙인다.
이제는 사업성보다 높은 금융 이자가 새로운 패러다임을 주도하는 듯하다.
세대수보다 공사 기간이 더 중요한 요소가 돼버렸다.
만약 우리가 재건축·재개발을 철거가 아닌 보존 중심으로 해왔다면 어땠을까.
재건축은 건물의 노후화에 따른 절차이며, 재개발은 기반시설 부족과 노후화 밀집지역의 환경 개선 사업이다.
노후화는 구조 보강으로, 기반시설 부족은 보충으로 해결할 수 있다.
그런데 왜 이 해결이 반드시 아파트 형태여야 하는가.
특정 건설사들만 배를 불리는 행태는 아닌지 의심스럽다.
재개발·재건축을 위해 우리는 도시를 파괴하고 있지는 않은가.
유럽의 형형색색 집들과 붉은 기와로 뒤덮인 마을 지붕 위로 보이는 해안에 감탄하면서도, 우리는 ‘재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의 삶의 터전을 부순다.
더 넓은 놀이터나 공원이 보상의 전부인 듯, 죄책감 없이 건물과 골목을 허문다.
재건축·재개발에 반대하면 더 많은 돈을 요구하는 사람처럼 취급된다.
삶의 터전을 지켜온 원주민이지만, 개발업자 눈에는 알 박기이자 눈엣가시일 뿐이다.
정치인에게도 지역구 재건축·재개발은 숙원사업이다.
다음 선거에서 본인이 이뤄낸 업적으로 포장할 수 있으니까.
누구도 묻지 않는다. ‘새로움’을 당연시한다.
개발이라는 이유로 원주민은 쫓겨난다.
새로 이주한 이들과 개발업자들에 의해.
거주자의 다수가 찬성했다는 이유로 모든 절차는 합법이 된다.
반대하는 원주민은 불법을 자행한 사람으로 낙인찍힌다.
그들은 환호한다. 머릿속에 그린 멋진 빌딩을 상상하며.
때로는 젠트리피케이션에 의한 퇴거처럼 포장되기도 한다.
개인 문제로 치부하며 물타기를 시도한다. 하지만 조금만 들여다보면, 재개발이라는 명목으로 원주민이 내쫓긴 경우가 대부분이다.
지역 전체가 개발되면서, 그곳에서 경제활동을 하던 이들은 주변으로, 혹은 아주 먼 곳으로 터전을 옮겨야 한다.
모두가 잊을 즈음, 차를 타고 그곳을 지나면 낯선 아파트 풍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그때 깨닫는다. 이제는 아무것도 바로잡을 수 없다는 것을.
시장도, 구청장도, 국회의원도 모두 사라졌다.
재개발로 호재를 누린 사람들은 시세차익을 챙기고 이미 다른 재개발 지역으로 옮겼을 것이다.
자초지종을 물을 사람은 없다.
그렇게, 하나하나 사라져 간다.
개발이라는 이유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