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미국의 정신 건강 문화
거의 유일하게 챙겨보는 예능 프로그램은 tvn 채널에서 유재석과 조세호가 진행하는 '유퀴즈온더블록'이다. 길거리에서 시민들 인터뷰하는 게 재밌어서 보기 시작했는데 코로나 시대로 접어들면서, 스튜디오에서 명사, 연예인들을 인터뷰하는 프로그램으로 바뀌었다. 다양한 인사이트를 들을 수 있어서 밥 먹을 때 꼭 틀어놓는 편이다.
그러던 중 유퀴즈온더블록에 예일대 정신과에 계신 나종호 선생님이 나온 편을 봤다.
나종호 선생님은 자살 예방에 관심을 갖고 연구하시고 계신다고 한다. 방송에서는 미국에서는 자살 예방을 위해 정신과 응급실을 운영한다는 이야기 등과 미국 정신과 진료실에서 만난 사람들, 그리고 자살에 대한 견해를 이야기하셨다. 한국인으로 미국에서 공부 하시고, 미국 병원에서 일하고 계시기에, 이 분께 일방적 내적 친밀감을 느꼈다. 그날 밤 전자책으로 '뉴욕 정신과 의사의 사람 도서관' 책을 구매했다.
책이 두껍지 않고, 한 챕터마다 에피소드 위주로 되어있어서, 다 읽는데 2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이 책을 읽을 당시 한창 불안과 우울로 힘들어하고 있었다. 한국에서도 산전수전 다 겪으며 살아왔다고 생각했지만, 연구직의 워커홀릭 문화, 영어의 한계, 미국 직장 문화에 대한 낯섦, 한국에서 하던 일과 다른 처음 하는 종류의 일, 플러스 알파로 겨울에 해가 4시에 지는 미국 북동부 지역의 기후, 이 모든 것이 합쳐져, 일하다가도 눈물이 갑자기 나거나, 그냥 길을 걷다가도 갑자기 눈물이 나거나, 일어날 가능성이 희박한 일들에 대한 걱정으로 잠들고 일어날 가능성이 희박한 일들에 대한 걱정으로 잠에서 깨는 날들이 이어지고 있었다. 이 시기를 반드시 겪어야 하기에 참아내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힘이 들지 않은 건 아니었다.
이 책을 읽으며, 미국에서 정신 건강에 대해 얼마나 한국과 다르게 접근하고 있는지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 보게 되었다. 미국에서 대학 혹은 직장에 들어가면 정신 건강 관련된 리소스(resource)들을 지속적으로 제공한다. 잊을만하면 정신 건강 관련 자료를 이메일로 보낸다. 그리고 화장실 벽벽마다 정신 건강 상담을 할 수 있는 무료 긴급 전화번호가 적혀있다.
그런데도 나는 직장 화장실 벽에 붙어있는 정신 건강 상담 전화번호를 선뜻 누르지 못했다. 영어로 내가 겪고 있는 어려움을 제대로 설명할 수 있을까, 영어로 상담하는 것 자체가 또 다른 스트레스가 되지 않을까, 마지막으로 그들이 내가 외국인 노동자로 일하며 겪고 있는 어려움에 대해 공감하기 힘들 것이라는 바로 그 이유들이었다.
때 마침, 나는 주치의와 첫 약속이 잡혀있었다. 보통 내가 원할 때 진료를 받을 수 있는 한국과 달리, 미국은 보통 내과 의사나 가정의학과 의사인 주치의(primary care doctor)를 지정하고, 자신의 전반적 건강 문제를 상담받고 처방을 받는다. 예약 후 3달을 기다린 끝에, 처음으로 주치의를 만났다.
내과 의사인 주치의의 첫 질문은 '어디가 아파서 오셨나요?'가 아니라 '너라는 사람에 대해서 나에게 좀 알려줄래?'라는 것이었다. 나는 한국에서 왔고, 보스턴에서 석사를 했고, 지금 하는 일은 뭐고 어쩌고 저쩌고 대답을 했다.
그러다가 질문 중 하나가 '너의 요즘 기분은 어때?'였다. 이 질문을 듣자마자, 정신과 의사도 아닌 내과 의사 앞에서 갑자기 눈물이 펑펑 쏟아지기 시작했다. 내가 요즘 겪고 있는 어려움과 기분에 대해 그녀에게 쏟아냈다. 의사가 일어나서 불안장애 설문지를 갖고 오더니 체크를 하라고 했다. 점수가 거의 만점 가까이 나왔다.
의사는 나에게 선택적 세로토닌 재흡수 저해제, 영어 줄임말로 SSRI 약을 권했다. SSRI는 항우울제이며 항불안장애 약이기도 하다. 한국에서 종종 불안한 증상이 있긴 했지만 급성 스트레스 시기가 지나가면 괜찮아지기에 한 번도 정신과 약을 먹어야겠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정신과 진료를 받으면 민간 의료 (실손) 보험 등에서, 위험에 대한 고지 의무 위반으로 보험료를 지급하지 않는 경우에 대해 들어본 것이 정신과를 방문하지 않은 이유였다. (이는 사실 확인이 안 된, 전적으로 개인적인 견해임을 밝힙니다.) 또한, 너무나 쉽게 정신과 약을 처방하는 미국의 문화가 오히려 거부감으로 다가오기도 했다. 의사에게 내가 약물 복용에 대해 꺼리는 주된 이유에 대해서 설명하자 "너의 개인 정보를 그들이 알 수 있는 방법은 절대 없어." 라고 의사가 말한다. 그렇다. 미국은 개인 정보를 어떤 면에서는 목숨보다 소중히 여긴다.
현대 정신 의학에서는 정신 질환을 개인의 의지 문제가 아니라, 뇌의 기질적인 변화 문제로 보고 있다고 한다. 유퀴즈에서 촉발된 정신 건강에 대한 나의 인식 변화와 나를 염려하는 이들의 권유로 SSRI를 복약하기 시작했다. 효과가 나타나기까지는 6주가 걸린다고 한다. 아직 6주가 되지 않아서 위약 효과인지 진짜 효과가 나타나는지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효과가 있는 것 같다.
'뉴욕 정신과 의사의 사람 도서관' 책을 읽으며, 글에서 왠지 브런치 냄새가 솔솔 난다는 느낌이 들었다. 검색을 해보니 역시 브런치에서 글을 쓰고 계셨다.
"정신 질환에 대한 낙인을 해소하고 정신과 방문의 문턱을 낮추고자 글을 씁니다"라는 나 교수님의 자기소개가 눈에 들어온다.
부가적으로 이 책을 읽으며 '이렇게 금방 읽히는 책이라면, 나도 브런치에서 책 한 권 쓸 수 있겠는데?'라는 다소 건방진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지금 브런치에서 이 글을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