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부터 생각을 이어가 봤다.
현재 가지고 있는 데이터는 서비스 센터를 기준으로 얼마나 먼 거리에서 서비스수요가 발생했느냐였다. 필요한 작업은 현재 서비스 센터가 아니라 모스크바 내 특정 지역을 임의로 선택했을 때 그 지역으로부터 6km 내의 수요를 예측하고 이를 근거로 만족도 향상치를 계산하는 것이었다. 이를테면 현재 데이터가 현재 서비스 센터 위치를 기준으로 ‘절대적’으로 정의되어 있다면 이를 ‘상대적’이고 ‘포괄적’으로 변환해야 했다.
무언가 실마리가 보였다. 내 사고는 현재 서비스 센터의 위치가 좌표계의 원점이라는 선입견에 갇혀 있었다. 이 관념의 틀을 우선 부숴야 했다. 원점을 지우면 모든 좌표는 상대적으로 정의할 수 있었다. 방법은 모스크바 전체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하나의 좌표 체계로 바꾸는 것이었다. 만족도의 임계점은 6km였으니 좌표의 최소 단위는 3km로 잡으면 될 것 같았다.
지도는 위도와 경도를 바탕으로 3km × 3km 구역으로 나눴고 각 구역별로 6km 내 서비스 수요가 전체 수요의 몇 퍼센트 인지 계산했다. 중복 계산되는 수요는 있겠지만 상관없었다. 어차피 계산의 목적은 단 하나의 센터 위치를 선정하기 위함이니 하나의 위치가 선정되고 나면 다른 숫자들은 무의미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분석 프레임워크를 만들고 엑셀을 돌리자 결과가 모습을 드러냈다.
됐다. 지도가 그려졌다. 결과는 직관적이었다. 서비스 수요가 모스크바 내에서 어떻게 분산되어 있는지 한눈에 들어왔고 수요의 밀도가 높은 지점도 바로 파악됐다. 주거지역과 유동인구가 많은 지역이 서비스 밀도가 높은 지역으로 분석됐고, 현재 서비스 센터 위치도 서비스 밀도가 가장 높은 곳 중 하나에 전략적으로 배치되어 있었다.
지도 하나로 답은 자명이 드러났다. 추가로 서비스 센터를 세운다면 현재 센터 위치를 중심으로 다섯 블록정도 위나 아래로 선정하면 될 것 같았다. 수요만 보자면 센터 하나를 추가하는 것보다는 위와 아래에 각각 하나씩 추가하는 게 맞아 보였다.
이렇게 쉽게 답을 찾을 수 있는 게 맞나? 분명 분석은 완벽했고, 답은 분석 결과로부터 순리에 따라 도출됐다. 하지만 무언가 석연치 않았다.
‘이게 최선입니까?’
귓가에 김 부장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흠칫 놀라 뒤를 돌아봤지만 아무도 없었다. 김 부장의 목소리가 귀에 박혀 있었다. 가슴을 쓸어내리고 의자를 돌리며 모니터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내가 정말 가용한 모든 데이터를 살펴본 걸까? 더 이상 할 수 있는 분석은 없는 걸까? 내가 드러내고자 하는 메시지는 명확히 드러났을 까? 끝났다고 끝은 아니었다.
만약 김 부장이 이 분석결과를 봤다면 무언가 꼬투리를 잡아낼 것이다. 물론 그게 트집을 잡기 위한 꼬투리라기 보단 메시지를 명확히 하기 위한 노력이란 건 나도 이제 인정할 수밖에 없었지만 말이다.
그때 나도 모르게 고개가 갸우뚱 기울어졌다. 결과가 너무 수요계산에만 치중해 있었다. 현실 세계는 서비스수요라는 정량적 수치로만 이뤄진 세계가 아니었다. 김 부장 말대로 효율성을 고려해 최대한 단순화시킨 분석이긴 했지만 지금 김 부장이 이 분석을 본다면 지나치게 단순화해 일반화 오류를 범했다는 지적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분석과 현실 간의 균형이 필요했다.
문득 숨이 막힐 듯 앞뒤가 꽉 막힌 이미지 하나가 떠올랐다. 고동혁 과장과 공항에서 숙소로 이동하는 동안 모스크바 강변을 따라 꽉 막혔던 도로였다. 강변도로는 차로 가득했고, 특히나 다리가 있는 도로에서는 옴짝달싹 할 수 없었다.
한국도 생각해 보면 비슷했다. 강변북로와 올림픽대로는 항상 막혔고 강북과 강남을 오가는 다리들도 그랬다. 지금까진 너무 숫자만 보고 있었다. 나는 바로 수요지도를 실제 지도와 나란히 놓고 비교해 봤다. 과연 추가적으로 고려해야 할 만한 사항들이 눈에 들어왔다.
가장 큰 문제는 모스크바 강이었다. 모스크바는 일반적으로 교통체증이 심했는데 특히 모스크바 강을 따라서는 평일, 주말을 불문하고 항상 심한 교통체증이 발생했다. 아무리 거리가 가깝다 해도 모스크바 강을 건너야 한다면 만족도는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전체 수요 분포를 볼 때 모스크바 강을 중심으로 크게 3개 구역으로 나누어 보는 것이 합당했다.
이렇게 보면 현재 서비스 센터 위치에서 상, 하로 하나씩 서비스 센터를 늘리는 게 아니라 왼편 상단인 지역 1과 왼편 하단인 지역 2에 센터를 건립하는 게 만족도 향상을 위해 최적화된 계획이었다. 추가로 시간대별 교통량이라던가 도로 접근성 다양한 사양을 고려할 수 있었지만 다른 요소들은 단순화시켜도 크게 문제 될 건 없었다.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건 모스크바 강이 가져오는 지리학적 분리와 이에 따른 교통상황이었다.
결론적으로 현재 서비스 센터에서 40% 정도의 수요를 감당하고, 2개의 신규 서비스 센터를 건립하는 것이 만족도 향상을 위해 최적화된 계획이었다. 추가되는 센터는 지역 1의 오른편 중간에 위치시켜 지역 3의 수요까지 어느 정도 커버할 수 있게 위치시키면 될 것 같았고, 또 다른 센터는 지역 2의 오른편 상단부에 위치시켜 모스크바 강 남단의 수요를 커버하게 하면 됐다.
모스크바 강 북서부와 남부에 신규 서비스 센터 2곳 구축.
아직 마침표는 찍지 못했다. 이게 최선일까? 나도 모르게 묻고 있었다. 여전히 최선의 결론에 도달한 건 아니었다. 현재 안은 신규 서비스 센터를 1개도 아니고 2개를 구축하는 계획이었다. 그것도 수요가 가장 높은 번화가 한복판에 말이다. 예산도 예산이지만 고동혁 과장을 비롯한 현지인들이 누차 강조했던 수리전문점과 마찰이 이슈가 될 게 뻔했다.
차선책은 두 곳 중 한 곳에 먼저 신규 센터를 구축하고 나머지 한 곳은 수리 전문점들과의 상황을 보면서 추진하는 것이었다. 단계적 접근 방법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일단 모스크바 강 남단에 신규 센터를 구축해 모스크바 강 북단과 남단에 거점을 수립하고 두 거점을 중심으로 직영 센터를 확장해 가자는 계획이었다.
김한겸 부장에게 내 안을 가지고 간 건 최종보고를 일주일 앞둔 어느 날 밤이었다. 김한겸 부장은 여느 때처럼 날카로운 눈매와 무덤덤한 표정을 날 맞이했다.
내가 데이터 분석을 진행하는 동안 김한겸 부장은 현지 실사와 서비스 운영 담당자 인터뷰에 집중했었다. 수리 전문점 대표들과도 몇 번이나 식사 자리를 가지며 데이터에서는 얻을 수 없는 정보를 얻으려 했다.
그런 모습은 임정혁 부장과는 사뭇 달랐다. 둘 다 논리적이고 분석적인 건 같았지만 다소 개념적이고 이론적으로 접근하는 임정혁 부장에 비해 김한겸 부장은 좀 더 현실적이었다. 그래서 임정혁 부장은 비전이나 포트폴리오 전략처럼 굴지가 큰 프로젝트를 많이 했고, 김한겸 부장은 사업 전략이나 운영 전략 프로젝트를 곧잘 했다.
언젠가 치수가 임정혁 부장과 김한겸 부장을 마스터하면 웬만한 전략 프로젝트는 손쉽게 할 수 있을 거란 얘길 했는데 충분히 공감이 가는 얘기였다.
김한겸 부장은 볼펜을 딸깍거리며 분석결과를 검토했다. 이따금 고개를 끄덕였고 ‘흠’하는 감탄사를 뿜기도 했다. 긍정의 의미인지 부정의 의미인지는 알 수 없었다. 과연 김한겸 부장은 시내 한복판에 서비스 센터 2 곳을 구축하자는 내 제안에 어떻게 반응할지 궁금증이 더해갔다. 그는 보고서를 다 읽은 뒤에도 볼펜을 딸깍거리며 한참을 생각에 잠겨 말없이 앉아 있었다.
“시내를 돌아다니다 보니 재미있는 서비스 센터가 있더군요.”
김한겸 부장은 긴 침묵 끝에 입을 열었다.
“몇 평 되지도 않는 작은 노점상 같은 공간인데 수리기사는 한 명도 없어요.”
서비스 센터에 수리기사가 없다니 무슨 말이지? 이해는 되지 않았지만 일단 그의 말을 들어보기로 했다.
“그런 센터를 컬렉션 포인트 (collection point)라고 부르더군요.”
컬렉션 포인트는 인터뷰 때 몇 번 언급됐던 서비스 센터 유형이었다. 컬렉션 포인트는 서비스를 접수하는 창구 역할만 했다. 접수된 제품을 서비스 센터로 보내 수리하고 수리가 완료되면 고객에게 배달을 해주는 시스템이었다. 러시아의 다른 사업자가 시범적으로 운영하는 제도였는데 효과가 좋았다.
제품을 받기까지 하루를 기다려야 하지만 대신 대기시간이 없어 만족도 측면에서는 방문고객 대비 크게 차이가 없었다. 센터 비용 측면에서도 배달에 따른 추가 비용이 있었지만 임대료와 인건비가 크게 감소해 오히려 이득이었다.
우리 전략은 대규모 수요를 감당할 수 있는 공장형 서비스 센터를 구축하는 거란 편견 때문에 별로 신경 쓰지 않았던 대목이었다. 한데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김한겸 부장이 컬렉션 포인트란 화두를 던지자 그동안 포켓볼공처럼 내 머리에 산재해 있던 여러 문제들을 단번 꿰뚫는 콤비네이션 샷이 터졌다. 틀을 벗어난 획기적인 생각이었다.
최적의 만족도 향상을 위해선 최소한 2개의 서비스 거점이 필요했고, 서비스 전문점과의 마찰을 고려할 때 서비스 거점이 그들 사업에 위협이 되어선 안 됐다. 직영 서비스 센터를 늘리지 않고 컬렉션 포인트를 운영하면서 접수된 제품을 수리 전문점으로 보낸다면 증가하는 서비스 수요에 대응하면서 수리 전문점과의 마찰도 방지할 수 있는 새로운 접근이 될 수 있었다. 주요 수리 전문점과는 전략적 파트너십을 통해 수리 품질이나 고객 응대도 직영 센터 수준으로 높여 관리하는 것도 가능했다.
왜 이 생각을 진작 하지 못했을 까? 답은 데이터 안에 있었다. 분명 가설과 스토리는 분석의 틀을 잡고 프레임워크를 만드는데 도움이 됐다. 하지만 실행 가능한 결론을 도출하기 위해선 현실과 데이터가 필요했다. 어찌 보면 가설이나 스토리도 현실과 데이터 안에 존재하는 것이란 생각도 들었다. 딱히 이분법적으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상호작용하며 하나의 ‘인사이트’가 탄생하는 것이었다.
“세윤 씨가 제안한 서비스 센터 두 개는 모스크바 강 남단에 신규 서비스 센터 한 개와 북서부에 컬렉션 한 개를 건립하는 걸로 하면 되겠어요. 이게 최선의 안 인 것 같아요.”
김한겸 부장이 말했다. 지금 칭찬을 한 건가? 그는 눈이 동그랗게 떠진 내 얼굴을 재미있다는 듯 쳐다보며 엄지 손가락을 치켜올려줬다.
우리는 결론에 대한 최종 검증을 위해 고동혁 과장, 현지 서비스 운영 담당자와 인터뷰를 하며 논리를 좀 더 정교화하고 살을 더했다. 서비스 센터 위치로 선정했던 곳은 담당자들과 실사 방문을 하며 계획을 수립했고, 컬렉션 포인트는 수집된 물량을 소화하기 위해 제휴를 추진할 수리 전문점 오너들과도 수 차례 미팅을 가졌다.
그렇게 일주일을 보내고 나니 서비스 센터와 컬렉션 포인트 구축에 대한 계획이 구체화 됐다. 법인장과 현지 서비스 센터장을 대상으로 한 최종보고는 성공적으로 끝나며 2달간 이어진 ‘원정’ 프로젝트가 마무리 됐다.
최종 보고 전까지 몇 일밤을 지새웠던 터라 비행기에선 그대로 골아떨어질 거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잠이 오지 않았다. 웅웅 거리는 백색 소음을 타고 ‘이게 최선입니까’라던 김 부장의 목소리가 울리는 듯했다.
최선.
처음엔 밑도 끝도 없이 날 득달하려는 말로만 들렸다. 하지만 그와 함께 일을 해보니 그게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있었다.
지난 몇 번의 프로젝트를 거치며 최선을 다해 하다보면 답은 나온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초반에 생각했던 답과는 다른 형태 거나 메시지가 달라지는 경우는 있었지만 어떻게든 ‘답’이라 할 만한 인사이트는 도출됐다.
어떤 한 이슈에 대해 충분히 오랜 시간 동안 다양한 관점에서 고민을 하다 보면 그 이슈가 품고 있던 새로운 속성이 드러났고 그런 속성을 활용하면 평범한 사실로부터도 얼마든지 메시지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최선을 다한다는 건 무조건 열심히 하라는 건 아니었다. 그건 생각을 게을리하지 말라는 의미였다. 하나의 길을 찾았다고 해서 익숙해진 그 길로만 직진하는 게 아니라 땅을 파서 토질도 살펴보고 옆에 있는 언덕에 뛰어올라 전체 길을 조망하기도 해야 했다. 관점을 지속적으로 바꾸고, 생각의 틀을 부수고 또 부숴야 비로소 답을 찾고 또 만들어 낼 수 있었다.
이 모든 건 끝없는 사고의 연속체였다. 최선을 다한다는 건 그런 명민함과 근면함이 영혼 깊숙이 각인되며 삶의 태도가 된다는 의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