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영업전략: 파이프라인 관리 (4)

by 성세윤

"어때요? 쉬운 게 없죠?”


이주완 대표가 물었다. 나는 책상에 올려진 갈색 봉지에 시선을 두며 고개를 끄덕였다. 쉬 답을 찾았다며 고민을 멈춰버렸던 내 안일함에 면이 후끈 달아올랐다.


“조언을 하나 드리자면… 세윤 씨가 아포리아에 빠진 건 영업 팀과 마케팅 팀이라는 이분법적 프레임에 갇혔기 때문이에요. 그게 세윤 씨가 보고 들은 전부라서 그 안에서만 답을 찾으려고 하는 거죠.


하지만 세상은 넓고 현실은 풍성하기 이를 데 없답니다. 어떤 현상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근인은 무한히 많아요. 그래서 생각을 게을리 해선 안된다는 거예요. 관점을 만들고 또 부수며 계속 진격해 가야죠.


제가 좋아하는 소설 중에서 <플랫랜드>라는 작품이 있어요. 평면으로 이뤄진 2차원의 세계에 살고 있는 사각형에 대한 이야기죠. 어떤 이야기 인지 한번 들어 보실래요?”


이 대표는 장난기 넘치는 아이처럼 눈을 번뜩이며 종이 한 장을 꺼냈다. 그는 한쪽에 원을 그리고 반대편에 사각형을 그렸다.


“자, 이 두 도형을 보세요. 어떤 도형이죠?”


“원과 사각형입니다.”


“두 도형이 같나요?”


“아니요. 다릅니다.”


“하지만 플랫랜드에선 두 도형이 같아요. 아니 다르긴 한데 같다고 인식하는 거죠. 세윤 씨가 실제로 플랫랜드에서 두 도형을 본다고 가정해 보세요. 그러니까 이 평평한 종이 위에서 2차원으로 두 도형을 보는 거죠.”


이 대표는 내가 원과 사각형을 수평으로 바라봤을 때 내 시선에 들어오게 될 반원과 면을 따라 굵게 선을 덧그렸다. 그리곤 종이를 평평히 눕혀 내 시선과 일치하도록 들어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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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랫랜드에서 두 도형을 보면 세윤 씨는 이 굵은 선을 보게 돼요. 평평한 면에서 두 선을 보면 두 면은 같은 길이의 직선으로 보이죠.


그런데 세윤 씨가 두 도형을 따라 걸어보면 원을 따라 걸을 때 시간이 더 걸릴 거예요. 정확히 말하자면 πr과 2r만큼 차이가 나겠죠. 분명 같은 선인데 이상하게 한 선을 걸을 때는 시간이 더 걸리는 거예요. 공간이 왜곡된 것처럼 말이죠. 플랫랜드에 살고 있는 세윤 씨는 그 이유를 알 수 없습니다. 2차원이라는 관점에 갇혀 있으니까요.


이 종이가 바로 세윤 씨가 갇혀 있는 세상이에요. 이 평평한 면이 세윤 씨가 가지고 있는 지식의 전부고 세윤 씨는 그게 세상의 전부라고 생각하면서 살고 있는 거죠. 그래서 원과 사각형 간의 차이를 모순이라고 판단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답을 보려면 과감히 이 세상을 탈출해야 해요. 새로운 관점에서 사물을 본다는 건 말이죠…”


이 대표는 내 두 손에 종이를 쥐어 주고 공중에 들게 했다. 그리곤 내 손을 감싸 종이를 팽팽히 잡아당겼다. 이 대표는 가볍게 심호흡을 하더니 연필을 들고 종이를 찔렀다. 움찔할 새도 없이 퍽 소리와 함께 구멍이 뚫렸다. 휑하게 뚫린 구멍 사이론 이대표의 눈동자가 보였다.


“…이런 겁니다. 시공간에 차원의 구멍을 내듯 생각의 틀을 완전히 부수고 새롭게 정립해야 해요. 기존에 알고 있던 모든 걸 부정하고 새롭게 바라보는 거죠. 쉬운 일은 아닐 겁니다. 인간의 사고란 보수적인 면이 있어서 항상 변화에 저항하려 들거든요. 그걸 극복해야 하는 거죠.


이런 말하긴 그렇지만 세윤 씨를 보면 재미있어요. 뭔가 하고 싶은 열정으로 가득한데 뭘 할지 몰라하죠. 땅을 파야할지 하늘로 뛰어야 할지 방향을 못 잡고 있어요. 답답하고 머리가 꽉 막혀있는 기분일 거예요.


그렇지만 포기하시면 안 돼요. 생각을 멈춰서도 안되고 너무 쉽게 결론을 내려서도 안 돼요. 본인 스스로를 괴롭히고 또 괴롭히세요. 한계를 만들지 마시고 정말 이렇게 까지 해야 하나 싶을 정도로 자신을 몰아붙여 보세요. 그게 바로 프로페셔널의 마음가짐이랍니다.”


어깨가 축 늘어졌다.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기죽어할 필요는 없어요. 이건 누구나 겪는 일이에요. 지금 힘들어하고 있는 세윤 씨를 보면 꼭 떠오르는 사람이 있죠.”


누구지? 임정혁 부장이나 김한겸 부장 얘긴가? 그들은 언제나 모든 걸 알고 어떤 프로젝트든 해낼 것 같았는데 그들도 나 같은 시절이 있었을까? 나는 고개를 들진 못한 채 귀만 쫑긋 거렸는데, 그래서인지 이 대표가 던진 다음 한 마디는 기분 좋은 놀라움을 안겼다.


“… 저랍니다.”


“네?”


“제가 주니어 때 꼭 세윤 씨처럼 힘들게 일을 배웠죠.”


난 나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고 순간 이 대표와 눈을 마주쳤다. 이 대표의 눈은 인자했고 입가엔 따사로운 미소가 가득했다.


“조급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방법론적으론 이보다 쉬운 게 없답니다. 모든 지식을 부정하고 본인이 무지하다고 인정하시면 돼요. 그러면 자연히 고개는 숙여지고 답을 찾아야 한다는 의무감과 열정이 동시에 생기죠. 그 의무감과 열정이 답을 찾는 힘이 되는 거예요. 그 힘을 모아 질문을 던지세요. 십자포화를 날리듯 질문을 던져 영업 팀장과 마케팅 팀장이 던진 프레임을 부숴야 해요.


오늘 저와 던진 질문들은 모두 한발 짝 떨어져 시장관점에서 문제를 직시했기 때문에 가능했어요. 이번엔 한 발짝 다가서서 보면 어떨까요? 보고까진 얼마 안 남았습니다. 속도를 내보시죠.”


이주완 대표는 양손으로 내 어깨를 잡고 힘을 불어넣듯 끌어올렸고 손에 샌드위치가 든 갈색봉지를 들려줬다. 나는 30분 남짓 길을 걷다 택시를 잡고 시큐테크 사무실로 향했다.



이 대표 말대로 마케팅 팀과 영업 팀 간의 얽히고설힌 실타래를 풀다 보면 분명 근인이 보일 거라 믿어 보기로 했다. 나는 양손으로 볼을 한 번 힘껏 치고 이 대표가 했던 말을 다시 생각해 봤다. 이 대표가 얘기한 대로 난 마케팅 팀장과 영업 팀장의 관점에서만 문제를 바라봤다. 시각은 좁았고 생각은 그들이 제시한 프레임을 벗어나지 못했다.


이 대표가 상황을 이해한 후 처음 한 것은 한 발짝 떨어져 상황을 살펴보는 일이었다. 그는 ‘시장’이라는 관점에서 판매기회가 어떻게 달라지는지 고민했고, 그렇게 달라진 판매기회가 마케팅 팀과 영업 팀 업무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질문을 던졌다. 그래서 전엔 생각지 못했던 인사이트를 발견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한 발짝 다가서서 본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문득 그건 내부, 즉 조직을 보란 얘기인 것 같았다. 분명 시장을 확장하며 조직에도 변화가 생겼을 거고, 그 변화 또한 현재 상황에 영향을 줬을 것이다.


마케팅 팀장과 영업 팀장에 따르면 두 팀 간 사이가 틀어지기 시작한 건 1년 전쯤부터였다. 당시 시큐테크 내에는 공식적으로 판매기회를 관리하는 기능이 없었다. 마케팅 팀에서 일부 판매기회 정보를 수집하는 기능이 있었고, 수집된 판매기회를 분석하고 시스템 상에 접수하는 기능은 영업 팀에 있었다. 콜 캠페인을 하거나 고객 질의에 대응하는 업무는 고객서비스 팀 내 사업지원그룹에서 수행했다.


사업지원그룹은 주로 마케팅 팀이나 영업 팀과 업무를 진행했지만, 소속은 고객서비스 팀이었고, 근무 위치도 마케팅 팀과 영업 팀이 있는 서울 본사가 아니라 고객서비스 팀이 있는 경기도 콜센터라 어디 소속이라고 딱히 말하기 어려운 조직이었다.


기능이 흩어져 있다 보니 판매기회가 공식적으로 관리되는 건 영업 팀에서 분석을 끝내고 시스템에 등록하는 시점부터였다. 하지만 고객군을 확장하며 판매기회를 기회가 최초 인지되는 시점부터 관리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다. 마케팅 활동이 영업성과로 이어지기까지 전체 파이프라인을 체계적으로 관리할 필요성이 있다는 주장이었다.


마케팅 팀장과 영업 팀장은 긴 논의 끝에 사업지원그룹 인원들을 데려와 파이프라인 관리 기능을 신설하기로 협의했다. 조직을 키우고 싶었던 마케팅 팀장은 사업지원그룹을 마케팅 팀에서 관리하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했고 영업 팀장도 반대하진 않았다. 소속만 서비스 팀이었을 뿐 사업지원그룹에서 하는 일은 마케팅 업무에 가까웠고 영업 팀장으로선 파이프라인 초반 프로세스를 마케팅 팀에서 전담해 주는 게 더 효율적일 거란 계산이었다.


그렇게 사업지원그룹은 마케팅 팀으로 배치됐다. 하지만 소속이 바뀌었을 뿐 직원들이 담당하던 업무는 그대로였다. 그들은 매일 하던 대로 같은 콜센터로 출근하여 같은 책상에 앉아 고객에게 전화 걸고 상담하며 같은 업무를 봤다.


소속 하나 바뀐 게 어떤 영향을 미친 걸까? 프로젝트 초반 조직변경 얘기를 처음 들었을 때 귀를 기울여 듣긴 했다. 하지만 소속을 옮겼을 뿐 하는 업무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는 팀장들의 말에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한 발짝만 더 내디디면 새로운 사실을 파악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고구마를 먹은 듯 속이 꽉 막혀왔다.


나는 고민 끝에 임정혁 부장에게 도움을 청해 보기로 했다. 그는 마침 시큐테크 본사에서 별로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프로젝트를 하고 있어 쉽게 만나 볼 수 있었다. 인근 스타벅스에서 그와 마주한 나는 시큐테크 상황에 대해 설명하고 조직변경에 대한 얘길 꺼냈다.



“조직변경이 원인이라… 나쁘지 않은 가설이에요. 얘기하신 대로 양 팀 사이에 변화라고 할 만한 사건은 그것뿐이니까요. 조직 변화가 어떤 영향을 미쳤다고 보시는 거죠?”


“그걸 모르겠습니다. 인터뷰는 해봤지만 하던 업무가 바뀐 건 없더라고요.”


“흠... 아니에요. 그럴 리 없습니다. 세윤 씨는 회사생활을 오래 해보지 않으셨으니까 잘 모르겠지만 조직을 바꾼다는 건 굉장히 큰 얘기예요. 특히나 대기업에선 더욱 그렇죠. 본인이 누구에게 평가를 받느냐, 내가 평가받는 소위 ‘라인’에 걸려 있는 사람들이 어떤 목적으로 어떤 어젠다를 가지고 움직이느냐가 다 바뀌게 되거든요. 대놓고 얘기를 안 하고 있을 뿐이지 그런 변화가 분명 업무 방식에 영향을 미치고 있을 겁니다.


제일 확실한 건 업무목표를 확인하는 거예요. 업무목표가 어떻게 바뀌었는지 분석해 보면 변화패턴이 보일 겁니다. 고객서비스 팀장과는 얘기해 보셨나요? 업무목표도 중요하지만 고객서비스 팀장이 어떤 비전을 가지고 조직을 운영했는지도 확인해봐야 해요. 사업지원그룹이 고객서비스 팀 내에서 중요한 조직은 아니었겠지만 팀장이라면 분명 조직을 어떻게 운영해야겠다는 철학을 가지고 있었을 겁니다. 그의 생각과 하 팀장이나 김 팀장의 생각을 비교해 보는 것도 도움이 될 거예요.”


고객서비스 팀장! 눈이 번뜩 띄어졌다. 분석의 관점을 확장하기에는 고객서비스 팀장만큼 좋은 카드가 없었다. 객관적 시각에서 조직 내부의 변화를 모두 겪어봤으니 말이다. 그와 인터뷰해 볼 생각을 안 해본 건 아니었지만 프로젝트 초기만 해도 마케팅 팀과 영업 팀에 집중하는 게 더 효율적일 거라고 판단했었다. 아마도 그때는 그게 옳은 판단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하 팀장과 김 팀장의 생각을 파악한 후에는 시선을 넓히고 관점을 바꿀 필요가 있었다. 그 두 사람 생각만으로 결론이 안나는 상황이었다면 더더욱 말이다. 이제 어디로 발을 내디뎌야 할지 방향은 잡혔다. 힘을 더 내야 했다. 본질에 더 다가서야 했고, 그러려면 창으로 방패를 뚫듯 파고들어야 했다.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임정혁 부장은 싱긋 미소를 보여주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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