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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세윤 Oct 02. 2024

11. 이별 문법

2부 샌프란시스코


“저녁은 어떡해?”


“먹어.”


“어디서?”


“알아서 해.”


“뭘 알아서 해?”


“네가 정하라고.”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


“마운틴뷰 다운타운 가려고 했던 거 아니었어?”


“어.”


“그럼 거기 가든가.”


“어.”


“저녁 먹으려면 지금 출발해야 하지 않을까?”


“어.”


“저녁 먹고 다른 데 어디 갈 거야?”


“알아서 해.”


“바로 호텔로 와?”


“어.”


“어, 아니, 그게 전부야? 이제 나랑 말 안 하기로 한 거야?”


“….”


“그래, 마음대로 해. 그렇게 티를 팍팍 내시니 화난 건 알겠는데 그렇다고 애를 굶기면 안 되는 거 아니야? 연서야 가자. 아빠 또 화났나 보다.”




난 아내와 연서를 뒤따라 나갔다. 예전에 살던 아파트에 들르지 않고 바로 마운틴뷰 다운타운으로 가니 30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토요일 저녁이라 그런지 공용 주차장은 벌써 차로 가득했다. 주차장에서 나와 카스트로 거리를 향했다. 모퉁이를 돌자, 미국 만화책에 나올 법한 장난스러운 라틴 서체로 쓰인 ‘카스칼’ 간판이 보였다. 시간은 6시반. 엘프에서 예약해 놓은 시간이었다. 앞서가던 아내가 먼저 식당 쪽으로 고개를 돌렸고 나도 고개를 돌렸다. 테라스 테이블에 삼삼오오 앉아 와인을 곁들여 식사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한 웨이트리스가 지글거리는 철판에 살이 통통하게 올라온 새우를 올리브오일과 버터 소스에 구운 시즐링 슈림프를 들고 우릴 스쳐 갔다. 연서는 냄새가 좋은지 ‘으음’하며 철판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연서야, 여기가 네가 태어나서 처음 외식했던 식당이야’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올라왔다. 어떤 것이든 처음이란 그리도 특별한 건데, 오늘이 아니면 연서에게 언제 그 얘기를 해 줄 수 있을지 알 수 없는데, 본드 칠을 해 놓은 듯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모든 게 상상했던 그대로였다. 시원한 저녁 바람도 활기찬 마운틴뷰 다운타운 거리도 여느 때처럼 만석인 카스칼 식당도 말이다. 실란트로 페스토를 곁들인 포카치오로 입맛을 돋우고, 젤리처럼 탱탱한 대구 살로 만든 세비체와 트러플 기름을 발라 구워 낸 버섯 엠파나다를 타파스로 먹을 생각이었다. 닭요리를 좋아하는 아내를 위해 노랗게 시즌 된 스페니시 라이스와 스파이시 그레이비가 어우러진 바나나 껍질 치킨도 시키고 말이다. 하이라이트는 유모차 베시넷에서 모빌을 보며 놀고 있는 연서를 옆에 두고 연서가 울음을 터트리진 않을까 조마조마해하며 먹었던 씨푸드 파에야여야 했다. 꾸덕꾸덕한 봄바 쌀의 식감과 샤프론, 피퀴요 고추, 스모크 파프리카로 낸 특유의 풍미를 맛보는 순간 연서는 이게 어느 나라 음식이냐며 타고난 호기심을 주체 못 하고 물어볼 게 뻔했다. 난 통통한 랍스터 꼬리 살을 두 조각으로 잘라 아내와 연서에게 한 조각씩 건네며 스페인과 파에야에 대해 얘기해 줄 거다. 아내가 ‘당신은?’이라고 물어보면 난 괜찮다고, 안 당기니까 어서 먹으라고만 말할 거다. 그 모든 풍경이 지금 이 순간 아직 현현하지 못한 현실의 일부로, 어떤 씨앗 같은 형태로 존재하는 듯했다. 카스칼 입구에서 건널목까지의 짧은 도보가 끝없이 늘어난 것 같았고, 그 길을 따라 10년 전 이곳에 왔던 기억과 내가 상상했던 오늘, 그리고 현실 속 오늘이 파도에 휩쓸린 듯 뒤섞였다. 시간과 공간이 왜곡되며 상상과 현실이 중첩됐다. 희망은, 정말 없는 걸까?


나도 모르게 시선이 앞서가는 아내의 손목을 향했다. 저 손목을 잡고 방향만 왼쪽으로 틀면 상상은 현실이 될 수 있었다. 아내가 뒤를 돌아보며 ‘여기 기억나?’라고 한마디만 던지면 난 퉁명스레 ‘그럼, 가든가’라고 말하며 방향을 틀 참이었다. 아직 감정이 덜 풀린 상황이니 목소리에 잔가시는 남아 있겠지만 오늘을 위해 몇 주 전부터 식당을 예약했다는 걸 알면 분명 앙금은 눈 녹듯 사라질 것이다. 한데, 지금 상황에서 아내가 어떻게 뒤를 돌아보겠는가! 아내가 다음 발걸음을 내딛기 전 내가 먼저 손을 뻗어야 했다. 그렇게만 하면 제논의 역설처럼 영원히 닿을 수 없을 것 같은 상상 속 현실을 잡을 수 있었다. 하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젠장. 가위에 눌린 듯 손을 뻗을 수 없었다. 손을 뻗고자 하는 욕망과 원인을 알 수 없는 저항력이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상상과 현실을 꼬고 비틀었다.


순간, 아내의 발걸음은 <중경삼림> 속 한 장면처럼 빠른 배경에 파묻혀 사라져 버렸다. 몽상은 끝났다. 중첩됐던 시공간은 한껏 비틀리다 원심력을 못 이겨 파열됐고 처참한 잔해 속에 현실이란 초라한 풍경만 남겨졌다. 마지막 남은 행복의 가능성은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어둠은 윌리엄 부게로의 <깨진 물병> 속 소녀처럼 심통 맞고 난처한 눈빛으로 물끄러미 나를 주시했다. 그녀는 공작 깃털이 장식된 드레스와 화려한 신발을 신고 무도회에 가는 꿈을 꾸고 있었다. 한데 왕자님을 상상하며 사뿐 날아올라 한 바퀴를 도는 순간 물병은 머리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물은 흙 사이로 스며들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울분이 차올랐고 표출할 출구는 없었다. 누군가 도움의 손길을 주길 기도하듯 간절히 두 손을 모았지만, 입은 지퍼를 채운 듯 굳게 다물려 도와달라는 말을 꺼낼 수 없었다.


완벽하다고 생각했던 여행 계획은 물거품이 됐고, 꿈꾸었던 행복과 웃음은 현실에서 사라져 버렸다. 빈 껍데기 같던 세상을 그나마 받치고 버텨 주던 주춧돌과 기둥이 사라지자 현실 또한 무너져 내렸다. 아니, 미래까지 모두 무너져 버렸다. 맹수가 날카로운 발톱을 치켜세워 후려갈긴 듯 세상이 갈가리 찢겨 버렸다. 역류하는 감정의 소용돌이에 울화가 불기둥처럼 솟구쳤다. 고함을 있는 대로 지르고 찢긴 현실을 엉망으로 꾸겨 휴지통에 처박아 버리고 싶었다. 제기랄, 웃기지도 않는 불치병에 걸렸다더니 축복을 받은 셈이다. 이렇게 쉽게 치유책을 찾다니 말이다. 이따위 삶이라면 웃음이란 사치일 뿐이다. 이제 웃음 따윈, 행복 따윈 필요 없어! 정말 끝이야! 나는 화를 목구멍 깊숙이 삼키고 짓이기며 건널목을 건넜다. 마음을 굳혔다. 강은 건넜고 다리는 폭파됐다.




"우리 식당 어디로 가?”


“아무 데나.”


“아무 데나, 어디?”


“네가 정해.”


“내가 여길 어떻게 알아?”


“나도 몰라.”


“진짜 이럴 거야?”


“뭘?”


“연서 배고파하는 거 안 보여?”


“네가 가고 싶은 데 가라고. 모르겠으면 아무 데나 가고.”


“그러니까 어딜 가냐고?”


“아.무.데.나.”


아내 얼굴은 한껏 붉어졌다. 젠장, 식당 하나 못 정하면서 날 그렇게 몰아붙였던 건가? 몇 달간 고민해서 세웠던 계획을 순식간에 물거품으로 만들어 버리면서 말이다. 그녀는 몸을 부르르 떨며 입술을 앙다물었다. 하지만 아무런 말도 하진 못했다. 나를 이겨야 한다는 투쟁심이나 부부간 완력 싸움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겠다는 승리욕이나 자존심은 아니었다. 일종의 유아기적 고집에 가까웠다. 눈물을 안구 한 가득 담고 있으면서도 무력하기만 한 자신의 상황을 인정하기 싫은 그런 고집 말이다. 평소 이런 상황이라면 좌절한 아내 위로 군림하며 은밀히 승자의 조소를 비칠 수도 있겠지만 그런 관계조차 만들고 싶지 않았다. 분명 내 심경엔 전례 없던 큰 변화가 도래하고 있었다.




“여기 가든가.”


난 간판도 보지 않고 바로 앞에 있던 식당문을 밀어젖히며 들어갔다. 캐주얼 다이닝 분위기의 한식당이었다. 마운틴뷰 다운타운까지 와서 고작 한식당이라니. 밖에 사람이 그렇게 북적이는데 식당 안에는 고작 두 테이블이 차 있을 뿐이었다. 돌솥비빔밥, 메밀면, 우동. 그게 우리가 시킨 전부였다. 음식이 나올 때까지 난 한마디도 하지 않았고 음식이 나온 후에도 고개를 푹 숙인 채 음식만 꾸역꾸역 입에 욱여넣었다. 이런 걸 먹으려 오늘을 기다렸단 말인가? 심장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고추장 범벅이 된 밥과 돌솥 한 가득 고인 눈물이 섞여 걸쭉해진 돼지죽이 됐다. 어쩌면 이게 맞는 건지도 모르겠다. 이제 행복은 없을 거라 다짐했으니까, 헤어질 결심을 했으니까. 내 생애 가장 맛없는 한 끼를 먹으며 난 소리 없이 눈물을 떨궜다.


아내는 밥을 먹는 내내, 그리고 밥을 먹고 주차장까지 되돌아가는 길에도 계속 내 눈치를 살폈다. 연서와 얘기하는 척하면서도 은근히 곁눈질을 한다든가 한 번씩 뒤를 돌아본다든가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괘념치 않았다. 다섯 발짝쯤 떨어져 아내와 연서 뒤만 따랐다. 카스트로 거리에 있는 젤라또 집에 갔을 때나 독립책방을 구경할 때도 다섯 발짝 뒤에서 지켜보기만 했다. 아내는 화를 냈던 게 마음에 걸렸는지, 아니면 이제 기분이 조금 풀어진 건지 걷는 속도를 늦췄다. 나는 정확히 아내가 늦춘 만큼 발걸음을 늦췄다. 아내가 손을 늘어뜨리며 힐끔 뒤를 돌아봤을 때는 주머니에 있던 휴대폰을 손에 쥐고 뒷짐을 지었다. 고개는 돌려 아내 시선을 피했다. 아내는 반복되는 내 행동에 그제야 뭔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는지 제자리에 멈춰 섰다. 아무것도 의식하지 못한 척 냉연히 아내를 지나쳐 가려는데 아내가 내 셔츠 소매를 붙들었다.


“정말 얘기 안 할 거야?”


“무슨 얘기?”


난 팔을 돌려 아내 손을 떼 내며 말했다.


“...아깐 미안해. 피곤해서 그랬어.”


“어, 괜찮아.”


“계속 그럴 거야?”


“뭘?”


“미안하다고 하잖아.”


“알았다고.”


“....”


걸음을 옮기려는데 아내가 다시 소매를 붙들었다.


“여행까지 와서 정말 그럴 거냐고, 미안하다고 하잖아.”


“내 말이. 여행까지 와서....”


“그래, 내가 잘못했어. 그러니까 이제 화 풀어.”


“화 안 났어.”


말을 뱉는데 딸깍하고 스위치가 꺼진 느낌이 들었다. 신기하게도 정말 화가 나지 않았다. 몇 분 전만 해도 터질 듯 솟아오르던 후회와 분노의 불길은 커다란 방화포에 휘덮인 듯 적막 속으로 사라졌다. 화살처럼 들이쏘던 아내의 독기 서린 말들도 산들바람처럼 스치고 지나갈 뿐이었다. 모든 걸 놓아 버린다는 게 이런 느낌일까?


“화났잖아!”


“아니야.”


“이제 나랑은 말 안 하기로 한 거야?”


“지금 말하고 있잖아.”


“내가 무슨 말 하는지 알면서 왜 그래? 꼭 이래야겠냐고.”


“그럼? 이혼이라도 할까?”


무심히 ‘이혼’이란 말을 툭 던졌다. 결혼 생활 10년 중 그 단어가 내 입에서 나온 건 처음이었다. 아내는 충격을 받았는지 멍하니 서 있었다. 총알은 이미 심장을 관통했지만 아직 그 충격과 아픔을 받아들이지 못한 산송장처럼 말이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초연한 척했지만 누구보다 아파하고 있을 아내였다. 그 아픔으로 인해 나도 아팠다. 총알은 아내 가슴을 관통하고 내 심장까지 꿰뚫어 버렸다. 수십 년이란 세월이 무언가 질긴 운명의 끈을 묶어 놓긴 한 것 같다. 그 세월이 뭐라고 이별을 결심한 마당에 이리도 가슴이 아프단 말인가! 애써 태연한 척했지만, 심장에선 피가 철철 흘러내렸다. 


난 심장을 움켜쥐고 마음을 다잡았다. 넘어야 할 바위산이었고 감당해야 할 고통이었다. 이게 앞으로의 내 삶이었다. 이혼한 듯 남남이 되어 버린 삶, 아내가 사라진 삶, 행복이 마멸된 삶, 나 혼자만의 삶. 누군가를 탓할 생각은 없었다. 그냥 그렇게 된 것뿐이었다. 나라는 인간이 내 아내라는 사람을 만나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거다. 그래야만 했는가? 라고 물으면 그래야만 했다고 답할 수밖에 없다. 베토벤의 현악 사중주, 괴로워하다 간신히 굳힌 결심의 악상이 이명처럼 울렸다.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지만 분연히 발걸음을 떼었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운명의 무게가 어깨를 짓눌렀고 헤어질 결심은 돌덩이처럼 단단히 굳어 갔다. 


마운틴뷰 다운타운에서 호텔로 돌아오는 동안 우린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아내는 내 얘길 알아 들은 건지, 아니면 화가 풀릴 때까지 그대로 두기로 한 건지 연서와만 대화를 이어 갔다. 애써 침착한 듯 목소리 깊숙이 불안과 후회를 숨기고 말이다. 난 내 나름대로 뇌심이 깊어 갔다. 분명 헤어질 결심은 했지만 어떻게 실행에 옮길지가 고민이었다. 헤어진다고 정말 이혼한다거나 그런 걸 생각한 건 아니었다. 사는 것만 따로 사는 별거나 졸혼 같은 것도 아니었고, 손가락질을 해 대며 책임을 운운할 생각조차 없었다. 내가 원한 건 순수한 정신적 헤어짐, 플라토닉 이별이었다.


고민되는 부분은 있었다. 내가 이별하는 건 더 이상 상처받기 싫어서인데, 이별하게 되면 아내에게 상처를 주게 되고 그게 내 상처가 되어 돌아온다. 이별하지 않으면 그렇지 않은 매 순간이 나에게 상처가 되고 상처가 쌓이면 나도 본능적으로 아내에게 칼날을 향하게 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그 누구도 상처받지 않으려면 이별하면서도 이별하지 않아야 했다. 도대체 이 모순을 어떻게 풀어야 할까?


그때 문득 강인찬 박사가 한 말이 떠올랐다.


‘얼굴에 가면을 만드세요!’


정말 가면을 만든다면 어떨까? 아니, 단순히 가면으론 부족하다. 얼굴뿐 아니라 몸과 정신까지 만들어야 한다. 일종의 꼭두각시 인형 같은 또 다른 나 자신을 만드는 거다. 그리고 내가 그 인형과 이별하면 되는 거 아닐까? 인형은 아내와 이별하지 않은 채 살아가지만 내가 인형과의 관계를 끊어 버리면 아내와의 관계 또한 끊어지니 말이다. 말장난 같은 생각에 불과했지만, 난 어느새 미간을 좁히며 눈동자를 굴리고 있었다. 아내와 이별할 수 없으니 내가 나 자신과 이별을 하는 거다.


난 우선 또 다른 나 자신을 만드는 게 가당키나 한 생각인지 고민해 봤다. 마인드 업로딩이나 자가복제 기술 같은 공상과학 속 얘기가 아니라 현실성 있는 얘기여야 했다. 내가 또 다른 나 자신을 만든다면 난 유체 이탈을 한 듯 나 자신에게서 한 발짝 벗어나 날 관찰할 수 있을 거다. ‘나’가 빠져 버린 난 좀비나 로봇처럼 자동으로 움직여야 한다. 무언가 소리가 들리면 귀를 기울이고 신경을 자극하면 반사 망치로 무릎을 친 듯 다리를 뻗어야 한다. 슈베르트의 <겨울나그네>가 들리면 눈물을 떨굴 줄 알고 히틀러 수염을 붙이고 몸 개그를 하는 찰리 채플린의 모습을 보며 배꼽을 움켜쥐고 웃기도 해야 한다.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난 이미 일상에서 수면마취 된 좀비 같은 삶을 살고 있었다. 아침이면 일어나 샤워기 물을 틀고, 온수가 데워지는 동안 칫솔에 치약을 짠다. 칫솔질을 하며 몸을 적시고 머리, 얼굴, 몸 순으로 샤워한다. 옷은 회색이나 검은색 계열의 폴로 셔츠, 겨울이면 스웨터나 패딩을 추가하고, 바지는 사계절 내내 청바지다. 어떤 셔츠에 어떤 바지를 입어도 매칭이 되기 때문에 뇌를 쓸 일은 없다. 양말은 모두 같은 색상, 같은 브랜드라 어떻게 신어도 짝이 맞는다. 내가 내 행동을 의식하지 못한다 해도 난 이 모든 행동을 자동인형처럼 수행할 수 있다.


이 정도야 누구나 잠결에도 할 수 있는 간단한 작업이지만 정말 놀라운 건 그런 몽유 상태가 집을 나서서도 계속된다는 점이다. 차에 앉아 습관적으로 시동을 켜고 적당한 압력으로 가속페달과 브레이크를 번갈아 밟으며 전진한다. 사방에 쉴 새 없이 차들이 달려들고 껌벅이는 신호등과 건널목을 건널지 멈칫하는 보행자까지 신경을 써야 하는데 나는 생사를 넘나드는 이 복잡한 임무를 아무 문제 없이 척척 수행해 낸다. 출근해서 엑셀로 수만 행의 수식을 계산할 때도, 파워포인트로 복잡한 도식을 그려낼 때도 문제 될 건 없다. 머릿속 깊숙이 각인된 공식과 도식 템플릿만 꺼내면 업무는 일사천리로 진행된다. 늦은 밤이 되어 지친 몸을 이끌고 퇴근할 때까지도, 일상적인 날이라면, 내 기억에 남는 인상적인 일이라곤 존재하지 않는다. 내 정신이나 의식에 스위치가 있어 온종일 꺼져 있더라도 내 삶이 달라질 건 없었다. 진화의 역작인 뇌는 잘 학습된 인공지능처럼 ‘나’가 없더라도 중추와 척수와 척수신경 간 협업으로 감각을 활성화하고 손과 발을 움직여 웬만한 작업은 능숙히 해낼 것이다. 그렇다! 지극히 정상적인 범위에서 또 다른 나 자신을 만든다는 건 충분히 가능하고 현실성 있는 얘기였다.




물론 그게 끝은 아니었다. 또 다른 나 자신을 만든다 해도 여전히 ‘나’와 어떻게 이별하느냐는 문제가 남았다. 지킬 박사 같은 허구의 인물이나 해리성 장애 같은 극단적 케이스라면 몰라도 어떻게 내가 ‘나’와 이별할 수 있을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한데 문득, 이 문제를 정신적으로, 그리고 언어적으로 풀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내가 1인칭 시점에서 소설을 쓰고 있었다면 이제부터 3인칭 시점에서 나 자신을 서술해 보는 거다. 그러면 한 발짝 떨어져 ‘나’를 경험하는 게 가능하지 않을까?


나는 샌프란시스코 공항에 도착해 지금까지 경험했던 일들을 3인칭 관찰자 시점에서 되돌아봤다. 영혼이 이탈한 듯 내 몸의 행적을 쫓았고 아내와의 다툼을 지켜봤다. 감정을 배제하고 행동과 반응만을 생각했다. 예를 들어 아내가 ‘이게 고생하러 온 거지 무슨 여행이야’라고 소리쳤을 때 화가 나고 속이 끓는 이유는 내가 하나의 주체로서 아내와의 대화를 경험하기 때문이다. 거기서 한 발짝 떨어져 아내의 말을 듣는 ‘나’를 관찰만 한다면 실제 ‘나’까지 감정적 격랑에 시달릴 이유는 없었다. 나는 순차적으로 상황을 정리해 봤다.


1.       “이게 고생하러 온 거지 무슨 여행이야!”


2.       아내의 말이 음파가 되어 고막을 때린다.


3.       고막의 진동 에너지가 신경신호로 변환되고 신경중추를 따라 뇌에 전달된다.


4.       뇌는 학습된 언어를 기반으로 아내의 말을 해석한다. (물론 실제로는 아내의 억양이나 톤, 그리고 말할 때의 표정까지 다양한 신호가 복합적으로 해석될 것이다.)


5.       해석을 기반으로 어떤 반응 할지 뇌에서 의사결정이 일어나고 그에 따라 연관된 뉴런을 활성화한다.


6.       뉴런이 신경신호를 전달해 난 표정을 만들고 말한다.


7.       “관두자.”


이 모든 과정은 ‘나’의 개입 없이 자동으로 실행된다. 7번에서 난 어금니를 사리물며 아내를 향해 표정을 일그러뜨리겠지만 그건 상황에 대한 뇌의 해석과 신경신호에 대한 실행 결과일 뿐이다. 신경신호에 대한 뉴런의 발화는 내가 어떤 반응을 할지 의식하기 전 시작됐고 ‘나’의 의식은 이미 일어난 일을 인식할 뿐이다. 그러니까 화라는 건 내 뇌에서 일어나는 과정이나 그에 따른 신경망과 신체기관의 반응일 뿐 ‘나’나 내 의식과 별개인 것이다.


이게 말장난 같다는 건 안다. 그런 과정과 반응이 ‘내’가 아니라면 난 도대체 누구겠는가! 중요한 건 의도적으로 언어를 통해 이런 인식 작용을 일으킴으로써 그 화를 내 화가 아닌 제삼자의 화로 인식하는 거다. 그러니까 아내가 화를 내거나 짜증을 낸다면 이런 식으로 ‘그’가 아내의 말을 듣게 하면 됐다. 나는 한 발짝 떨어져 아내의 말을 듣는 또다른 ‘나’인 ‘그’에게 동정의 눈빛을 던지겠지만 나 스스로 화를 낼 필요는 없는 것이다. 난, 나에게서 한 발짝 떨어져 울지도 웃지도 않으며 그런 내 모습을 지켜보기만 할 거다. 그렇게 정신을 몸에서 분리하는 거다. 득도한 수도승처럼 말이다.


어떤 행동을 하게 되면 바로 그 행동에 대해 생각하고, 다시금 생각하는 나에 대해 생각하는 거다. 그렇게 생각과 생각의 관찰로 만들어지는 새로운 생각을 통해 무한대로 나를 늘어뜨리면 됐다.


나는 화가 난다. 나는 내가 화가 난다고 생각한다. 나는 화가 난다고 생각하는 나에 대해 생각한다....


이렇게 하다 보면 출근길 고속도로에 늘어진 차들처럼 내게서 멀리 떨어질 수 있지 않을까? 그럼 ‘나’를 나와 분리할 수 있지 않을까?


조금 더 극단적인 방법도 있었다. 내 신체에 이름을 붙여 묘사하는 거다. 예를 들어 심장은 ‘크리스’라고 부르는 거다. 흥분해서 심장이 콩닥거리며 요동치면 크리스가 뛰고 있거나 화가 난 상태가 되는 거다. 신체 기관에 이름을 하나씩 붙여 주고 그들이 어떻게 행동하는지 묘사하다 보면 나는 사라지게 되는 것 아닐까? 모두 관점의 차이일 뿐이었다. 예를 들어 파시스트라면 국가적 신념에 자신을 희생하고 전체가 표상하는 거대한 이상에 자신을 종속시킨다. 내가 하려는 건 반대의 작업이다. 부분의 정체성을 강화해 ‘나’라는 전체를 없애 버리는 거다.


그렇게 분리된 내 몸은 어떻게 될까? 내가 사라지면 내 몸에선 새로운 정신이 돋아날까? 새순이 돋듯 또 다른 정신이 피어오를까? 그런데 돋은 새순이 내 몸을 장악하게 되면 난 어떻게 될까? 난 내 몸을 장악한 그 정신에 흡수되는 걸까? 아니면 몸을 잃은 영혼이 되어 영원히 방황하게 될까?


나는 언어 놀이를 하며 이 모든 일련의 사건들이 한없이 가벼워짐을 느꼈다. 아내와 다툼이, 화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냥 가볍게 스쳐 지나가면 될 인생이었다. 모든 게 의미를 잃고 허무해지면서도 가볍고 경쾌해졌다. 불쾌한 감정은 배수구에 내려가는 수돗물처럼 회오리치며 사라졌다. 다툼은 농담이 됐고 헛웃음만 나왔다. 끝없이 의문이 일면서도 한 가지 생각만은 확고하게 내 머릿속에 자리 잡아 갔다.


나는 나와 이별할 것이다. 이제부터 ‘나’와 ‘내 몸’ 그러니까 ‘그’는 다른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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