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샌프란시스코
딱히 시차 적응을 하려 했던 것도 아닌데 저녁 10시쯤 잠이 들어 아침 6시에 눈이 떠졌다. 아내와 연서까지 동시에 말이다. 둘째 날 일정은 아웃렛과 마운틴뷰 다운타운이었다. 연서 아침을 시리얼로 때운 우리는 여유롭게 나갈 채비를 했다.
“당신, 수건은 쓰면 걸어 놔. 이불도 정리 좀 하고.”
아내는 바닥에 떨어진 수건을 주워 후크에 걸고, 침구를 정리하며 말했다.
“무슨 호텔까지 와서 그런 걸 신경 써. 어차피 치울 텐데. 그리고 수건은 걸어 놓으면 안 바꾸고 그대로 둔단 말이야.”
“나갈 때 내려놓으면 되지. 정신 사나워.”
한마디 할까, 하다 관두기로 했다. 이것도 공황장애의 여파였으니까. 난 한숨과 함께 태블릿을 내려놓고 연서가 어질러 놓은 책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당신은 그냥 쉬어. 내가 정리할게.”
아내가 말했다. 말이야 그렇게 하지만 심기가 불편해지면 언제 활시위를 당길지 모른다. 일병이 모포각을 잡고 있는데 어디 이병이 침상에 앉아만 있겠는가. 같이 치우는 시늉이라도 해야 뒤탈이 없다.
“오늘 어디 가?”
“아웃렛.”
“너무 멀지 않어?”
“괜찮아. 가까운 데로 갈 거야.”
“그래. 안 그래도 연서 학교 다닐 때 입을 옷은 좀 사야 했는데 오늘 보면 되겠다.”
살 게 없다고 하면서도 아내는 은근히 기대하는 눈치였다. 미국 아웃렛은 정말 오랜만에 가는 거니 그럴 만했다. 한국에 비하면 돗데기시장 같은 게 미국 아웃렛이지만 오프삭스같은 매장에서 잘만 고르면 70~80퍼센트 이상 세일하는 명품을 득템하는 일도 흔했다. 어쩌다 눈에 들어온 상품이 아웃렛 가격에 추가할인까지 들어가 있다면 횡재를 한 셈이다.
난 어제처럼 연서와 아내 뒤를 따라 아웃렛 아케이드를 유유히 걸었다. 머릿속엔 빨리 오후가 돼서 예전에 살던 서니베일 아파트와 마운틴뷰 다운타운에 갈 생각뿐이었다. 크록스에서 연서 샌들을 사고 갭 키즈에 들러 떨이로 팔던 셔츠도 몇 개 샀다. 그러다 아이들 가방과 옷가지를 모아 놓은 편집숍 하나를 발견했다. 생각해 보니 연서가 한 달 전쯤 핑크색 유니콘 가방 따위는 이제 유치하다며 제대로 된 가방을 갖고 싶다고 했던 게 기억났다. 아내 역시 그 말을 떠올린 듯 벽 한 면을 가득 메운 가방 콜렉션을 봤다. 애들이 좋아하는 키플링, 이스트팩, 레스포색 가방이 진열되어 있었다. 몇 개는 내 눈에도 들어와 가격표를 힐끗 보니 50~60불 정도 하는 것 같았다. 싼 건 아니지만 이 정도면 괜찮겠다 싶었는데 아내가 구석에 걸려 있던 가방 하나를 빼 왔다.
“연서야, 이거 한번 메봐.”
무지개색으로 날염 프린팅이 된 잰스포츠 가방이었다. 비싸 보인다는 생각이 들려는 찰나 손잡이에 걸린 빨간 태그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클리어런스, 15불’
“이거 괜찮지 않아?”
아내는 가방을 멘 연서를 가리키며 물었다. 연서는 가방을 메고 전신 거울 앞에서 몸을 돌리며 함박웃음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그런 것 같네.”
“15불밖에 안 해. 이 가격이면 진짜 괜찮은 거야.”
“응. 가방도 예쁘고.”
아내는 구석에 걸려 있던 땡처리 아이템을 잡은 게 대단한 일을 해낸 냥 기뻐했다.
“내가 살게.”
“흥! 그러시든가. 찾은 건 나니까 계산은 당신이 하는 게 맞겠네.”
아내는 가방을 나에게 내밀며 말했다. 아내는 가방을 내게 넘기고 연서와 수다를 떨며 매장을 더 둘러봤다. 본인이 찾은 가방이 가장 괜찮은 가방이란 걸 확인이라도 하려는 듯 말이다. 매장에서 나오는데 아내는 왼손으론 연서 손을 잡고 오른손을 내밀어 내 손에 깍지를 꼈다. 그렇게 아웃렛 일정은 마무리됐고 차에 오를 즈음엔 오후 일정에 대한 기대감이 한껏 부풀어 올랐다. 구글맵 내비게이션은 예전 우리 신혼 아파트를 거쳐 마운틴뷰 다운타운에 가도록 설정해 뒀고, 카스칼 예약 시간은 이미 수십 번 확인했다. 아내는 아파트 단지 라벤더 길을 걸으며 어떤 표정을 지을까? 그 길이 유모차를 타고 매일 산책하던 길이라고 얘기하면 연서는 또 어떤 엉뚱한 대답을 내놓을까?
“이게 뭐야?”
아웃렛에서 돌아와 호텔 문을 열자마자 아내의 거친 목소리가 들렸다. 눈에 뜨인 건 아침에 아내가 팡팡하게 당겨 놓긴 했지만 깔끔히 펴지진 않은 후줄근한 침구와 벽에 걸어 놓으면 안 치운다며 내가 바닥에 던져 놓은 수건이었다.
“당신, 방 청소해 달라고 안 했어?”
“방 청소를 아직 안 했네...”
“청소해 달라고 한 거야, 안 한 거야?”
“호텔에서 무슨 방 청소해 달라고 말을 해? 방해금지 팻말 안 걸어 놓으면 그냥 하는 게 정상이지.”
“그래서 지금 이게 청소가 된 거야?”
“....”
“내가 나가면서 얘기했잖아. 청소해 달라고 말해 달라고.”
“....”
“이게 뭐야, 진짜. 나 이제 운동할 건데 수건도 없잖아.”
“그럴 거면 네가 직접 하지 왜 나한테 얘길 해? 내가 청소하지 말라고 한 것도 아니고. 난 당연히 할 줄 알았지. 어제 도착해서 오늘도 온종일 운전하고 나도 피곤한데 어쩌라고.”
“그래, 내 잘못이네. 내가 직접 챙겼어야 됐는데 피곤한 당신한테 부탁을 해 버렸네. 됐어. 당신은 그냥 쉬기나 해. 연서야, 아빠 피곤하단다. 넌 로블록스 하고 있어. 엄만 운동하고 올 테니까.“
”아, 진짜....“
난 내 자신을 팽개치듯 구석 리클라이너에 앉아 아이패드를 꺼냈다. 방을 치워 달라고 말을 안 한 건 사실이지만 난들 설마 방을 안 치울 줄 알고 얘길 안 했을까? 아니, 치워야 할 방을 안 치웠다면 얘길 했더라도 안 치웠을 수도 있지. 이건 엄연히 호텔 측 잘못이고 그럼 화를 내야 할 대상은 내가 아니라 호텔 아닌가? 도대체 이 상황에서 왜 내가 비난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가?
”그래, 거기서 아이패드나 봐. 내가 내려가서 방 치워 달라고 얘기할 테니까.“
아내에겐 운동을 하라고 하고 내가 프론트에 전화를 걸어 방을 치워 달라고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무차별적으로 공격을 당하면 아무것도 하기 싫어진다. 움직이기는커녕 대꾸도 하기 싫었다. 알량한 자존심을 치켜세운다거나 기 싸움을 하는 따위의 문제는 아니었다. 이건 엄연히 나 자신을 보호하려는 생존 본능에 가까웠다. 한두 마디 대꾸하기 시작하면 나로서는 도저히 반박할 수 없는 논리와 이유로 공격을 당하기 때문에 그냥 입과 귀를 닫고 있는 게 상책이었다. 아내는 어차피 운동하러 나가는 길이었으니 아내가 말하는 게 더 합리적이기도 했다. 방이 깨끗하길 원하는 것도 아내고 프런트 데스크 바로 옆에 있는 피트니스 센터에 가는 것도 아내였다. 내가 굳이 전화기를 들 이유는 없었다. 아내의 껄끄러운 시선이 느껴졌지만 난 아이패드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동공엔 흔들림 한 점 없었고 이마에는 깊은 주름이 패었다.
“방 치우러 오면 문이나 열어 줘. 그렇게 멍하게 앉아 있다 놓치지 말고.“
‘쿵’하고 문 닫는 소리가 들렸다.
이해할 수 없었다. 아웃렛에서 기분 좋게 시간을 보냈는데 왜 그걸 단번에 망쳐야 할까? 조금 후면 신혼 때 아파트를 방문하는 서프라이즈 일정도 계획되어 있는데 말이다. 호텔 방도 내가 던져 놓은 수건만 다시 걸어 놓으면 그리 나쁜 상태는 아니었다. 나는 수건을 주섬주섬 화장실 한쪽으로 몰아넣고 탁자에 놓인 연서 책 가지를 치웠다. 연서는 로블록스에 빠져 정신이 없었다. 이렇게 평화롭고 한가한데 도대체 뭐가 문제인가?
한 시간쯤 지났을까, 문득 아내가 올 때가 됐는데 아직 아무 기척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서는 여전히 로블록스에 빠져 있었고 나는 라운지체어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아이패드로 책을 읽고 있었다. 순간 덜컥 문이 열리며 아내가 들어왔다. 운동복은 땀으로 젖어 있었다.
”뭐야? 방 아직도 안 치웠어?“
몰아붙이는 말투가 마치 내가 방을 치워야 했던 것처럼 들렸다. 아내가 프런트에 얘기했는데 제대로 전달이 안 된 모양이다. 한국이야 목소리 좀 높여 얘기하면 바로 반응이 오지만 여긴 미국이다. 얘기했다고 바로 온다면 그게 오히려 신기한 일이다.
”아직.“
”언제 오는지 확인은 해 봤어?“
”아니.“
”내가 내려가면서 얘기할 거라고 말했잖아. 여태까지 안 오면 확인이라도 한번 해 봤어야 하는 거 아니야?“
”기다리면 오겠지.“
”나 샤워해야 하는데 수건도 없어.“
그건 네 사정이지. 청소가 밀려 못 오는 걸 수도 있는데 그걸 가지고 나에게 얘기하면 내가 뭘 어떻게 해 줄 수 있을 까? 난 눈과 귀를 닫았다.
”얘기 꺼낸 내가 병신이지. 그래, 당신은 아이패드나 보고 있어.“
아내는 문을 휙 열어젖히며 나갔다. 끓어오르는 울화가 눅진한 한숨이 되어 짓깨문 입술 사이로 새 나왔다. 젠장. 그냥 아내가 운동할 때 전화라도 한번 해 볼 걸 그랬다. 아니면 내가 내려가든가 말이다.
10분이 채 지나지 않아 아내는 ‘야!’라고 소리치며 돌아왔다. 분기탱천한 외침이 고막을 뚫고 심장까지 파고들었다. 이건 또 무슨 날벼락인가? 아내는 무슨 이유에선지 활화산처럼 끓어오르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최소 몇십 분은 불편한 상태로 있어야 했다. 아내는 들고 온 수건을 침대 위로 내팽개치며 말했다.
”여기 일하는 사람들 다 퇴근했어. 방금 퇴근했다는데 나 운동하는 동안 확인만 한번 해 봤으면 치울 수 있었잖아.“
”왜 나한테 난리야. 아, 그럴 수도 있지 방 하루 안 치웠다고 뭐가 어떻게 돼? 수건 가져왔으니까 된 거 아니야?”
“이 병신아, 여기 내일도 아무도 없대.”
내일이 일요일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호텔에 청소하는 메이드가 없다는 건 말이 안 됐다. 왜 내일 아무도 없단 말인가?
“체크인할 때 프런트에서 얘기했다며. 내일 이 근방 전기 공사해서 전기 안 들어온다고 말이야.”
아차. 잊어버리고 있었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여기 살 때도 전기 보수공사 때문에 전기가 나간 적이 몇 번 있었지만 큰 문제는 없었다. 불편하긴 해도 문제될 만한 건 냉장고뿐이었는데, 실리콘밸리 날씨가 찜통더위가 되는 것도 아니고 한두 시간 정도 전원이 나간다고 음식이 상할 일은 없었다.
“아침 8시부터 오후 5시까지라는데 그걸 듣고도 아무 말도 안 했던 거야?”
8시부터 5시까지 계속 정전이 되는 건 아니었다. 공사 일정을 가늠할 수 없기 때문에 공지는 그렇게 해도 일반적인 보수공사라면 한두 시간 안에 끝나기 마련이었다.
”나가 있으면 되잖아. 정전이 그렇게 오래 걸리는 것도 아니고. 우리도 밖에 돌아다닐 텐데 무슨 상관이야.“
”그걸 당신이 어떻게 알아? 정전되면 여기 문도 안 열린대. 그건 알고 있었어? 왜 이렇게 생각이 없어. 그리고 여기 정전 때문에 다른 호텔로 이동하려면 해 준다며?“
체크인할 때 정전 얘기를 하며 그 얘기도 하긴 했었다. 하지만 호텔을 옮겨야 한다면 그게 더 큰 문제 아닌가? 하룻밤 자고 짐을 다시 싸야 한다면 애초부터 옵션이 되질 않았다. 아마 도착하자마자 호텔을 옮겨야 한다고 말했으면 그게 더 큰 철퇴를 맞을 일이었다.
“당신은 그런 것도 확인 안 한 거야? 미국까지 오는데, 그것도 우리만 오는 것도 아니고 연서까지 같이 오는데? 그래, 정전될 걸 몰랐던 건 어쩔 수 없다고 쳐. 그래도 체크인하면서 얘기했으면 최소한 나하고 어떻게 할지 상의는 했어야 할 거 아니야."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당연히 얘기했겠지. 젠장, 정전이 됐는지도 모르고 넘어갈 일이었는데 왜 이리 몽니를 부리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지금 옮기자고?”
“정전이라는데 그럼 어떡해? 당연히 옮겨야 되는 거 아니야? 내 앞에 있던 남자는 알아서 그런 거 다 물어보고 다른 호텔로 예약해서 가던데 당신은 도대체 뭐 하는 거야?”
머리가 아팠다. 더 저항해 봤자 소용없는 짓이란 걸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난 ‘으이구’를 연신 내뱉으며 로비로 내려갔다. 다행히 근처에 있는 타운플레이스에 옮길 수 있는 방이 있다고 했다. 타운플레이스라면 레지던스 호텔이라 최소한 방은 넓을 것이다. 하지만 타운플레이스도 3성급이었다. 확인도 안 하고 덥석 가기엔 리스크가 너무 컸다. 옮기기 전에 한번 가 보기라도 해야 하나 생각이 들긴 했지만 아내에게 융단폭격을 당하고 난 후라 기운이 나질 않았다.
“그럼 타운플레이스로 바꿔 주세요.”
난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말했다.
“네. 타운플레이스로 예약하고 알려 드리겠습니다.”
“방에 있을 테니까 방으로 전화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방으로 돌아가는 데 정수리가 지끈거리며 쑤셔왔다. 애초부터 별 4개짜리 산타클라라 메리어트로 예약할 걸 그랬나? 하지만 차이라곤 코트야드보다 조금 큰 게 전부인 메이어트 때문에 백만 원을 더 쓴다는 건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우리 형편에 조금 불편하고 거슬리더라도 이 정도는 감내해야 하는 거 아닌가? 비즈니스석을 타고 4성급 호텔을 이용하면 좋겠지만 효율을 고려해야 한다. 뜬금없이 톨스토이의 명언이 내 상황에 대입됐다. 편안한 여행은 모두 같은 이유로 편안하고 불편한 여행은 이유가 제각기 다르다. 편안을 위해선 제각기 다른 불편의 이유를 모두 충족시켜야 한다. 충족시켜야 할 항목이 늘수록 필요한 투자 또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편안한 여행은 비효율적이다.
“호텔 바꿔 달라고 했어. 전화 올 거야.”
난 말을 던지고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원래라면 지금쯤 호텔을 나서 마운틴뷰 다운타운으로 갈 시간이었다. 하지만 서니베일의 옛 아파트 따위는 볼 기분도 아니었다. 순식간에 모든 게 틀어져 버렸다. 꺼내 놓은 짐을 하나씩 캐리어에 넣는데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조금만 참으면 될 것을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할까? 정전이 된다 해도 고작 몇 시간일 테고, 잠깐 나갔다 온다면 우린 정전이 된 줄도 모르고 지나칠 텐데 말이다.
타운플레이스는 코트야드에서 차로 5분 정도 거리밖에 되지 않았다. 베이 에어리어를 관통하는 엘 카미노 거리를 따라 두 블록쯤 지났을 때 문득 불안이 엄습했다. 조금 전 호텔 직원이 지도를 보여 줄 때 자세히 볼 걸 그랬다. 이 지역은 아내가 한국에 돌아가고 내가 혼자 미국에 있을 때 살던 하숙집이 있는 곳이다. 혼자 살며 매달 2천 불씩 나가는 아파트 월세가 아까워 찾아봤던 게 하숙집이었다. 내가 하숙하던 동네는 서니베일 북부에 있는 낙후된 동네라 월세 700불로 방 하나를 빌릴 수 있었다. 순간 떠오른 궁벽진 하숙집 모습과 함께 아른거리던 불안이 현실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좌회전하려는데 허름한 세이프웨이 마트와 그토록 맛없기만 했던 중국집이 보였다. 타운플레이스는 세이프웨이 맞은편 골목 어귀에 있었다. 예상대로 음울한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3층 건물이었다. 간판은 색이 바랬고 주차장 아스팔트 사이론 잡초가 무성히 튀어나왔다. 호텔 내부는 밖에서 보는 것보다 더 처참했다. 푹 꺼진 침대 하나가 중앙에 놓여 있었고, 구석에 소파 베드가 있었다. 한숨밖에 나오지 않았다. 코트야드를 버리고 이곳으로 왔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젠장. 짐을 푸는데 울컥 짜증이 올라와 그대로 소파 위로 드러누웠다.
“침대에서 셋이 잘 수 있어.”
“됐어.”
“당신 허리도 안 좋잖아. 그러다가 허리라도 나가면 내가 짐까지 다 들어야 하는데 난 자신 없어.”
“아, 됐다고! 내가 소파에서 잔다고!”
아내는 내 고함에 놀랐는지 한동안 몸이 굳어진 채로 서 있었다. 난 아내와 눈을 마주치기 싫어 소파에 누워 아이패드를 꺼냈다. 한동안 정적이 흘렀고 아내는 다시 짐을 풀기 시작했다.
속이 부글부글 끓는다는 표현이 있는데 내가 딱 그 상황이었다. 도대체 이런 걸 삶이라고 할 수 있는 건지, 어린 시절 생각했던 행복이나 가정의 포근함 따위는 어디로 가 버린 건지.
“꺅!”
정적을 깬 건 연서 목소리였다. 침대에 앉아 TV를 보던 연서는 무언가에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벌떡 침대 옆에 섰다. 얼굴에 반쯤 장난스러운 웃음이 섞여 있어 큰일은 아닌가 보네 하며 연서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움직였다. 하얀 침대 시트 위로 검은 점 같은 게 보였다.
“왜 그래, 연서야?”
세면도구를 정리하던 아내가 뛰쳐나왔다.
“꺅.”
아내도 소리를 지르고는 연서 옆에 섰다.
검은 점의 정체는 거미였다. 엄지손톱만 한 거미가 하얀 침대 시트 위를 여유작작하게 활보하고 있었다.
“어떻게 좀 해 봐!”
한동안 멍하니 거미를 보고만 있던 나는 아내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휴지를 집어 들고 두 손가락 사이에 집었다. 거미는 다가올 운명은 상상도 못 한 채 침대 한가운데 멈춰 섰다. 난 손을 뻗어 그대로 거미를 집었다. 손가락에 힘을 주자 뿌직하며 터지는 느낌이 났다. 난 휴지째 거미를 쓰레기통에 버렸다.
“아빠, 죽였어? 거미 죽인 거야?”
연서는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나에게 매달리며 물었다.
“어, 걱정하지 마 연서야. TV봐 이제.”
난 연서를 안아 다시 침대 위에 올렸다.
“뭐 하는 거야? 기다려!”
아내는 빽 소리를 지르고는 소독 티슈를 빼 침대를 닦기 시작했다. 거미 한 마리 가지고 이 무슨 호들갑이란 말인가!
“도대체 생각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거기 그대로 연서보고 앉으라고 하면 어떡해? 거미가 어디 있었는지 알고? 이제 잠은 어떻게 잘 거야, 이 더러운 데서.”
호텔을 옮기자고 한 건 분명 아내였다. 이 근방에서 비슷한 가격대에 서니베일 코트야드보다 나은 호텔은 없었다. 그 호텔을 두고 오니 이 사달이 난 거지 다른 이유가 뭐가 있겠는가. 순간 아내는 무너지듯 털썩 쓰러지며 소리를 질렀다.
“아니, 도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처음부터 제대로 계획했으면 이런 일 없었을 거 아니야. 이럴 거면 그냥 한국에 있지 미국까지 왜 온 거냐고? 이게 고생하러 온 거지 무슨 여행이야!”
“아, 쫌.”
“뭐?”
“아, 그만 좀 해. 진짜, 이씨.”
난 입을 앙다물고 어금니를 짓이기며 소파에 누웠다. 아내는 멈추지 않고 지분댔다.
“이게 도대체 뭐냐고?”
“관두자. 앞으론 나한테 아무것도 묻지 마. 내가 뭘 하려고 하면 항상 이 모양이니까 그냥 네가 해. 뭘 해도 네가 직접 하고, 나한테 뭘 해 달라거나 내가 한 것 때문에 나한테 불평하지도 마. 그냥 다 네가 원하는 대로 해!”
난 그 말을 끝으로 마침표를 찍듯 입을 다물어 버렸다. 하지만 진짜 닫아 버린 건 마음이었다. 이제 정말 끝이었다. 끝이라고 생각했던 적은 수없이 있었지만 결론을 내리는 게 오늘이 되리라곤 상상도 못 했다. 존 그레이가 옳았다. 그녀는 금성인, 나는 화성인이었다. 우린 서로를 이해할 수 없는 다른 인종일 따름이었고, 서로 교류하지 않는 게 갈등을 피할 유일한 해결책이었다. 내가 그녀를 이해할 수 없는 건 사자가 말을 할 수 있어도 사자를 이해할 수 없는 것과 같았다. 고작 정전 때문에, 거미 한 마리 때문에 완벽했던 여행 계획은 만사휴의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