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그누푸르, 빛으로 그린 풍경

by 성세윤

난파 비행기에서 다시 한 시간을 걸어 주차장에 도착한 후 피아드라 글라우프 협곡을 향했다. 현무암 절벽 사이로 아침햇살이 스며드는 풍경을 상상했다. 푸른 그림자가 드리워진 가파른 절벽 사이를 뚫고 쏟아지는 에메랄드빛 물줄기 위로 부드럽게 햇살이 내려앉는다면 어떨까. 굽이치는 협곡 사이와 아찔하게 뻗은 암벽 위에서 마주할 풍경은 또 어떨까. 머릿속에선 이미 어제 봐두었던 스팟들에서 어떤 구도가 나올지 그려지고 있었다.


하지만 인생은 언제나 우연의 연속이다. 뜻한 대로만 흘러가는 일은 없고, 올라가면 언젠가 떨어지게 마련이다. 글라우프 협곡 주차장에 도착해 차문을 여는 순간 직감했다. 아, 쉽지 않겠구나.


차문을 열고 몸을 내미는 순간 갑작스레 불어온 돌풍에 몸이 휘청였고, 차문은 날아갈 듯 쾅 하고 닫혀버렸다. 가방을 꺼낼 땐 온몸으로 문을 붙들고 손에 힘을 실어야 했다. 그제야 바람이 떠올랐다. 어제 확인했던 풍속은 초속 11미터, 지금은 15미터였다. 이쯤 되면 강풍주의보가 내려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언덕을 오를수록 바람은 더 거세졌다. 이미 스팟 두 군데를 지나쳤지만 삼각대는 펼 생각조차 못 했다. 오늘 같은 날 암벽 위에 삼각대를 세운다면 입을 벌리고 포악하게 몸을 끌어당기는 협곡에 스스로를 제물로 바치는 셈이었다. 촬영은커녕 여행을, 아니 인생을 접어야 할지도 모를 상황. 아쉬움을 삼키며 전망대까지는 가봤지만 거기서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결국 전망대 난간에 몸을 기대 겨우 한 컷을 담아냈다. 협곡과 하늘의 경계가 붉게 물들기 시작하는 걸 보니 여명이 다가오고 있었다.



협곡의 물줄기는 거센 바람 속에서도 묵묵히 흘렀다. 초록빛 이끼는 수직으로 깎인 바위에 몸을 바싹 붙이고 꿋꿋이 바람을 견디고 있었다.


다시 고민이 시작됐다. 일출을 여기서 기다릴 것인가, 아니면 다른 곳으로 향할 것인가. 쉴 새 없이 몰아치는 바람 속에서 장소를 옮기거나 구도를 바꾸는 건 불가능했다. 전망대 난간에 기댄 같은 구도로 계속 찍는 게 최선이었지만, 한 컷을 위해 아침 시간을 전부 바칠 순 없었다. 남은 시간을 따져보니 선택지는 두 가지였다. 서쪽으로 이동해 레이니스피아라 해변에 가거나, 동쪽으로 이동해 스카프타펠을 향하는 것. 결국 강풍에 등을 떠밀리듯, 주차장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고민 끝에 목적지는 스카프타펠로 정했다. 전망대에 다시 올라가기엔 시간이 부족했지만, 빙하 위로 빛이 들어오는 풍경을 담아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 때문이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마음이 급해졌다. 조금이라도 빨리 도착해야 해가 뜨기 전 빙하 주변을 충분히 살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링로드에 올라섰을 때 여명이 막 시작되고 있었다. 검푸른 하늘과 붉게 물드는 지평선, 멀리 실루엣으로 드러나는 풍경을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벌판에 덩그러니 놓인 집 한 채. 길게 늘어선 전신주. 무엇 하나 놓칠 수 없는 풍경이었다. 좌뇌에선 스카프타펠까지 서둘러 가야 한다며 가속 페달을 밟으라고 신호를 보내왔지만, 우뇌와 시신경을 자극하는 풍경 탓에 발은 반사적으로 브레이크를 밟았다. 그렇게 멈춰 서기를 반복하며 링로드를 따라 조금씩 동쪽으로 전진했다.





이제 정말 스카프타펠까지 직진하자 마음먹은 순간, 비탈에 비스듬히 세워진 차들과 듬성듬성 모여 있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하나같이 두툼한 아웃도어 복장에 카메라와 삼각대를 들고 있었다. 시선을 따라가니 어제 지나며 눈길을 끌었던 바위산, 로마그누푸르가 보였다.


전망은 탁 트여 있었고 구름은 옅게 흩어져 해를 가릴 정도는 아니었다. 다만 해가 뜨는 방향은 로마그누푸르의 반대편이었다. 일출이 바위산 뒤에서 솟아오르진 않겠지만 아침 햇살이 정면에서 바위산을 밝히는 모습을 담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태양을 배경 삼아 피사체와 함께 담는 걸 좋아하는 나로서는 다소 아쉬운 구도였다. 그러나 스카프타펠로 향하기엔 시간도 부족했고 그곳의 조망을 알 수 없어 불안하기도 했다. 결국 로마그누푸르에서 일출을 담기로 결정했다.


벌판 한가운데 우뚝 선 바위산은 실로 웅장했다. 바람 한 점 없는 호수는 거울처럼 조용히 바위산을 반영하고 있었다. 현실과 반영이 데칼코마니처럼 맞물려 있었다.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건 현실인가, 아니면 꿈속으로 들어온 걸까?



여행이란 경계를 넘는 것이다. 지속되던 일상에서 일탈하고, 늘 보아온 익숙한 것들과의 이별하며 생경함을 마주한다. 그 생경함이 일종의 경종이 되어 평소 내가 의식하지 못했던 많은 걸 되돌아보게 해 준다. 이를테면 '나 자신' 같은 것 말이다.


지평선 위로 붉은 기운이 올라오며 해돋이의 시간이 시작됐다. 나는 분주히 움직이며 뷰파인더로 구도를 잡았다. 어떻게 하면 이 바위산의 장엄함을 제대로 담아낼 수 있을까. 어제만 해도 의식하지 못했던 길가의 바위산이 이제는 하나의 의미로 다가왔고, 그 의미는 곧 '나'의 일부가 되었다.


순간, 바위산 정상에 햇빛이 닿으며 강렬하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회색빛이던 바위산이 달궈진 쇳덩이처럼 변해갔다.



햇살은 바위산 꼭대기에서부터 지면을 향해 천천히 내려앉았다. 닿는 곳마다 신의 은총처럼 강렬한 주홍빛으로 채색되었고, 진회색의 바위산은 끓어오르는 활화산처럼 변모했다. 빛이란, 실로 얼마나 위대한가.



목이 죄어오는 듯 숨이 차올랐고, 심장이 피를 뿜듯 전율이 치솟았다. 나는 시선을 떼지 못한 채 눈앞의 장관을 바라보았다. 이 풍경의 주인공은 빛일까, 산일까?


일 년 365일 중, 일출을 방해하지 않을 정도로 구름이 적당한 날.

하루 24시간, 1,440분 중 태양이 가장 강렬한 빛을 내뿜는 단 10분.

백만 년 전 분출한 용암과 바닷물이 섞인 팔라고나이트 화산광물. 그 광물이 억겁의 시간 동안 바람과 파도와 지진에 깎여 형성된 피사체.

그리고 지금, 그 피사체 앞에 선 나.


이 ‘지금’이라는 찰나와 바위산이 솟은 이 ‘공간’ 속에서, 우주의 티끌 같은 ‘나’라는 존재가 마주하고 있었다.

어쩌면 풍경의 주인공은, 풍경을 마주한 나 자신일지도 모른다. 내 두 발로 이 시공간을 걸어와, 내 두 눈에 이런 풍경을 담아낸다는 것. 살아 있다는 건 얼마나 큰 축복인가. 얼마나 벅찬 기적인가.




행복을 한 아름 먹은 듯한 포만감에 나도 모르게 미소가 번졌고, 너른 시선으로 풍경을 감쌌다. 해가 완전히 떠오른 뒤에도 감동의 여운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나는 한참 동안 로마그누푸르 주변을 맴돌며 황금빛 풍경을 바라보았다.





이동경로

피아드라 글라우프: Fjaðrárgljúfur parking

로마그누푸르: Lómagnúpur Scenic Spot


로마그누푸르 뷰포인트

그림2111.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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