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년 산 연필깎이

아직 멀쩡해

by 햇빛누리

연필

이소연


머리가 벗어지고

뇌가 갈라지고

입이 사라진다.


하지만 사랑하리라

기필코 사랑하리라


오래전

편지의 쓰고 지운 자국을 읽으려 애쓴 적이 있다.


뾰족해지고 싶다는 건

다시 살아보고 싶다는 것.


이소연 님의 연필이라는 시의 한 부분 처음 부분 생략...



2호가 어느덧 8살이 되었다. 초등학교 1학년이 된다. 언니와 4살 차이.. 바로뒤에 남동생이 태어나 혼자만의 사랑은 오래가지 못했다. 둘째는 돌 되기 전에 받은 사랑을 막내 동생에게 전해주고 말았다. 조금만 늦게 태어났더라면 더 사랑을 받았을 텐데 애틋하고 미안하다. 그래도 동생과 언니랑 잘 지내는 2호가 대견하다. 공부방에 다니는 아이는 필통 안에 연필이 하나도 안 깎여 있었다 연필 좀 깎아 달라고 엄마한테 얘길 할 텐데 말이다. 의젓해 보이려고 했던 것인지.. 모르겠다. 부랴부랴 연필을 연필 깎기 안에 연필을 집어놓고 돌렸다. 뾰족한 심과 나무가 깎여 나온다. 나무의 향은 조금 덤이고.. 너무 많이 깎으면 심이 부러지고 나뭇결에 따라 조심해야 한다.




한글을 배우고 익히고 있는 아이를 보며 종이에 연필을 쓸 때 서걱거리는 느낌이 좋다. 처음 한글 공부하던 나의 모습과 둘째가 한글 공부하는 모습을 오버랩해 보며 과거를 해상 해본다. 한글이란 게 어느 순간 잘하게 되어 있지만 어느 시점부터 글을 읽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개미와 베짱이를 처음 읽어본 것 같기도 하다. 한글을 알아간다는 건 세상 보는 눈이 자꾸 커진다는 것을 의미하게 될 것이다.



요즘은 연필 쓰는 사람이 많이 없을까? 인터넷 카페에서 한정판 굿즈를 찾고 있고 자기가 원하는 연필을 찾아다니는 사람도 있다. 글을 연필로 쓰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아날로그 감성을 원하는 사람도 많아진 것도 사실이다. 볼펜도 사은품으로 많이 흔해졌다. 종이 위에서 빙판 위에서 맘대로 웨이브를 추고 있는 기분이고 연필은 눈 쌓인 얼음 위를 종종 걸으면 미끄러지지도 않고 억지로 떠밀리듯 종이 위로 글자를 만들어 내는 사각 거리는 느낌이 좋다.



자고로 연필은 칼로 깎아야 제맛이다. 연필깎이가 없을 땐 문구용 칼로 뭉뚝하게 깎아내기도 했다. 나무의 결을 살려 하나하나 껍질을 벗기면 기계로 깎은 것보다 심이 부러지지 않고 오래가기도 했다. 몇 년 뒤 연필깎이가 우리 집에 들어왔다. 스피드하고 빠르게 연필심이 깎이면 연필을 자꾸 넣어 돌리고 싶었다. 계속 돌리면 연필은 짧아졌지만 볼펜대를 넣어 키를 키워 썼다. 필통에 나란히 눕히면 누가 키 큰가 자랑하듯이 연필은 누웠다. 어린 시절 국민학교 생활을 함께한 기계가 우리 집에 존재하고 있다. 큰아이가 초등학교 들어갈 때 친정에서 주셨다. 우연히 연필깍지 통 안을 비우려다 보니 뒤에 94년이라는 생일이 적혀있었다. 무려 29년 먹은 골동품... 온고지신이라지만 한 번도 탈이 난적 없이 이어져온 것 같다. 그 당시엔 보거스가 유행이었는지 보거스 캐릭터가 들어가 있다. 위스키나 와인을 생각하면 아주 숙성이 잘된 고가의 술일 것이다. 아직까지 잘 돌아가는 것 보면 고장이 크게 나지 않는 것 같다.

94년생 연필통
휴대폰 사진 29년 된 연필깎이


오래된 물건일수록 정은 더 생기는 듯하다. 간직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쓸 수 있는 물건이 있지만 오래되면 버리게 되는 게 요즘 세상이다. 미니멀 라이프를 지향하지만 얼마나 갖고 얼마나 버려야 할지 모르겠다 이건 추억인데 이래서 저래서 안 돼 쓰레기통에까지 갔다가 다시 돌아오길 다반사.. 정말 나 두고도 안 쓰면 며칠 뒤에 폭풍정리하게 된다.


소중한 것일수록 아이들에게 남겨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는지 찾아보아야 한다. 진정한 가치의 물건은 어떤 것일까 연필 깎기처럼 도구가 되어야 하는지 쓸모 있는 것이 되어야 하는지 말이다. 연필깎이의 수명은 언제 일지 모르지만 아이들이 연필에서 샤프로 샤프에서 볼펜으로 가는 순간 연필 깎기의 존재는 잊어버리게 될 것이다. 사람이나 물건이나 세월 가면 버리고 잊히게 되니깐 말이다. 한 번도 고쳐 쓰지 않았는데 이렇게 잘되는 거 보니 신통방통하다. 글쓰기가 오래될수록 연필깎이는 쭈욱 생명을 유지하길 바란다. 사각사각 거리는 느낌과 함께.. 앞으로 오래오래 부탁해 아이들의 추억과 처음 글을 배우던 추억으로 살아내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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