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473
매일 밤 10시가 되면, 침상에 누워 몸을 반듯하게 한다. 발끝은 벽에 닿을락 말락, 두 손은 가슴 위에 얹혀주고 눈은 천장을 향하게 한 채 슬며시 몸의 힘을 풀어준다. 두 눈이 바깥의 빛을 더 이상 받아주지 않겠다 다짐한 순간, 안쪽에는 검은 배경에 알록달록한 빛을 띠는 알갱이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바깥을 외면하니 안쪽의 셀 수도 없이 많은 빛 알갱이가 더 촘촘히 자리를 잡아가며 모여든다. 항상 나는 그중에서도 오른쪽에 있는 알갱이들의 빛에 내 모든 신경을 집중시키는 편이다. 하지만 그전까지 무척이나 오랜 시간이 걸리곤 한다. 워낙에 잠귀가 밝은, 그리고 이상한 잡생각이 너무나 많은 나로선 매번 쉽사리 잠들지 못할 때가 대부분이다. 머릿속에 아무런 생각이 없도록, 모든 내 정신의 힘과 긴장을 쫙 풀어주고 저 빛 알갱이들에 모든 집중을 쏟아부어야만 겨우 꿈을 꿀 수 있는 것이다.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수십 개의 꿈을 꾸며 중간중간 여러 번 잠에서 깨버리곤 한다. 여태까지 자기 전에 아무런 생각을 해보지 않고 스르륵 잠들어본 적이 거의 없으며, 꿈을 꿔보지 않은 적은 더더욱 없다. 불안과 걱정이 많은 탓일까. 섣부른 욕심이 넘치는 탓일까.
잠들기 전 나는 항상 몇 년, 몇십 년 뒤의 내 모습을 상상한다. 후에 난 어떤 모습의 나를 원하는지 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야 내가 행복에 겨울 수 있는지 끊임없이 의문을 품는다. 하고 싶지 않아도 매일 그런 생각이 내 머릿속을 맴돌고 있다. 어찌어찌 잠들더라도 계속해서 의문을 품고 있는 탓에 이어서 꿈에까지 물음표가 붙고 있는 모양이다. 내가 무언가를 오늘 남기고 잠들어야 한다는 생각, 그리고 무언가를 챙기고 깨어나야 한다는 생각이 나를 가만히 놔두지 않는다. 계속해서 반복되는 하루임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조금씩은 달라지는 내가 되고 싶어 하는 것 같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돌아와 옅어져 버린 잉크로 다급하게 써 내려간 문장들은 오늘 하루가 얼마나 의미가 있었는지, 얼마나 전율이 흐르는 하루였는지를 내게 귀띔해 준다. 그리고 오늘 하루가 내게 어떤 깨달음을 주었는지, 오늘을 계기로 또 어떤 생각의 변화가 있었는지를 마지막 문장쯤에서 나는 눈치채곤 한다.
하루도 빠짐없이 종잇장에 내 하루하루를 담으며 오늘의 나를 털어내고 잠자리에 든 지 벌써 일흔 밤이 넘었다. 그럼에도 하루의 모든 짐을 노트 속에 맡겨두기엔 역부족이다. 최대한 꾹꾹 눌러 담은 하루를 살려고 애썼지만, 결국 줄줄 새 버리는 과한 나날들이 되고야 말았다.
그래서 나는 당장 내일 있을 나의 하루를 기대하고 계획하기보다는 마냥 기다릴 필요가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욕심은 끝도 없지만, 세상을 멍하니 바라보기만 할 때도 있어야지 않을까. 넘쳐흐르는 욕심을 버리고 반대편으로 걸어간다면 그곳엔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이 가득하지 않을까. 오늘 밤은 굳게 닫힌 창고 같은 내 두 눈 속에 아무런 짐이 없기를. 오늘 맡겨둘 짐도, 내일 챙겨가야 할 짐도 없는, 단지 먼지만 풀풀 날리는 텅텅 빈 창고가 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