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백의 끝에서 10/ 옳고 그름. 또는 바른 일과 사악한 일.

by 하노

쓸데없이 나의 빈 껍데기는 건강했다.

추락할 명예도, 큰돈도 없다.

많은 것을 잃지는 않았다.


이런 나를 망가뜨린 것은 독이었다.

한 방울의 작은 독이 나를 끝없이 괴롭혔다.

소량의 독에 자아를 잠식당하는 것은 나에게

얼굴이 보이지 않는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기분과 같다.


꽉쥔 주먹엔 힘이 풀렸고

뛰고 싶었지만 지금의 자리가 편했다.

소리를 지를 용기가 없어, 만만했던 나를 혐오했다.

거울을 멀리하게 되었고

오늘의 날씨는 나에게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독이 서서히 퍼지자 숨을 쉬기 힘들었다.

약이 없었기에

위로가 될만한 일들을 미친놈처럼 뒤졌고

살기 위해 나의 감정을 토막 냈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말과 행동이

내 삶의 일부가 되었고

진짜와 가짜를 구별하지 못해

많은 유혹에 익숙해졌다.


나의 불안을 감추기 위해

주위에 나의 결핍들을 요구했고

결국 내 옆에 누가 있는지도 알지 못했다.


혼자를 택했고

감당할 수 없었지만 그들은 나를 기다리지 않았다.

새로운 것을 얻기보단, 매일

잃어가는 것을 붙잡는 수밖에 없었다.


바쁘게 살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독에 찌든 나를 볼 수 있다.

나의 모습은 점점 잊혀 가고

어딘지도 모를 끝을 향해 걸음 한다.


특별히 억울한 것은 없다.

힘들었던 시간들은

나의 마음 깊은 곳에서 진동을 일으켰고

그것은 다시 세상을 살아가는

힘이 되어주었다.


살아간다는 것은 어쩌면

내성이 생기는 과정이 아닌가 싶다.

하루하루가 중독된 모든 세상에서

독이란 흔한 것이니까


이것으로 길었던 지난 몇 년 간의

나의 공황 기록에

마지막 마침표를 찍고

새로운 일기장을 사려한다.

끝으로

끊임없는 위로와 찬사를 보낸다.
그대의 지독했던
방황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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