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세계 속 하나의 삶
운전하며 틀어놓은 라디오에서 싸이의 ‘어땠을까’가 흘러나온다. 수도 없이 들었던 노래인데, 마치 이어웜(Earworm)*처럼 귀에 오래 남는다. 멜로디 몇 소절이 머릿속에서 계속 반복되며, 지나온 순간들과 자연스레 겹쳐진다. 어땠을까. 그때 다른 선택을 했다면. 그 순간 다른 길을 택했다면. 나는 지금과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을까.
우리는 흔히 반복되는 선택이 삶의 방향을 만든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돌아보면, 사실 선택보다 더 많은 것들이 이미 정해진 흐름 속에서 이루어진 것 같다. 만남도, 이별도, 직업도, 가족도 어느 날 갑자기 내가 결심하고 선택해서 얻은 것이 아니라, 시간과 환경, 성향과 우연이 겹쳐 자연스럽게 지금 여기에 와 있다. 장자는 삶을 ‘이미 그렇게 되어 있는 것’이라 보았다. 우리가 애써 만들어낸 길이 아니라, 이미 흘러가고 있던 물길 위에 잠시 올라탄 것에 가깝다고. 그렇게 생각해보면, 내가 스스로 했다고 믿어온 많은 선택들 역시 그때의 나로서는 피할 수 없었던 방향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현대 물리학, 양자역학의 ‘다세계 해석’에 따르면 우주는 하나만 존재하지 않을 수 있고, 어떤 선택의 순간마다 세계는 갈라져 각각의 가능성이 서로 다른 우주에서 동시에 실현된다고 한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 순간 다른 선택을 한 나는 어딘가의 다른 세계에서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결혼하지 않은 나, 다른 직업을 가진 나, 아이를 낳지 않은 나, 부모님과 조금 더 오래 함께한 나. 그 삶은 과연 지금의 나보다 더 나았을까. 아니면 모양만 달랐을 뿐, 비슷한 무게의 기쁨과 근심을 안고 또 다른 불안을 살아내고 있지는 않을까.
동양철학에서는 삶을 나눌 수 없는 하나의 흐름으로 본다. 이 생의 조건, 이 만남, 이 몸, 이 시간은 이미 수없이 겹쳐진 인연과 조건의 결과이며, 그 어느 하나만 달라져도 지금의 나는 성립하지 않는다. 설령 다른 세계에서 다른 내가 살고 있다 하더라도, 그 삶 역시 그 세계의 조건과 흐름이 만든 또 하나의 자연스러운 귀결일 것이다. 불교에서는 지나간 삶을 붙잡는 마음을 집착이라 하고, 오지 않은 삶을 탐하는 마음을 망상이라 부른다. 우리가 반복해서 묻는 ‘어땠을까’라는 질문도, 이미 흘러간 인연과 아직 오지 않은 가능성 사이에서 마음이 머물 곳을 찾지 못한 흔적일 것이다.
타인의 말 한마디에 상처받고, 나의 무심한 말이 누군가를 다치게 하는 날. 이 세계의 나는 이 관계와 이 감정 속에서 하루를 살아내고 있다. 노래 한 곡이 흐르는 짧은 시간 동안, 무의식적으로 반복되는 ‘어땠을까’를 떠올리다가 문득 깨닫는다. 설령 수많은 세계가 동시에 존재한다 해도, 그 많은 세계 속에서 내가 끝내 살아낼 수 있는 삶은 언제나 '존재하고 있는 세계의 삶' 하나뿐이라는 사실을. 선택하지 않은 삶은 어딘가에서 실현되고 있을지 모르지만, 그 삶을 느끼고 견디고 관계를 맺고 책임지는 일은 오직 그 자리의 나에게만 주어져 있다. “억지로 바꾸려 할수록 어그러지고, 흐름에 맡길수록 길이 열린다”는 도가의 말처럼, 이미 흘러와 여기까지 도착한 이 삶 역시 수많은 가능성 가운데 지금 이 세계가 도달한 하나의 결과일 것이다. 삶은 되돌릴 수 없고, 선택은 바꿀 수 없으며, 관계는 피할 수 없다. 그 조건 안에서 우리는 어떻게 낭만을 놓지 않고 살아갈 것인가.
*이어웜(Earworm): 기억하기 쉽거나 기억에 남는 음악 또는 더 이상 연주되거나 이야기되지 않는 후에도 계속해서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음악 (출처: 위키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