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의 강은 기억으로 흐른다.(3)

외가에서 보낸 추억

by 박상준

몇 살 터울의 외사촌 동생이 외할머니의 귀여움을 독차지했다. 자신의 직계 혈통이자 장남이 나은 늦둥이라 더욱더 애틋했을 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큰외삼촌이 외항선원이라는 직업 특성상 항상 아이 곁을 지켜주지 못하는 안타까운 상황이라 할머니의 마음은 어린 친손자에게 더욱 정성을 쏟을 수밖에 없었다.


큰외삼촌이 외항선 선원이 된 이유나 과정은 아직도 잘 모른다. 내가 외갓집에 들어갔을 때부터 그랬고 내가 한참 성장하고 나이가 든 시점까지 외항선의 갑판장으로 활동하다 은퇴하였다.


장시간 배를 타고 외국을 나가 있어 미안한 마음이 들어 그랬는지 몰라도 외삼촌은 귀국할 때면, 아들을 위해 가방 한가득 당시 국내에서는 보기 어려운 진귀한 장난감을 가득 채워 들고 왔다. 부러웠지만 가질 수 없는, 눈으로 지켜봐도 굉장한 물건임이 틀림없었다. 굉장히 부러웠지만 표현하기 어려운 묘한 감정이 교차했다.


그나마 그런 부러움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지금 내가 생각해도 장난감에 큰 관심이 없었던 나의 성격(아니면 포기한 마음일 수도)이 한몫했을 것으로 생각하지만, 또 다른 변명으로 속마음을 포장한 것일 수도 있다.


계절의 변화에 따라 낙동강 덕두리의 강둑에도 변화가 생긴다. 봄비가 내리는 봄에는 갈댓잎이 짙은 녹색을 띠기 시작하고 강 주변에는 작은 벌레들이 넘쳤고 이를 먹이로 삼은 많은 종류의 새 떼가 등장했다. 물 위에는 이름을 알 수 없는 새가 이리저리 자맥질하면서 열심히 먹이를 찾아 나섰다. 하구로부터 제법 떨어진 곳이라 그런지 덕두리 강 주변에서 그물을 설치하는 어부의 모습을 흔히 보기는 어려웠다. 민들레며 작은 풀들이 자신의 색을 뽐내며 땅에서 솟아올라 봄의 강둑은 하루가 다르게 모습이 변했다.


쑥과 냉이가 지천으로 널렸지만, 누구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저 필요하면 조금씩 가져다가 일용할 양식으로 활용할 뿐이다. 시간은 느긋하고도 느리게 흘렀다. 유치원에도 학교에도 다니지 않으니 눈을 떠서 잠이 들 때까지는 어디선가 무엇이라도 하고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어린아이에게서 잠시만 시선을 거두어도 무슨 일이 생길지 몰라 노심초사하던 외할머니는 이런 사고에 대비하여 외손자가 마당을 벗어나지 않도록 단단히 주의를 시키곤 했다.


“준아, 너 마당에서만 놀아야 한데이”

희끗희끗한 머리에 비교적 밝은 색의 옷을 즐겨 입던 외할머니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손자에게 던지는 말이지만 곧이들을 손자가 아님을 눈치채고 다시 강조한다.

“너 정말 둑에 올라가면 안 된다, 알지”


거동이 완벽하지 않은 상태에서 활발하게 움직이는 손자를 완벽하게 통제하면서 자신이 맡은 논농사와 다른 일을 함께 하기에는 힘에 부쳤을 것이다.


그러나 봄기운은 이미 어린 손자의 마음을 한껏 들뜨게 만들기에 충분했고 어린 손자도 마당에 갇히기엔 넘치는 기운을 감당하지 못했을 것이다. 신기한 모든 것을 품고 있는 놀이터가 불과 수십 미터 떨어진 강변에 펼쳐져 있는데 유혹을 뿌리치기엔 너무 어린 나이다.


밥때를 가리지 않고 언덕에 올라 한껏 봄을 만끽하다 보면 어느새 날은 어둑어둑해지고, 해는 김해평야를 넘어 고개를 숙인다. 손자가 사라진 것을 알아챈 외할머니가 저녁상을 만들고선 이내 손자를 찾아 나선다.

“이놈의 새끼는 또 어디 갖노”

불편한 몸을 끌고 강둑에 올라 장난질에 시간 가는 줄 모르는 손자를 찾아 손을 잡고 내려오면서 호통을 친다.

“너 자꾸 말 안 들을래, 그라면 네 집에 돌아가라” 이렇게 말하면,

잔뜩 주눅이 든 손자는 풀 죽은 목소리로

“아이다 할매, 담부터 말 잘 들을 끼다” 하며 할머니와 함께 언덕을 내려온다.


제집보다 나은 밥과 찬이 나오니 먹거리에 불만이 있을 이유가 없다. 낮에 심하게 뛰어놀다 체력이 떨어진 상태에서 먹성 좋게 밥을 먹은 어린 손자가 고즈넉한 시골 저녁에 가야 할 곳은 마지막은 장소는 꿈나라다. 그렇게 어린 손자의 하루는 봄날 대나무밭에서 자라는 죽순처럼 쑥쑥 지나갔다.


봄을 지나 초여름이 다가오면 마당 가장자리를 둘러싼 벽면 아래 딸기 모종에서 딸기가 자라 하루가 다르게 색이 짙어진다. 할 일 없고 별다른 간식이 없는 시골 어린아이에겐 따먹을 더할 나위 없는 좋은 딸기다. 색이 완전히 붉어지기 전 덜 익은 딸기라도 누가 먼저 먹어버릴까 해서 얼른 따서 먹어버렸다. 외할머니의 잔소리는 거저 지나가는 바람으로 여겼으니 완전히 익기도 전에 딸기는 거의 사라졌다.


말 안 듣는 손자로 곤욕을 치르는 할머니를 대신해서 어린 손자를 혼내줄 사람이 있었으니 다름 아닌 작은 외삼촌이었다. 진해에서 해군 부사관(과거에는 하사관이라 불렀음)으로 근무하던 작은 외삼촌은 부산상고를 졸업하고 해군 보안대에 적을 두고 있었다. 가끔 홀로 계시는 노모와 형수를 찾아 안부를 묻고 남자가 맡아서 해야 할 일을 돕기도 했다. 삼촌은 호남 형의 외모와 세련된 말솜씨로 멋진 모습을 하고 있었다. 특히 라이방 형태의 선글라스를 낀 모습은 마치 외국의 영화배우를 보는 듯 착각을 불러올 정도였다.


내가 외할머니댁을 떠나 부산에서 거주할 때에도 가끔 어머니를 찾아와 어려운 누님을 걱정해주던 모습이 아직도 선하다. 아무튼, 외삼촌의 젊은 시절 모습은 과히 톰 크루즈의 모습이 연상된다.


암튼 아직도 회자하는 작은 외삼촌과 나 사이의 일화가 있다. 아마도 꽤 말을 듣지 않은 나를 고발한(?)한 할머니의 부탁으로 작은 외삼촌이 나를 혼내준 사건이 있었고, 이에 저항한 나의 작은 행동이 작은 외삼촌에게 큰 웃음을 준 모양이다. 작은 외삼촌으로부터 혼난 나는 작은 막대기 하나를 구해 늦은 밤 작은 외삼촌이 기거하고 있는 방의 마루를 탁탁 치면서

“최준기 나와라”를 연발했다고 한다.


어린 조카의 이런 장난에 외삼촌은 웃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조그만 놈이 그래도 자신의 주장을 펼치는 것이 얼마나 귀여웠을까. 이 이야기는 한참 뒤 내가 성장하고 나서 들었지만, 조카와 외삼촌 사이에서 일어난 재미난 추억으로 외가댁 식구들의 기억에 자리하고 있다.


시골의 여름은 뜨거운 열기로 가득하다. 신작로에 펼쳐진 먼지를 가득 머금은 플라타너스 잎사귀가 열기로 축 처졌지만, 나무가 만든 큰 그늘은 지나는 객에게 시원한 장소를 제공했다. 에어컨은 고사하고 선풍기마저도 귀한 시절 한여름의 열기를 온전히 감당한 것은 등목이다. 집에 있는 우물에서 길러 올린 찬 냉기 가득한 물로 등목을 하고 나면 그 시원함은 말로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등목을 마치고 마루 그늘에 앉아 있으면 슬슬 졸음이 밀려왔다.


온종일 마을에는 울어대는 매미 소리로 잠잠할 시간이 없었지만, 녹색으로 물든 들판과 강 언덕의 푸름이 색을 짙게 물들이든 작은 마을의 여름은 먼지와 더운 열기만이 내 추억에 남아 있다.


여름 방학이 되면 집에서 형이 왔고, 명지 큰 이모집에서 이종사촌이 모두 몰려와 방학을 함께 보내기도 했다. 같이 어울리기에는 나이 차가 많아 함께 노는 일은 드물었기에 그들과 함께하고 추억하고픈 남아있는 기억도 별로 없다.


여름을 맞은 강둑에는 억새 풀잎의 색이 더욱 선명해지고 대는 굵어졌다. 여전히 갯벌 밭을 노니는 작은 게의 움직임은 재빨랐고 작은 소리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나타났다 사라짐을 반복했다. 끝없이 길게 이어질 것 같은 여름은 장마와 폭염이 반복하면서 태양이 연중 가장 높은 곳을 지나 추분으로 향하는 즈음 나의 유배와 같은 외가댁 더부살이도 끝이 나고 있었다.


사실 유배라고 하기보다는 내 인생에 있어 좋았던 기억의 덩어리가 고이 간직된 시절이라 축복이라 하는 것이 더 옳은 표현 이리다.


긴 여름이 끝날 무렵 나는 어머니와 함께 부산행 버스에 오른다. 섭섭해하시는 외할머니의 마음도 모른 채 어린 손자는 엄마 손을 잡고 집으로 가기 위해 들뜬 마음을 숨기지 않고 환한 얼굴을 하고 있다. 힘겨운 생활고에 시달리는 딸의 자식을 거두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려 했던 외할머니와 그런 모친의 마음을 감사하게 받아들였지만 더는 부탁하기 미안해하는 어머니의 심정을 어린 자식이 어떻게 이해했을까만 단지 부산에 있는 가족의 품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이 너무도 신났다.


기다리던 버스가 멀리서 먼지를 휘날리며 서서히 우리 앞에 멈추고 이내 짐을 챙겨선 어머니는 외할머니와 아쉬운 작별을 한다.

할머니는 나직이 말한다.

“잘 가거라, 준아”


기억엔 이 한마디의 말을 뒤로하고 나를 실은 버스는 구포다리를 건너 구포로 향하고 있었다. 뽀얗게 먼지를 날리면서 말이다.


물론, 이후에도 내가 외가를 종종 방문했고 외할머니와 새로 지은 집에서 보낸 기억도 남아 있지만, 유별나게도 이 시기에 내 기억에 새겨진 추억은 잘 사라지지 않는다. 내 기억의 낙동강 덕두리 언덕이 뽀얀 먼지에 가려 점점 작아지면서 나의 어린 시절의 좋았던 추억은 내 기억의 저장소인 해마에 영원히 각인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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