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50, 비로서 나의 '알'을 깨다.

by 모두부자되는세상

책을 구상하기 위해 AI와 대화를 나누던 중, 이런 질문을 받았다.

“작가님의 인생 책은 무엇인가요? 그리고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순간 당황스러웠다. 매일 책을 읽으면서도, 그동안은 그저 ‘좋은 책’, ‘읽어볼 만한 책’ 정도로만 구분해 왔기 때문이다. 나를 행동하게 만든 책은 있었지만, ‘인생 책’이라고 부를 만한 책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사실 “인생 책이 무엇인가요?”라는 질문이 처음은 아니다. 다만 진지하게 고민해 답해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전에는 딱히 떠오르는 책이 없어 EBS 자본주의를 이야기하곤 했다.


이 책을 떠올렸던 이유는 단순하다. 그전까지 나는 돈과 자본주의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회사에 다니고, 저축을 하고, 기껏해야 주식을 조금 아는 정도였다. 그런 나에게 이 책은 자본주의의 원리를 이해하게 해준 계기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을 ‘인생 책’이라고 부르기에는 어딘가 부족했다.


그동안 많은 책들이 나에게 크고 작은 깨달음을 주었다.

[세이노의 가르침] 처럼 뼈를 때리는 문장으로 정신이 번쩍 들게 한 책도 있었고, [원씽], [아주 작은 습관의 힘], [부자의 언어] 처럼 삶의 태도를 바꾸게 한 책들도 있었다. 그래서 더 고르기 어려웠다. 일종의 선택 장애였다.


결국 나만의 방식으로 정리해 보기로 했다. 읽었던 책들을 떠올리며 하나씩 지워나가는, 이른바 ‘이상형 월드컵’을 시작했다. 그리고 마지막에 남은 한 권. [데미안]이었다.


많은 밑줄을 그어둔 책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이 책을 선택한 이유는 단 하나였다. 첫 문장이 나를 붙잡았기 때문이다.


"나는 나 자신 속에서 스스로 나오려는 것만을 살려고 했었다. 왜 그것은 그렇게도 어려운 일이었을까?”


이 문장에서 멈춰 섰다. 더 읽어 내려가지 못했다. 이 한 문장이 나를 돌아보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왔을까. 나는 스스로 자유롭게 살고 있다고 믿어왔지만, 정말 그랬을까.


애초에 ‘자유롭게 살려고’ 한 적은 있었던 걸까.


학생 때는 입시를 위해 살았고, 대학에 가서는 취업을 위해 살았다. 사회에 나와서는 별다른 의식 없이 회사에 다녔다. 그 삶이 과연 ‘자유로운 삶’이었을까.


이 질문 앞에서 나는 한동안 멈춰 있었다. 나는 과연 나로서 살아왔는가. 내 안의 목소리를 들으려 한 적은 있었는가.


누군가 “당신은 어떤 사람인가요?”라고 묻는다면, 나는 어떤 대답을 할 수 있을까.


남들이 만들어 놓은 길을 따라 무난하게 살아왔다. 돈을 벌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았다. 겉으로 보면 부족함 없는 삶이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나는 늘 ‘남들의 기준’에 맞추려 했고, ‘남들에게 잘 보이는 삶’을 선택해 왔다. 정작 ‘나’라는 존재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하지 못했다.


그래서 [데미안]을 읽으며 계속해서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


주인공 싱클레어는 어린 시절, 선과 악의 경계에서 방황한다. 그러다 데미안을 만나며 점차 자신만의 자아와 정체성을 찾아간다. 그 과정을 따라가며 나는 생각했다.


나는 이런 고민을 해본 적이 있었던가. 내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본 적이 있었던가?


혹시 그저 편안하고 안정적인 삶만을 좇아온 것은 아니었을까?


돌이켜보면 나는 늘 안전한 선택을 해왔다. 변화를 두려워했고, 도전을 미뤘다. 게으름과 두려움 사이에서 망설이다가 많은 기회를 놓쳤다. 그래서 늘 선택 앞에서 머뭇거리는 사람이 되었다.


책의 마지막, 데미안이 싱클레어에게 전한 문장은 유독 깊게 남았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해야만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프락사스다”


이 문장은 마치 나에게 하는 말처럼 들렸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알’을 깨고 나오라고.


새가 알을 깨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고통이 따른다. 하지만 그 과정을 견뎌내야 비로소 하늘을 나는 존재가 된다.


어쩌면 우리는 각자의 알 속에 갇혀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안정이라는 이름으로, 익숙함이라는 이유로, 그 안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반백 년을 살아온 지금에서야 비로소 돌아본다. 알을 깨는 일은 아프지만, 그 과정을 거쳐야만 진짜 ‘나의 삶’을 살 수 있다.


그동안 배려라는 이름으로 내 생각을 숨겨왔다면, 이제는 조금씩 드러내도 된다. 갈등을 피하기보다, 내 마음이 향하는 방향을 따라가도 된다.


가고 싶은 곳에 가고, 먹고 싶은 것을 먹고,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것. 그 단순한 선택들이 어쩌면 ‘나로 사는 삶’의 시작일지도 모른다. 나로 살아간다는 것은 여전히 쉽지 않다. 하지만 그럼에도 계속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제 막 50을 넘긴 내가, 같은 세대와 그보다 어린 이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우리는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배우고, 시도하고, 나아가야 한다. 그래야 언젠가 마지막을 마주했을 때, 후회가 조금은 덜할 테니까.



* 이 글은 아직 완성본이 아닌 초초고 글임을 감안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월, 수, 금 연재
이전 08화50, 이제야 '나'라는 문장을 써내려 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