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좀 편하게 있자
내 고향은 벚꽃으로 유명한 진해다. 어릴 적 벚꽃 축제는 기다림의 시간이었다. 평소 조용한 소도시가 그때만큼은 활기로 가득했다. 풍물시장, 서커스, 먹거리 장터, 야바위 놀이까지 어린 눈에는 모든 것이 신기했다. 거북선이 있는 분수 로터리 주변이 사람들로 메워져도 귀찮지 않고 오히려 즐거웠다. 풍물시장에서 물건을 사는 재미는 마지막 날 할인할 때였다. 토박이라는 마음에 “깎아서 사야지” 하고 흥정하던 것도 소소한 즐거움이었다.
하지만 고등학생이 되면서 딜라졌다. 사람과 차가 몰리는 게 더 이상 재미가 아니었다. ‘늘 보는 벚꽃이 뭐가 그리 특별하다고 이렇게까지 몰려올까’라는 생각으로 바뀌었다. 대학에 들어가 서울에 살게 된 뒤에는 벚꽃 축제 시기를 피해 고향을 찾았다. 마산에서 진해로 들어가는 길이 한두 시간 더 걸리니 피곤한 일이라 여겨졌다.
다시 생각이 바뀐 건 대학 졸업 후였다. 어느 봄, 오랜만에 친구들 모임이 있어 진해로 내려갔다. 장복터널을 지나자 마음이 풀렸다. 터널 하나 넘었을 뿐인데 “이제 고향이다” 하는 편안감이 들었다. 산복도로에서 내려다본 진해의 전경은 정겨웠다. 산과 길가를 가득 메운 벚꽃이 유난히 아름다웠다. 서울에서 보던 벚꽃과 달랐다. 나중에야 알았다. 진해의 왕벚꽃은 겹잎이 많아 더 붉고 풍성한 빛깔을 띤다는 것을.
고향집은 바닷가 앞에 있었다. 어릴 적에는 수영하러 바로 뛰어들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웠다. 한동안 집에는 작은 동력선이 있었다. 아버지가 목수와 함께 직접 만든 배였다. 공공기관에 근무하시던 아버지는 과묵한 성격이었지만, 바다에서는 달랐다. 지인들과 수영을 가고 낚시를 나가셨다. 약주를 하신 날에는 말씀이 많아지고, 가끔 과자를 사 오시기도 했다. 내 취향의 과자는 아니었지만, 그 마음은 따뜻했다. 수염을 내 팔에 문질러 도망가게 하던 장난이 애정의 표현이란 걸 그땐 몰랐다.
집에 머무른 건 닷새쯤이었다. 대부분 내 방에 있었지만, TV를 볼 때면 아버지 방으로 갔다. 아버지는 쿠션을 받치고 반쯤 누운 자세로 앉아 계셨다. 나는 그 옆에서 곧게 허리를 세우고 앉았다. 당시에 나는 명상 수행에서 일념정진(一念精進)과 장좌불와(長坐不臥)를 실천하려 노력했다. 기대거나 눕지 않고 늘 바른 자세로 앉아 있었다. 밥을 먹을 때도 도서관에서도 그랬다. 친구들이 나를 찾는 건 쉬웠다. 넓은 도서관 안에서 '허리를 꼿꼿이 세워 머리가 솟은 사람'만 보면 됐다.
집에서도 마찬가지였다. TV를 몇 시간이고 미동 없이 보고 있으니, 사흘째 되는 날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우리 집에서는 서로 좀 편하게 있자.”
반쯤은 농담이지만 조금 한숨 섞인 목소리였다. 그제야 깨달았다. 나의 수련이 때로는 주변을 불편하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그 뒤로 아버지 방에서는 자세를 풀고 일부러 몸을 움직였다.
돌아보면 그때 나는 고지식한 수행자였다. 한순간도 몰입을 놓치지 않겠다는 수행의 흐름 속에 있었다. 고요함에 젖어드는 것은 좋았지만, 때와 장소를 가리는 지혜는 부족했다.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도 미처 알지 못했다.
그러다 나중에 스승님께 ‘선배려 후도법’이라는 말씀을 듣고 마음이 달라졌다. 먼저 주위를 배려하고, 그 위에서 수련을 이어가라는 가르침이셨다. 수행은 내 안의 조화를 이루는 동시에, 이웃과의 조화를 배우는 길인 것을 체득하게 되었다.
이제 생각해 보면, 눈치 없는 아들 덕분에 불편했을 아버지를 떠올리면 죄송하기도 하고 웃음이 나기도 한다. 하지만 수행은 그런 과정을 통해 조금씩 배워가는 것이 아닐까.
조화를 향해 나아가는 공부를 한 걸음씩 하는 것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