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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르슬라 Sep 21. 2022

9월에 함께 읽고 싶은 시

- 가을은 독서의 계절, 시의 계절

코로나로 요양할 때 나태주 시인의 시집을 한 권 읽었는데, 좋아서 사진 찍어둔 시들 중에 '9월'에 관련된 시가 있다. 또 지금 읽고 있는 책이 <일본 하이쿠 선집>, <정본 백석 시집>인데 가을 초입에 읽으면 좋을 시들이 있어서 오늘은 시를 함께 감상해 보고 싶다. 



                                                           나태주 - 다시 9월이



다시 9월이    - 나태주 -


기다리라, 오래 오래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지루하지만 더욱


이제 치유의 계절이 찾아온다

상처받은 짐승들도

제 혀로 상처를 핥아

아픔을 잊게 되리라


가을 과일들은

봉지 안에서 살이 오르고

눈이 밝고 다리 굵은 아이들은

멀리까지 갔다가 서둘러 돌아오리라


구름 높이, 높이 떴다

하늘 한 가슴에 새하얀

궁전이 솟았다


이제 제각기 가야할 길로

가야 할 시간


기다리라, 더욱

오래오래 그리고 많이.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기다려라' '치유의 계절이 찾아온다' 

이런 구절들 때문에 처음 볼 때에 좋았었나 보다. 지금 다시 시를 들여다보며 하나하나 의미를 생각해 보려 하니 쉽지가 않다. 이제 치유의 계절이 찾아오니까 기다리라는 말까지는 이해가 된다. 그런데 생각해 보자. 왜 가을이, 9월이 치유의 계절인가.

게다가 치유의 계절에 상처받은 짐승들을 치유해 주는 것은 상처를 입힌 이가 아니다. 동정심을 가진 타자가 아니다. 상처받은 짐승들, 그 자신이다. 자신의 혀로 상처를 핥아 아픔을 잊게 하는 것이다. 혀로 핥는 것 따위가 치료가 될 수 없다. 그러니 딱지가 생기고 새 살이 돋는 그런 치유, 회복이 아니라  고작 '아픔을 잊는 것'을 치유로 삼는다.


'가을 과일은 봉지 안에서 살이 오른다' 상식적으로 과일나무에 달려 있어야 살이 오르는 것 아닌가, 그런데 나무와 헤어져 생명을 공급받을 수 있는 원천을 잃어버린 가을 과일, 어떤 이의 입으로 들어가기 위해 먼저 봉지에 들어간 가을 과일이 살이 오른단다. '눈이 밝고 다리 굵은 아이들'이 정확히 무엇을 지칭하는지 모르겠지만 과일과 이어져 한 연에 있는 것으로 보아하니 아마도 사람이 먹는 무엇일 것 같다. 가을에 살이 통통 오르는 '게' 이런 종류의.. 걔네들도 멀리 갔다가 서둘러 돌아올 것이라 한다. 가을 과일이 봉지 안에 있는 이유와 아마도 같은 이유일 것이다.


'이제 제각기 가야 할 길로 가야 할 시간'

이형기 시인의 '낙화'가 떠오르는 구절이다. 나무에 붙어있던 초록색 나뭇잎들이 노랗게 변하면서 붙어 있을 힘을 잃어버리고 툭 떨어진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시간이다. 힘을 잃고 떨어져서 이별해야 하는 시간. 


가을이 치유의 계절이 될 수 있는 것은 봄부터 달려온 것의 마침표를 찍을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여름 내내 달려 있던 과일도 떠나가고, 잎들도 사라진다. 이제 나무는 열매를 살찌우기 위해, 나뭇잎에 생명을 주어 붙잡아 두기 위해 애쓸 필요가 없다. 어떤 효용이나 돌봄을 위해 자신을 내어주어야 할 필요가 없다. 이미 할 일을 다 했기 때문이다. 그때가 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다. 나로서 조용히 어떤 의무도 없이 쉴 수 없는 시간이 돌아올 것이다. 다시 가을이 올 것이다. 그날이 확실히 올 것을 알기에 나는 지금 과일을 살 찌우며 잎들을 붙잡고 오래오래 되도록 많이 기다린다. 



하이쿠 - 마쓰오 바쇼



몇 해 전 페친 한 분이 하이쿠에 관련된 게시물을 올린 적이 있는데 그때 '참 좋다' 하고 느꼈었다. 그리고 한 두해가 흐른 후 그러니까 작년 초 생일 선물로 이 책을 받고 싶다고 해서 받아서 갖고 있었던 책이다. 하지만 1년 하고도 반이 지난 요즘에야 읽고 있다. 재작년에 애니메이션 '하이큐'에 완전 미쳐 있던 때라 '기초 일본어' 책도 사두었는데 (그래서 그때는 내가 직접 읽고 해석해 보겠다는 큰 포부를 갖고 있었....) 내가 또 새로운 취미 중드에 빠지면서 그 책은 뽀얗게 먼지만 덮여 있다. 결론은 여전히 일본어 까막눈이라 한글 번역을 보며 감상하고 있다는 말이다.


따가운 햇살은

아무런 변함 없이

가을의 바람

     - 마쓰오 바쇼-



가을이 시작될 때, 8월 말, 9월 초를 너무나 잘 표현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햇살은 여전히 따가운데 바람의 질이 달라졌다. 습기가 빠져 개운한 감이 돌고 그래서 제법 선선하다. 바람이 먼저 시작하면 하늘이 따라서 높아진다. 높아진 하늘을 따라서 기온이 내려간다. 따가운 햇살은 바람과 차가워진 기온에 섞여 중화되어 따스함만 남긴다. 겨울의 시작도 아마 바람이 알릴 것이다.



백석 - 내가 이렇게 외면하고



가장 좋아하는 시인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나는 '백석'이라고 대답한다. 중고딩 시절에 짝사랑하는 남자아이를 생각하며 한용운의 <님의 침묵> 속 한 편 한 편을 엽서에 옮겨 적기도 했고, 대학 시절 김남조와 황지우 시인의 사랑 시들을 다이어리에 옮겨 적으며 애달파 한 적도 있었고, 한때는 김초혜 시인을, 그리고 윤동주를 거쳐서 나는 '백석'에 도착했다.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흰 바람벽이 있어' 등 백석의 시 속  화자들에게 나는 꽤 많이 동질감을 느낀다. 그들은 비련의 여주인공 같으면서도 청승맞지 않고, 나약함을 진솔하게 드러냄으로 아직은 이 땅에서 뿌리 뽑히지 않았음을 표명한다. 센 척하지 않으면서도 도망치지 않는 그들에게서 나는 위로를 많이 받았다.


내가 이렇게 외면하고     - 백석 -


내가 이렇게 외면하고 거리를 걸어가는 것은 잠풍 날씨가 너무나 좋은 탓이고

가난한 동무가 새 구두를 신고 지나간 탓이고 언제나 꼭같은 넥타이를 매고 고운 사람을 사랑하는 탓이다


내가 이렇게 외면하고 거리를 걸어가는 것은 또 내 많지 못한 월급이 얼마나 고마운 탓이고

이렇게 젊은 나이로 코밑수염도 길러보는 탓이고 그리고 어늬 가난한 집 부엌으로 달재 생선을 진장에 꼿꼿이 지진 것은 맛도 있다는 말이 자꼬 들려오는 탓이다




'내가 이렇게 외면하고 거리를 걸어가는 것은' 뒤에 나오는 구절들은 하나같이 좋은 것들이다. 대단한 것은 아니지만 흐뭇한 기분이 들게 하는 것들이다. 이런 좋은 것들이 있어서 '나는 이렇게 외면하고 거리를 걸어간다'라는 것이다. 좋은 것은 좋은 것과 연결이 되어야 자연스럽다. 그렇다면 내가 외면하고 거리를 걷는 행위도 좋은 것일 것이다. 보아하니 화자는 아직 젊고 월급을 받는 일을 하고 있다.  멋 내기로 콧수염도 기르고 있고, 부엌에선 생선 조림 냄새가 솔솔 나는데, 음식을 만드는 이들은 '이거 참 맛있지' 한다. 또 가난한 내 친구가 새 구두를 샀고, 그 친구는 고운 사람을 사랑하고 있다. 그리고 지금 내가 걷고 있는 이 길 위에 잔잔한 바람이 불어 시원하니 기분이 좋다. 적은 월급이라도 받을 수 있어서 참 다행이고 고맙다.


그래서 나는 어떤 것은 외면한다. 보이지만 못 본척한다. 애써 보지 않으려고 한다. 

거대한 불의, 가난하게 살 수밖에 없는 현실, 내가 가질 수 있는 것들의 한계, 그 앞에 무기력한 나의 보잘것없음. 그런 것들은 외면하려고 한다. 외면한 채 지금처럼 이 길을 걷겠노라 한다. 






내가 청춘일 적에는 '봄'을 가장 사랑했다. '겨울'이 가장 싫었던 탓이고, 추위가 가장 견디기 어려웠던 탓이다. 어느 순간부터 '더위'가 힘들어 '여름'을 기피하게 되었고, '가을'을 가장 사랑하게 되었다. '봄'에 느끼는 싱숭생숭함과는 다른 종류의 '센티멘털'이 있는 가을이 좋다. 


왜 그런지, 날씨가 이렇게 좋은데도 여기저기 다니고 싶은 마음이 별로 들지 않는다. 올가을은 한 해의 끝을 보면서 해야 할 것들에 집중하며 시간을 보낼 것이다.


그래도 11월에 화담숲은 꼭 다녀오련다!


한 계절을 지나 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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