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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경화 Feb 25. 2022

새벽안개 사이로 펼쳐진 숲

붉은 화산송이 사려니 숲길


대학교 3학년 여름방학 때 설문조사 아르바이트를 해서 여행비용을 마련했다. 밤기차로 목포에 가서 카페리 호를 타고 제주도로 떠났다. 협제 해수욕장에서는 하늘의 별을 보았다. 쏟아질 듯이 밤하늘을 가득채운 별들. 태어나서 별들이 그렇게 많이 반짝이는 것은 처음 보았다. 아침 협제해수욕장의 바닷물 색은 연녹색이고 모래는 새하얀 색인데 신비로웠다.     

 바다의 오묘한 색채의 느낌은 선명한 사진처럼 기억 속에 남아있다. 시간이 많이 지나 제주의 숲에서 또 다른 신비로운 색을 만났다. 보라색이 감도는 붉은 땅과 진한 녹색 나뭇잎 사이로 드리워진 안개 너머 펼쳐진 사려니 숲길.      

 새벽에 도착한 사려니 숲길은 예전에 컴퓨터 배경화면에서 본 적이 있는 풍경 그대로였다. 그 색깔이 그래픽으로 만든 것일 거라고만 여겼었는데 눈앞에 현실로 펼쳐지니 믿기 어려울 정도였다. 바로 몇 발자국만 걸으면 짙은 안개 속에 더 포근하게 감싸일 것 같았다. 다가가면 또 몇 발자국 앞이 더 짙게 느껴졌다. 그렇게 한없이 안개 속으로 걸어보고 싶은 길이 사려니 숲길이었다.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중 베르테르가 빌헬름에게 쓴 편지의 문구가 생각났다.

“나는 그 곳으로 달려갔다가 다시 돌아왔어. 내가 바라던 것을 발견하지 못했거든. 아, 아득하게 먼 곳은 미래와 다를 바 없는 거야. ... 그러나 황급히 그 곳으로 달려가 보면, 다시 말해 그곳이 바로 여기가 되면  모든 것이 예전과 똑같아지지.”     

 안개 속을 걸으며  ‘그곳이 여기가 되면 모든 것은 예전과 똑같아 진다.’는 표현에 공감했다. 상상 속의 완벽한 미래는 현실이 되면 평범해 지고 또 앞날을 꿈꾸며 지내는 것 같다.  굴레를 벗어난 자유는 상상 속에서 더 완벽할 수도 있다. 그렇게 잡히지 않는 안개 속을 헤매듯 사는 것은 아닐지.     

 나보다 먼저 직장에서 명퇴를 한 남편은 나름대로 시간을 잘 보내고 있었다. 베란다에 화분들도 잘 가꾸며 책도 읽고 운동도 했다. 주말농장을 하고 가족을 위해 요리도 했다. 새로운 일을 시작하기 전에 제주도 올레 길을 걸어보고 싶었다며 혼자 몇 차례 제주도를 다녀왔다. 나도 배낭을 메고 도보여행을 해보고 싶어서 6월 연휴를 이용해 남편과 함께 제주도로 떠났다.     

 바다를 보며 한없이 걷는 낭만적인 상상은 곧 현실적으로 다가왔다. 이동하며 게스트 하우스가 바뀌기 때문에 계속 짐을 갖고 다니다보니 힘들었다. 사려니 숲길에서는 배낭의 무게도 잊고 길이 이끄는 대로 걸었다. 하늘을 향해 곧게 뻗은 삼나무들로 이루어진 숲이 나타났다. 연녹색 이끼가 낀 나무들이 늘어선 새벽 숲은 사람들의 발길이 아예 없었던 태고의 숲처럼 신령스럽게 느껴졌다.      

  ‘숲은 아름답고 깊지만 내겐 지켜야 할 약속이 있네. 아직 가야할 길이 남아있네.“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 구절이 떠올랐다. 스스로 지켜야 할 약속과 가야할 길은 사람마다 다르지만 나름대로 정한 길을 가야 한다. 붉은오름 사려니 숲길 입구에서 시작해 물찻 오름을 지나 이어지던 길은 천미천에 다다르며 끝자락이 보이기 시작했다. 더 머물고 싶지만 아쉬움을 지닌 채 발 길을 옮겨야 했다. 사려니 숲길에서 또 하나의 선명한 사진 같은 기억을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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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려니 숲길은 제주시 봉개동의 비자림로에서 서귀포시 남원읍 한남리의 사려니 오름까지 이어지는 15Km의 숲길이다. 사려니 숲길은 ‘신성한 숲길’이라는 의미가 있다. 화산 폭발 시 점토가 고열에 탄 화산석인 돌 숯 ‘송이’가 깔린 길은 붉은 색을 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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