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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희철 Oct 09. 2024

2) 해외어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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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해외어업 


1984년 12월, 졸업하기 전 배 타기 위해 부산에 있는 수산회사를 기웃거리고 다녔다. 예상외로 취업이 쉽진 않았다. 부산은 예전에도 당시에도 ‘원양어업의 메카’였다. 학교 다닐 때 숫기가 없었던 놈이라 아는 선배도 거의 없었다. 동기 두 놈과 초읍에 살던 동기 집에서 만나 이력서를 작성하여, 점심 먹고 난 다음엔 충무동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하루 일과 같은 순례(?)가 끝나고 특별히 할 일이 없다면 깡통시장 근처 ‘전어회 무침’을 안주로 파는 ‘의령집’에서 막걸리 마시는 게 정해진 코스였다. 그곳은 시집 안 간 세자매가 운영하던 곳인데 가격이 저렴할 뿐 아니라, 밤늦게까지 죽 치고 술을 마시고 있으면 차 떨어지기 전에 집에 가라고 술값에서 차비를 빼주곤 했다. 하지만 우리를 재워 주는 자비심은 없었다. 첫 째는 좀 뚱뚱한 편이었고 막내는 예쁘기도 했지만 날라리처럼 보였다. 가끔 좁은 방에서 얼굴을 치장하고 라디오에서 흘러  나오는 음악에 흥에 겨워 몸을 흔드는 게 얼핏 보였다.     


그러던 어느 날 자갈치에 있는 신천지 백화점 6층 ‘해외어업’ 부산지사에 들르게 되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우리는 버릇처럼 구직 동작을 반복했다. 입구에 있는 분(지금 생각하면 경리)께 본능적으로 고개를 숙이고 이력서를 내밀면서 구호 같은 신고 아니 인사를 하였다.

“배 자리 구하고 있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그리곤 서류가 접수되었다 싶으면 사무실을 빠져 나오는 게 우리의 방식이었다.      

사무실을 빠져 나오려는 순간 사무실 안쪽에서 우리를 부르는 거칠고 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사장으로 보이는 사람과 한참 이야기를 나누던 30대 후반으로 보이는 남자였다. 양복에 바바리코트를 입고 담배를 피우고 있었는데, 까만 머리칼을 뒤로 넘긴 게 첫인상이 강렬했다. 우리는 머뭇거리며 우리를 부르는 곳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느그들 수대 나왔냐?”

첫 억양이 전라도 사람이었다. 우리가 그렇다고 대답하자 몇 학번이냐고 물었다. 그리곤 하는 말이 

“야 이놈들아 수대 졸업했으면 선배를 찾아와서 인사를 혀야지 이게 무슨 짓꺼리냐?” “???”

우리는 우리가 무얼 잘못했는지 몰랐다. 그래서 입을 다물고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는데 또다시 굵은 목소리가 튀어 나온다.

“회사 경리들에게 머리나 굽신 거리며 다니고 말이야!”

나중에 알고 보니 부산수산대학 어업학과 65학번 선배였다. 그는 지금 선장이며 오만어장으로 갈 선원구성을 하고 있다고 했다. 경리에게 우리가 준 이력서를 가져 오라 해서 보더니 셋을 다 데리고 갈 순 없고 우리 중 한 명은 꼭 데리고 가겠다고 했다. 그리곤 앞으론 다른 곳에 가서도 경리에게 굽신 거리며 다니지 말라고 했다. 우린 기쁜 마음으로 사무실을 나왔다. 취업된 것은 아니지만 가뭄에 단비를 만난 느낌이 들었다. 우리 원칙은 하루에 한 곳 정도를 들러 구직 작업을 하는 것이었는데 오늘은 그게 끝난 셈이다. 어저께는 ‘남양사’라는 회사에 들러 이력서를 뿌렸다. 우리는 한결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세 자매가 있는 ‘의령집’으로 향했다.

     

며칠 후 동기 하나는 ‘남양사’에서 연락이 와 ‘크로버’호 3항사로 승선하게 되었다. 출항은 속초항에서 하는데 무슨 어구 하나를 부산 본사에서 받아 배까지 들어오라는 첫 명령이 떨어졌다. 너무 급작스럽게 벌어진 취업이고 또 승선이라 인사를 나눌 사이도 없이 동기는 속초로 향했다. 우린 이제 둘만 남았다. 우리는 계속해서 구직 활동을 했다. 그러던 중 얼마나 지났을까 하도 답답해서 난 ‘해외어업’ 부산 사무소로 전화를 하게 되었다. 그리고 ‘곽경진’ 선장과 통화하게 되었다. 아직 새로운 항해사를 구하지 않았다며 나보고 안경만 쓰지 않았으면 좋을 텐데 하면서 말을 얼버무렸다. 어장에 가면 항해사가 하루에도 몇 번씩 어창에 들어가야 할 일이 생긴다면서 그때 안경에 서리가 끼는 것 때문에 일하기 어려울 거라는 거였다. 속으로 말도 안 되는 핑계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선배가 침이 마르도록 강조하던 수대 어업학과 강철 같은 의리의 선후배 관계가 떠올랐다.     


결국 나보고 사무실에 한 번 나오라고 했다. 동기에게 말하니까 동기는 너하고 인연이 있는 것 같다면서 나보고 가보라고 했다. 결국 나는 안경이 아니라 콘택트렌즈을 착용하는 걸로 선장과 약속하고 취업이 되었다. 인도양 오만 어장이었다. 내일부터 당장 사무실로 출근해서 초사(1항사)가 하는 ‘선원구성’을 도와주라고 했다. 난 실전 항해사 경험도 없으면서 졸지에 2항사로 취업이 된 것이다. ‘4년제 대학의 자부심’을 입에 달고 다니던 선장의 의지가 작동한 것 같았다. 나중에 3항사가 2명 더 들어왔다. 나보다 4살 많은 초사 변규섭은 여수수전을 졸업하였고 3항사들은 모두 초사 후배였다. 모르긴 해도 선장의 명령으로 초사가 자신의 후배 중에서 구한 모양이었다. 특이한 점은 선장을 비롯해서 항해사는 모두 전라도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2항사인 나는 부산 사람, 마지막으로 들어온 실항사 황태인은 통영수전을 갓 졸업한 경상도 사람이었다. 3항사 강철은 나보다 1살 많았고 고창준은 3살이나 많았다. 그들은 모두 마구로(연승)어선의 1항사 출신이었다. 원양어선이라면 나보다 경험이 더 많은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초사는 내가 보는 앞에서 3항사인 자기 후배들에게 앞으로 2항사인 나를 상급자로서 깍듯이 대하고 또 업무에 적극 협조하라는 말을 했다. 그리고 2항사인 나에겐 비록 나이가 어리지만 직책이 그런 것이니 3항사들에게 말을 놓으라고도 했다. 그래야 배의 규율이 잡힌다고 하면서 하지만 그게 쉽게 되지는 않았다. 그래서인지 나의 말투는 이상하게 되어 버렸다. 놓는 것도 아니고 올리는 것도 아니고.     


취업은 일찍 되었지만 선박의 인수계획이 계속 연기 바람에 출국은 하질 못하고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선박 인수계획이 늦어진 게 아니고 오만 수산청으로부터 입어 허가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지 않은 것 때문이었다.     


마지막 남은 동기는 나보다 늦게 취업이 되었지만 출국은 더 일찍 하였다. 그는 뉴질랜드 어장으로 가게 되었는데 공항으로 마중하러 갔었다. 그곳에서 이별하는 사람들을 보니 우리도 이제 진짜 바다 사나이로서 생활이 시작 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비장한 마음이 들기도 하였다. 

     

며칠 후 ‘해외어업’의 다른 선장(K202호)이 나에게 혹시 동기 중에 ‘전라도 사람’이 없냐고 물었다. 난 동기를 소개해 주었다. 그리곤 그도 취업이 되었다. 하지만 해가 바뀌고 학교 졸업식도 끝난 것은 물론 4월이 되어도 우린 출국하지 못했다. 내 소개로 나보다 늦게 취업한 동기도 4월경에 오만으로 출국 해 버렸다. 그가 승선할 K202호는 오만어장에서 이미 조업을 하고 있었던 터라 배의 입항에 맞춰 출국하면 되었던 것이다. 우리 배 3항사 고창준은 특례보충역 기간의 한계 때문에 K202호 선원들과 함께 출국하였다.  

   

난 그때까지 육지에서 대기수당 16만원을 받으면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이러다가 혹시 군대에 끌려가는 것은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들기도 하였다. 출국 스케줄은 늘어지고 늘어져 그로부터 거의 한 달 후 5월 20일 드디어 출국 스케줄이 잡혔다. 그런데 뭔가 복잡했다. 3항사 고창준처럼 1차 선발대는 K202호 선원들과 함께 오만으로 직행하고 2차 선발대 15명은 일본으로 가서 배를 인수한 후 나머지 선원(3차)들과 싱가포르에서 합류하는 계획이었다. 나 역시 특례보충역 기간 때문에 2차 선발대에 합류하게 되었다. 모르긴 해도 5월말까지 출국하지 않으면 군대에 끌려 갈지도 모른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출국 3일 전 계약서를 쓰고 ‘전도금(계약금)’이란 걸 200만원 받았다. 물론 전도금이라는 게 일종의 ‘가불’이지만. 당시 국공립대학 한 학기 등록금이 25만원이었으니 엄청나게 큰돈이었다. 그 뿐 아니라 출국 시꼬미(준비)하라고 3개월 임금을 가불해 주었다. 그래서 내가 받은 돈은 290만원이나 되었다. 돈을 어떻게 써야 할지 몰라 집에 갖다 주니 식구들이 놀랐다. 그렇게 큰돈이 한꺼번에 집으로 굴러 들어오다니 당시 내 학비를 제 때에 마련하지 못해 늘 조금씩은 이웃에 돈을 빌려서 납부하였던 우리 집 가정형편이었는데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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