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소설
- 1편에서 이어집니다.
1월 30일, 채리네.
박채리, 일어나. 학원가야지.
얘는, 그 학원 말이야. 오늘부터 다시 시작이잖아. 방학은 무슨. 학원에 방학이 어디 있어. 그동안 쉰 거는 사정이 있어서 그런 거지. 얼른 일어나, 가서 씻어.
아줌마 내일까지 안 나오실 거야. 설 연휴잖아. 그럼, 아줌마도 가족들이 있지.
글쎄. 아줌마가 돈 모아서 보내면 그 돈으로 학교 다니고 밥 먹고 하겠지? 그러니까 너도 학원 열심히 다니란 말이야. 우리 채리는 공부를 못하잖아. 학원 열심히 다녀야 나중에 유명한 사람 되지. 그래야 아줌마 같은 일 안 하는 거야.
무슨 소리야, 얘는. 아줌마랑 엄마는 완전히 다르지. 나는 돈 한 푼 안 받고 오로지 내 새끼 잘 되라고 너 키우는 거야. 아줌마가 네 엄마라서 널 돌보는 건 아니잖아.
딸, 잘 들어. 오직 나랑 네 아빠가 돈을 주기 때문에 아줌마가 매일 여기 오는 거야. 아줌마는 우리 가족이 아니라고. 언제든지 대체 가능하다고.
전에 아빠 회사 갔을 때 아빠한테 혼나던 머리 하얀 아저씨 기억나지? 그 아저씨처럼 아줌마가 너보다 나이는 많긴 해도 결국 네 아랫사람이고 네가 고용한 사람이라는 거야. 명심해 둬.
얘는 참. 학원에서 인간의 가치에 대한 수업 했잖아. 너 설마 수업할 때 졸고 딴 생각 하고 그러는 거 아니지?
그래. 우리 채리 이제 열두 살이잖아. 알만도 한데 아직도 아기처럼. 얼른 가서 씻고 나와.
거기 보라색 샴푸 너 전용으로 새로 사둔 거니까 쓰고. 엄마가 특별히 비싼 거 산거야. 프랑스제. 피부랑 헤어는 어릴 때부터 관리해줘야 되거든. 머리부터 발끝까지, 여자는 어때야 된다? 그렇지. 무조건 예뻐야 된다.
다 씻었어? 여기 앉아봐.
오늘 학원가면 원장님한테 이거 드려. 꼭 원장님한테 드려야 해. 다른 사람 주지 말고 원장실 혼자 가서 직접 드려. 알겠지?
그리고 오늘부터 너 정말 열심히 해야 해. 며칠 전에 TV에 경호 나오는 거 봤지? 걔 너보다 잘난 거 하나도 없잖아. 그런데 그렇게 띄워주니까 화 나, 안 나?
안 나? 그게 화가 안 나, 너는?
신기해? 뭐가 신기해. 경호가 아니라 니가 있어야 할 자리인데.
무슨 검투사야. 이름 짓는 센스하고는. 어린애가 검도 좀 해봐야 얼마나 한다고, 내 참, 웃기지도 않아서.
채리 너, 걔 칼 쓰는 거 봤어? 너보다 잘해? 아니다, 상관없어. 어차피 칼은 이제 경호꺼니까 너는 다른 거 해야지. 그래도 아쉽다. 벚꽃에는 칼이 딱인데. 그지, 채리야.
아니야, 괜찮아. 아무것도 아니야. 괜찮아, 채리야. 엄마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넌 어서 밥이나 먹어. 그리고 아까 그 봉투 다시 줘봐, 엄마가 직접 원장님 드려야겠다.
샴푸 향 참 좋네. 역시 비싼 게 달라.
2월 13일, 채리네.
TV에 경호 또 나오네. 저거 봐, 여보.
저 옷은 뭐야? 집에서 입던 거 그대로 입고나왔나 봐. 협찬 안 받았나. 쯧. 우리 채리는 걱정하지 마. 너 방송 나가면 엄마가 직접 코디 해줄게. 엄마가 또 한 패션 하잖아.
그런데 경호가 저렇게 잘 생겼었나? 애가 화면빨을 잘 받네.
채리야, 혹시 경호가 학원에서 너 좋아하고 그런 건 없었니?
왜, 괜히 머리카락 잡아당기고 괴롭히고 그런 거. 없었어? 학원에서 너 좋아하는 애 없니? 학교에선?
그냥 니가 둔해서 모르는 거 아니야? 우리 딸 이렇게 예쁜데 왜 인기가 없어. 세아는 벌써부터 남자애들한테 선물도 받아오고 그런다는데.
그러고 보니 우리 딸, 왜 아직도 왼쪽 눈에만 쌍꺼풀이 안 생기니, 엄마 속상하게. 중학교 가기 전에 쌍꺼풀 할까?
어머, 쌍꺼풀 정도는 원래 이 나이 때 많이 해. 요즘 기술이 발전해서 레이저로 한 번 싹 긋기만 해도 된다니까. 그런데 당신 피티 제대로 받고 있는 거 맞아? 뱃살이 왜 그대로야.
당연하지. 나중에 유명해지면 과거 사진 막 뜨고 그럴 텐데, 어릴 때부터 쭉 관리해줘야지.
유치 다 갈고 나면 바로 교정도 시키고. 사실 화면 잘 받으려면 얼굴형이 제일 중요하거든.
당신 어디 가? 씻게?
채리야, 저기 나오는 거 봐봐. 경호는 이 동네 도둑 아저씨를 잡았대요.
도둑 아저씨네 가게가 잘 안 돼서 임대료도 못 내고 고생하다가 결국 경호네 빌라에서 비싼 반지를 훔쳤는데, 그걸 경호가 잡아서 처리했대. 마침 학원 다녀오던 길이라 긴 칼이 있었는데 그걸로 이렇게 싹, 싹. 경호 멋있지? 우리 채리도 저렇게 할 수 있지? 나쁜 아저씨들 싹, 싹.
그럼. 나쁜 아저씨들만 죽여야 되는 거야. 엄마가 정해주는 사람만. 채리는 엄마 말 잘 듣는 착한 딸이니까.
맞다, 우리 채리 우슈 학원도 다닐까? 그럼 네가 싫어하는 피아노 레슨은 그만 다니게 해줄게. 어때?
우슈는 중국 무술이야. 왜, 중국 영화 보면 대나무 위로 날아다니고 하잖아, 여배우들이.
마침 이 앞에 생겼더라고. 중국 배우들은 어릴 때 많이들 배운다더라. 예쁘잖아, 그림이. 나중에 영화 찍고 할 때 중국도 진출할 수 있고. 너 요즘 중국어는 잘 배우고 있지?
그 학원은 계속 다녀야지. 엄마가 오늘 원장님이랑 얘기 다 했어. 우리 채리가 요즘 스트레스 많이 받는 것 같다고 원장님이 걱정이 많으시더라.
채리, 선생님한테 이상한 얘기 하고 그랬다며. 죽고 싶다고.
엄마는 다-아아- 알아요.
괜찮아. 많이 힘들면 그럴 수 있지. 엄마도 채리가 그랬대서 정말 너무 속상했거든.
그래서 엄마가 우리 채리 가지고 싶다던 한정판 히어로 콜라보 아이패드 사놨어. 미국에서 아마 다음 주쯤 배송 올 거야. 어때, 우리 딸 이제 좀 신나?
그러니까 채리 너 이제부터는 힘들면 엄마한테만 말해야 해, 다른 사람들한테는 그런 얘기 절대, 절대 하지 말고.
다른 사람들이 우리 채리 이상하게 보잖아. 채리 너 그랬으면 좋겠어? 사람들이 너 이상하게 보고 막 미워했으면 좋겠어? 아니지, 우리 채리 사랑받고 싶지? 다들 널 좋아했으면 좋겠지? 그렇지?
그래. 가서 애들한테 자랑해. 핸드폰은 딱 이십분만 가지고 놀고 엄마한테 반납해야 한다.
아유, 착한 우리 딸. 내 새끼. 예뻐 죽겠다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