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은빈 Jan 18. 2021

[소설] 파우치

짧은 소설


⠀⠀⠀
그는 내 파우치 속에서 걸어나왔다.


파우치는 자연주의를 컨셉으로 내세우는 화장품 브랜드에서 사은품으로 받은 녹색 면 재질로 적절히 세월의 때가 묻어 있는 평범한 물건이었다.

립스틱만한 작은 크기지만 아무튼 인간 형태의 무언가가 갑자기 튀어나올만한 미스테리어스한 사물로는 보이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책상에 던져놓은 파우치의 지퍼가 열리는 소리에 무심코 모니터 화면에서 눈을 떼고 파우치를 바라본 순간, 그가 나타났다.

고깔콘 크기의 녹색 모자를 쓰고 녹색 옷을 입고 녹색 신발을 신은, 인간 아이의 모습을 꼭 닮은 그는 낑낑거리며 파우치에서 기어나오다가 기어코 파우치를 툭, 쓰러트렸다.

와르르, 내용물이 쏟아졌고 그는 옷을 툭툭 털어내더니 바로 서서 나에게 소리를 질렀다.


“야! 이 더러운 놈아!”


그 광경을 지켜보며 매일 야근을 해서 내가 드디어 돌아버렸구나, 앗, 혹시 나도 모르게 과로사로 이미 죽은 건 아닐까, 같은 생각을 하며 얼어있던 나는 사무실 의자를 힘차게 밀어내며 벌떡 일어났다.

죽은 건 아닌 모양이다, 부딪힌 다리가 아픈거 보니.


그나저나 이 쪼그만 게 뭐라는 거야.


“아니, 더럽다니.....요? 당신 뭐....에요?”


“뭐긴 뭐냐, 파우치의 요정이지.”


“아니 그게 무슨 개....소리세요?”


허리에 손을 올리고 당당한 포즈로 나를 바라보는 작은 인간의 말을 들으며 나는 생각했다.

아무래도 죽은건가? 꿈인가? 역시 미쳐버린 건가.

이래서 선배들 말을 들었어야 했는데. 이렇게 일하다 언제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을지도 모른단 말을 믿었어야 했는데! 억울한 내 인생, 아직 이비자도 못 가봤는데!


“야, 쓸데없는 생각 하지마라. 너 안 죽었고, 미친 것도 아니야. 도저히 지켜볼 수가 없어서 내가 참다 참다 나온 거라고.”


“네......?”


뒤로 슬금슬금 물러나 멀찍이서 이야기하자 파우치의 요정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너 말이야, 너무하다고 생각하지 않냐? 저기 넣어놓은 화장품들이 지난 300일간 한 번도 안 바뀐 거 알고 있냐? 안 쓰면 버리라고! 그리고 대체 다 말라비틀어진 물티슈며 영수증 구긴 건 왜 파우치에 넣고 다니는 건데?

아니 무엇보다, 제발 파우치를 좀 세탁하지 않을래? 저 더러운데서 몇 년간 살다가 내가 나이에 맞지 않게 다 늙은 걸 좀 보라고! 이 꼬질꼬질한 모자를 보란 말이야!”


자세히 살펴보니 작은 인간의 모자며 옷, 신발은 헤지기 직전에, 엄청나게 더러웠다.

와르르 쏟아진 내용물 중에는 심지어 한 쪽을 잃어버린 줄 알았던 귀걸이부터 오래 전에 딱 한 번 간 카페의 커피 쿠폰, 취해서 찍은 폴라로이드 사진도 있었다.

게다가 아이섀도우가 깨진 건지 은색으로 반짝이는 펄이 조금씩 묻어있었고 화장품들은 죄다 로고며 인쇄된 면이 지워진 채였다.

아니, 저게 언제 저렇게 된거지?


이 아이라이너는 보너스를 받고 큰 마음먹고 백화점에서 구입한 거고, 저 거울은 소중한 친구에게 선물받은 거.

생각해보니 파우치는 이 회사에 합격하고 인생 첫 취직을 자축하며 화장품을 싹 바꿀 때 받은 거였다.

하지만 그 뒤로는, 생각해보니 한 번도 신경써본 적이 없었다.

삼년차가 되면서는 회사와 집을 오가는 일밖에 없었으니 하릴없이 가지고 다니는 쓸데없는 것들이 늘어나고 조금씩 낡아가기만 한 셈이었다.

파우치를 빤다니, 그럴 겨를이 있으며 잠을 더 잤지.


“그래, 무슨 생각 하는지 잘 보이는데, 그게 이상하다고, 그게. 내가 처음 널 따라왔을 때 넌 그런 인간이 아니었단 말이야. 화장을 하고 말고는 전혀 상관이 없어. 그치만 자고, 씻고, 먹는 건 해야 할 거 아니냐고. 적어도 니가 뭘 하고 어떻게 사는진 자각하고 있어야 할 거 아니야, 인간. 너 그러다가 진짜....”


진짜? 진짜 뭐?

눈이 동그래져서 듣는데 이상한 요정이 입을 다물고 구겨진 영수증을 발로 툭, 차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집에 가자. 이제 이건 좀 버리고 말이야. 어차피 녹색은 질렸다고.

가는 길에 파우치 하나 새로 사는 건 어때? 기왕이면 빨간색으로 말이야. 요즘은 빨강이 좋더라. 새로 산 파우치에는 꼭 필요한 것만 넣고 다니는 거야.

그러면 내가 매일 깨끗하게 정리하고 깔끔하게 닦아줄게. 어때?”


마다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꽤 수상하지만 조금 귀여운 자칭 파우치의 요정과 함께, 나는 새로운 파우치를 찾아, 그 속에 담아 넣을 무언가를 찾으러, 그렇게 밤의 회사를 떠났다.




이번 주말은 예전에 써둔 짧은 소설을 올립니다. 별 뜻은 없고, 파우치가 더럽길래 썼습니다. 커버는 지난 달에 구조했던 아기 고양이, 홍차입니다.







이전 04화 [소설] 길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