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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은빈 Feb 05. 2021

[소설] 심심

짧은 소설


⠀⠀⠀


음, 일단,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어. 



처음 네게 연락했을 때만 해도 일이 이렇게 되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으니까 말이야. 


그러니까 내 말은, 네가 아까 내게 말한 것처럼 지금 이 상황이 마치 내가 전부 꾸민 것 같이 보이겠지만, 계획적인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절대로그렇지 않다는 거야. 물론 이제 와서 이렇게 말해봤자겠지만.


사실은 그냥 술이나 마시고 싶었어. 지난 달 출장을 다녀오며 산 위스키를, 그간 너무 바빠서 입 한 번 못 대고 있었던 그 술을 드디어 마셔버리고 싶었고, 내일부터 꽤 긴 연휴가 시작되고, 마침 날씨도 좋고, 그래서 아무 생각 없이 널 불러낸거라고. 그래, 말하자면 심심해서. 


그 뿐이야. 업무 미팅으로 만났지만 어차피 성사되지 못한 건이라 다시 볼 일도 없을 것 같고, 너나 나나 혼자 사는데다, 마침 집도 멀지 않고, 사실 딱 한 번의 미팅이었지만 그 때 네 몸에 딱 맞던 여름용 수트와 부드러운 네이비색 로퍼가 어쩐지 인상적이어서, 짧은 머리칼과 은색 안경테가 꽤 매력적이어서, 다시 만나고 싶었어. 그래, 그런 이유도 물론 있었지만.


너와의 키스도 나쁘지 않았어. 방금 마신 위스키 향이 미묘한 체취와 섞여 약간 불쾌한 느낌이긴 했지만, 좀 급하긴 하지만 이대로 자버리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그렇게 생각할 정도는 되었어. 물론 사무실에서의 단정하고 차분한 이미지는 어디로 던져버렸는지 후드 집업에 반바지를 입고 온 네가 조금 당황스럽긴 했지만 말이야. 그래서 네 손이 내 허리춤에서부터 슬슬 올라오는 것도 그냥 두고보고 있었잖아.


그러니까 내가 화장실을 간 사이에 네가 그 문을 열지만 않았어도 우린 그럭저럭 괜찮은 밤을 보냈을지도 모르고 아마도 넌 아직 살아있었을 거라는 말이야.


화장실에서 나와서 내가 얼마나 당황했는지 넌 알까? 조용히 네게 다가가 전기충격기를 사용하기는 했지만 찰나의 순간 내가 얼마나 치열하게 고민했는지. 그냥 변명을 해볼까, 하고 말이야. 


하지만 그러기에는 말야, 네가 아는 사람이 너무 많고, 또 말이 너무 많고, 결과적으로 내가 잃을 게 너무 많더라고. 그러니까 결국 너와 나 사이에서 저울은 필연적으로, 내 쪽으로 기울 수 밖에 없었어. 그게 설사 네 생명과 내 명예 사이에 놓인 저울이라고 해도 말이지. 그러게 왜 그 문을 열었니?


호기심이 고양일 죽인다잖아. 자업자득이라고 생각해. 

물론 그건 나에게도 해당되는 말이기도 하지. 그간 잘 숨겨온 비밀을 이렇게 쉽게, 허무하게 들키고 말다니. 아까운 술이 다 깨버렸잖아. 정말이지, 오늘 내가 지나치게 심심하지만 않았다면 절대로, 너에게 먼저 연락을 하고 집까지 불러들일 일은 없었을 텐데 말이야.


어쩌면 고양이를 죽이는 건 호기심이 아니라 심심일지도 몰라. 넌 어떻게 생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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