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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은빈 Apr 11. 2021

[소설] 상어, 소금, 거울, 우주 (1)

짧은 소설




  김은 변기 뚜껑 위에 두 팔을 포개어 얼굴을 얹고 잠들어 있습니다. 화장실은 이 건물에서 김이 가장 좋아하는 장소입니다. 신축 건물이라 구석구석 깨끗하고, 바닥의 타일은 하얗게 반짝이며, 상큼하고 인공적인 과일의 향이 풍기고, 누가 선곡한 것인지 알 수 없는 클래식 음악이 잔잔하게 흘러나옵니다. 


   여덟 시에 출근해 컴퓨터의 전원을 켜고 사내 메신저에 로그인한 뒤, 구내식당으로 아침식사 겸 해장을 하러 가는 팀장과 부장의 숙취 가득한 얼굴에 방긋 웃어주고는, 김은 화장실 맨 끝 칸에 들어가 문을 걸어 잠그고 팔 센티미터 굽의 까만 구두를 가지런히 벗어놓은 다음, 휴지 몇 장을 깐 화장실 바닥에 주저앉아 무릎을 끌어안고 웅크립니다

  휴대전화의 알람을 삼십 분 후인 여덟 시 사십 분에 맞추어 놓고, 김은 잡니다. 문득, 담배를 피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랑랑은 상하이의 한 승강기 안에 서 있습니다. 현기증이 일만큼 빠르게, 그리고 심해의 고래처럼 묵직하게 움직이는 승강기는 건물의 가장 높은 층에 다다르자 멈추어 서고, 랑랑이 발을 뻗자 바닥에는 부드러운 붉은색 카펫이 깔려있습니다. 


   랑랑은 어두운 복도를 조명 대신 푸르게 비추는 오른편의 수조를 보며 천천히 걷습니다. 커다란 수조 안을 헤엄치는 것은 모두 상어들입니다. 작은 것은 랑랑의 팔뚝만 하고, 큰 것은 넓적다리만 합니다. 

  크기는 작지만 상어의 이빨은 날카롭고 찢어진 입은 섬뜩하여, 랑랑은 민소매 아래 드러난 팔뚝에 오소소 소름이 돋는 걸 느낍니다. 그러나 그대로 걷고, 마치 땅 속에서 울려 퍼지는 것만 같은 둔탁한 저음이 둥, 둥, 들려온다 싶었을 때, 어디선가 검은 수트를 입은 남자가 나타나 고대 성문처럼 두껍고 무거운 문을 천천히 열어줍니다. 

   검은 문이 열리자 녹색 레이저 조명이 랑랑의 시선을 어지럽히고, 전자음악의 비트가 랑랑의 귀에 재빠르게 날아와 꽂힙니다. 소리 없이 걷던 랑랑의 구두가 클럽의 대리석 바닥을 때리며 또각, 제법 큰 소리를 내지만, 그 소리는 누구의 귀에도 들리지 않고 그대로 음악에 흡수되어 사라집니다.      



   제나는 애인과 거울처럼 마주 앉아 점심 식사를 하고 있습니다. 식탁 위에는 한 바구니의 붉은 체리와 유리 볼에 담긴 크림치즈, 커피와 홍차, 그리고 노릇한 토스트가 몇 장, 또 단단한 그릭 요거트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제나가 나무 티스푼으로 하얀 요거트를 푹 떠낼 때 애인은 홍차의 향을 깊게 들이마시고, 눈이 마주치자 제나와 그녀의 애인은 당연하다는 듯 가볍게 키스를 한 뒤, 말없이 요거트와 체리와 토스트를 먹습니다. 


   애인의 입술에 요거트가 약간 묻자, 제나는 깔깔 웃다가 방에 들어가 카메라를 가지고 나옵니다. 그리고 차-알칵 소리를 내며 애인을 찍고, 애인은 헝클어진 갈색 머리를 손으로 빗어 내리며 잠깐, 잠깐만, 다급하게 말하지만 목소리에는 웃음기가 가득합니다. 

   제나는 계속해서 애인의 짙은 바다색 눈동자에 떠오른 아득한 행복을 차-알칵, 찍습니다.      



   차-알칵, 소리에 랑랑은 휙, 뒤돌아봅니다. 카메라를 들고 있는 남자는 뒤돌아 본 랑랑의 얼굴을 향해 다시 한번 찰칵, 소리와 함께 플래시를 터트립니다. 잠깐 눈을 감았다 뜬 랑랑이 남자를 향해 말합니다.

   - 찍지 말아요.

   남자가 말없이 자리를 뜨려 하자 랑랑은 남자의 팔을 잡습니다.

   - 사진, 지워요.

   남자는 어이없다는 듯 랑랑을 빤히 바라봅니다. 

   - 내 말 안 들려요? 내 사진 말이에요.

   여전히 말없이, 남자는 랑랑의 옆에 서더니 카메라의 화면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정지된 이미지 속 하얗게 둥둥 떠 있는 랑랑의 얼굴을 삭제하더니, 그대로 돌아섭니다.

   - 잠깐, 하나 더 있잖아요.

   랑랑이 급하게 남자를 잡으려다 남자의 카메라에 달린 스트랩을 잡아채고 맙니다. 남자가 순식간에 랑랑의 손을 쳐내면서 뱉듯이 말합니다.

   - 씨발, 왜 카메라를 건드려. 알았어, 지운다고.

   남자가 욕을 내뱉으며 작은 기계의 버튼을 몇 번 누르더니 랑랑 앞에 카메라의 화면을 휙, 거친 동작으로 내보이며 말합니다.

   - 됐지? 


   랑랑이 무언가를 확인하거나 대답을 하기도 전에 남자는 성큼성큼 걸어 사라집니다. 군화 같은 가죽 워커를 신은 남자의 무자비한 발걸음에 랑랑은 짓밟힌 듯 기분이 나빠집니다. 

   남자가 쳐낸 오른쪽 손목을 왼쪽 손으로 주무르며, 랑랑은 주변을 둘러봅니다. 그때 디제이가 갑자기 음악의 볼륨을 높이고, 클럽 안의 모든 사람들이 리듬에 맞추어 발을 구르며 거칠게 함성을 질러댑니다. 움직이지 않는 것은 오로지 랑랑뿐.     



   함성 소리에 소스라치며 일어난 김은 재빨리 휴대전화의 알람을 끄고 시간을 봅니다. 여덟 시 삼십 분, 예정된 시간입니다. 변기 뚜껑을 짚고 일어나 어느새 엉덩이까지 말려 올라간 원피스 자락을 끌어내리고는 한쪽에 벗어놓은 구두에 발을 밀어 넣으며, 김은 내가 알람으로 이런 음악을 설정해놓았던가, 갸웃거립니다. 분명 한 번도 들은 적이 없는 멜로디이지만 어쩐지 익숙하다고도. 그러나 어떤 노래인지는 도통 알 수가 없다고.


   거울 앞에서 살짝 헝클어진 머리를 매만지는데 화장실의 유리문이 열립니다. 거울을 통해 디자인팀의 신입 사원을 본 김이 고개를 살짝 까딱하며 인사하자 환하게 웃습니다. 

   - 와, 대리님, 원피스 예뻐요.

   - 고마워요. 

   신입 사원이 생긋 웃더니 두 번째 칸으로 막 들어가려다 말고 다시 김을 향해 다가옵니다.

   - 대리님, 밴드 공연 좋아하시죠? 혹시 이번 주 토요일에 시간 있으세요?

   뜻밖의 질문에 당황한 김이 어, 으응? 아, 네, 대답 아닌 대답을 하자 신입 사원이 그럼 저랑 공연 보러 가실래요? 제가 좋아하는 밴드가 공연하는데 친구들이 시간이 안 된대요, 빠르게 말하고, 김은 이번에도 어? 어, 그래요, 더듬거리고 맙니다. 

   - 그럼 제가 이따 메신저로 시간이랑 장소 알려드릴게요.


   신입사원이 두 번째 칸 너머로 쏙 사라지고 나서, 머릿속이 새하얘진 김은 잠깐 심호흡을 하며 숨을 고르고는 이윽고 화장실 문을 열고 나옵니다.     



   - 누구세요?

   외치며 걸어간 제나가 문을 열자마자 세상이 온통 하얗게 변합니다. 머리부터 온통 흰 가루를 뒤집어쓴 제나가 콜록거리는 사이 중년의 남자와 여자가 커다란 종이봉투를 들고 거실로 들이닥치더니 제나와 애인의 텔레비전에, 소파에, 커피 잔에, 고운 입자의 소금가루를 마구 뿌립니다. 

  제나의 애인이 재빨리 그들을 막아서지만 중년 남녀는 우악스럽게 애인을 밀치고 들어와 거실 한복판에 무릎을 꿇더니 커다란 목소리로 기도를 하기 시작합니다. 오 하느님 아버지, 이 저주받을 동성애자들을 구원해주시고, 이들의 마음에서 사악한 악마를 몰아내시어, 부디 이들을 용서하시고, 


   - 꺼져, 꺼지라고! 남의 집에서 뭐하는 짓이야!


   제나의 애인이 거실에 서서 소리를 지르는 동안 머리칼과 얼굴에서 소금을 털어낸 제나가 식탁 위의 휴대전화를 집어 들더니 어디론가 전화를 겁니다. 

   전화기의 액정에 흰 가루가 점점이 흩어지며 제나의 지문을 어지럽게 남기고, 기도소리는 점점 커지고 절박해지며, 마침내는 비명에 가까운 형태가 되어, 제나의 애인이 울먹이며 절규하는 소리와 뒤섞입니다.     



   거센 함성과 고막을 찢을 것만 같은 음악 속에서 두리번거리던 랑랑은 클럽 오른쪽, VIP룸으로 향하는 복도를 발견하고 걷다가, 잠시 멈추어 서더니 화장실의 문을 열고 들어갑니다. 천장까지 검은 대리석이라 마치 검은 우주 속으로 걸어 들어온 것만 같은 기분입니다. 

   랑랑은 어두운 거울 속을 뚫어져라 바라봅니다. 바닥에, 천장에, 또 앞에, 뒤에. 거울 속에 비치는 랑랑의 모습은 너무나 많고 많아, 랑랑은 무엇이 자신의 진짜 얼굴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갑자기 음악 소리가 커진다 싶더니 화장실의 문이 열리고 한 무리의 여자들이 쏟아져 들어옵니다. 랑랑의 곁을 스치는 늘씬한 여자들, 그들의 얼굴에서 곤충의 얇은 날개처럼 팔락이는 인조 속눈썹, 그 아래 드리우는 작고 깊고 검은 그늘. 

   랑랑은 들고 있던 클러치 백에서 담배를 찾아내 한 개비를 입에 물고 다시 라이터를 찾지만, 아무리 가방을 뒤져도 라이터는 보이지 않습니다. 당황한 랑랑이 지나가는 여자 두 명에게 불 좀 빌릴 수 있나요, 물어보지만 그들은 모두 아니요, 짧은 대답만을 남기고 랑랑을 스쳐지나 각각 화장실 첫 번째 칸으로, 또 문 밖으로 사라집니다. 

   화장실의 한쪽 벽면에는 기다란 거울 아래 늘어선 기다란 대리석 세면대가 있고, 프랑스 코스메틱 브랜드의 라벤더 향 핸드워시와 같은 향의 핸드로션, 그리고 바구니에 담긴 두꺼운 종이 타월과 백합 한 송이가 꽂힌 유리 화병이 위와 같은 순서대로 반복되어 쭉 늘어서 있지만, 그 어디에도 라이터나 성냥은 없습니다. 


   랑랑은 립스틱 자국이 선명하게 남은 담배를 입술 사이에서 빼내 검은 바닥을 향해 던져버리고, 담배는 소리 없이 아래로, 아래로, 추락합니다.       




2편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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