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은빈 Apr 11. 2021

[소설] 상어, 소금, 거울, 우주 (2)

짧은 소설



    규정상의 출근 시간은 아직 삼십 분이나 남았지만 이미 칸칸이 직원들로 빼곡하게 들어찬 커다란 사무실의 복도를 가로질러, 김은 제 자리로 돌아와 앉습니다. 

   삼십 대에 들어서고부터는 온 몸이 놀랍도록 건조해져, 손을 씻고 나면 금세 피부가 바싹 말라 갈라지는 기분입니다. 책상 위의 라벤더 향 핸드크림을 짜내어 양 손에 마사지하듯 바르며 김은 내친김에 목을 좌우로 꺾어 스트레칭을 하고 이내 오늘의 업무를 시작합니다.


   점심시간이 되어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사내 메신저의 알림 표시가 깜빡입니다. 꼭 이 시간에 이런단 말이지, 짜증이 나 마우스를 거칠게 클릭해보니 아침의 신입 사원입니다. 

   - 대리님, 토요일 네 시에 홍대입구역 9번 출구 앞에서 뵈어요. 점심 맛있게 드세요. 

   다정한 활자 옆에는 속이 꽉 찬 까만 하트가 붙어 있습니다. 김의 얼굴에 슬며시 웃음이 번집니다. 메신저 창의 오른쪽, 까만 재킷과 흰 정장 블라우스를 갖추어 입었지만 학생 티를 다 벗지 못한 앳된 얼굴이 파란 배경의 네모난 증명사진 속에서 어색하게 웃고 있습니다. 

   김은 증명사진 옆 박, 수, 정, 세 글자를 몇 번 반복해 되뇝니다. 그때입니다.

   - 김 대리, 오늘 점심은 순댓국 어때? 

   왼쪽 어깨 가까이에서 들려오는 이 부장의 익숙한 목소리에 김은 얼굴의 웃음기를 싹 지운 채 자리에서 일어나며 네, 짧게 대답합니다.     



   네, 네. 빨리 와주세요. 제나가 조용하지만 단호하게 말하고 전화를 끊습니다. 

   제나의 애인은 여전히 울고 있고, 중년의 남자와 여자는 발작하듯 기도문을 읊고 있습니다. 기도라고는 하지만 사실상 저주와 구분하기 힘든 단어들을 들으며, 제나는 열린 문에 기대어 머리가 반쯤 벗어진 남자의 앙상한 팔과, 얼굴에 주근깨와 기미가 촘촘한 여자의 보기 싫게 빛바랜 금발을, 그리고 그들을 뒤에서 비추는 정오의 햇살을 봅니다. 

   거실은 온통 하얀 소금으로 뒤덮여 엉망진창이고, 통유리 창을 통해 쏟아져 들어오는 빛 속에서 공중에 흩어진 고운 소금의 입자가 반짝이며 잔잔한 물결을 그리고 있습니다. 식탁 위 붉은 체리 바구니에 소금이 흩어져 있는 모습이 사뭇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찰나, 두 명의 경찰관이 들어섭니다. 

   - 신고받고 왔습니다. 

   제나는 말없이 손을 들어 거실에 반쯤 엎드린 채 중얼거리는 남녀를 가리킵니다. 끅끅대던 애인이 달려와 제나에게 안깁니다.

   두 경찰관이 남녀를 일으켜 세우자 그들은 기도를 뚝 멈추고 문가를 향해 좀비처럼 비틀비틀 다가옵니다. 그러더니 제나에게 안긴 애인의 등과 제나의 얼굴을 향해 발악하듯 마지막 저주를 던진 후 쏜살같이 뛰어 사라지고, 경찰관 둘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그들을 쫓아갑니다. 


   제나는 어린 애인의 가냘픈 등을 어루만지며 어지러이 남겨진 침입의 흔적을 눈으로 좇다가, 이내 애인을 부축해 식탁 의자에 앉히고는 카메라를 들어 마치 총구처럼 거실로 겨누고 포커스를 조정합니다.     



   셔터를 여러 번 누르긴 했지만 엄지손가락만 한 작은 카메라를 손안에 감추고 찍은 것이라 과연 사진이 제대로 나와 줄는지, 랑랑은 걱정하고 있습니다. 

   담당 웨이터에게 지폐를 몇 장 찔러주고 나서 VIP룸의 문을 열었을 때 남편은 마침 요즘 만나는 애인과 키스를 하고 있었습니다. 남편의 친구들 역시 키가 크고 앙상한 모델들과 비슷한 자세로 엉겨 있었고, 모두 술이나 약에 지나치게 취해, 랑랑이 문을 열어젖혔는데도 여자들과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아 오히려 랑랑이 당황하고 말았습니다. 

   랑랑의 남편은 랑랑과 눈이 마주치자 제 무릎 위에 앉아 있던 애인의 허리를 감싸듯 들어 올려 오른쪽에 앉히더니 랑랑을 향해 손짓을 했습니다. 


   - 어, 여보, 들어와. 


   그건 랑랑이 전혀 예상치 못했던 반응이었습니다. 잠깐 고민하던 랑랑이 성큼성큼 걸어가 테이블의 술잔을 들어 남편의 얼굴에 끼얹었을 때에야, 남편은 랑랑이 원했던 반응을 보여주었습니다. 


   전형적인 액션과 리액션에 어쩐지 만족스러워진 랑랑은 이내 돌아서서 나왔고, 남편은 펄펄 뛰면서도 차마 그 꼴로 룸을 나설 수는 없었는지 랑랑을 쫓아오지 않았습니다. 


   고민은 길었지만 주문은 손쉽게 이루어진 작디작은 초소형 카메라, '몰카' 따위의 태그가 붙어있던 그것을, 꺼림칙한 생명줄처럼 한 손에 꼭 쥔 채 랑랑은 길고 긴 복도를 걸어갑니다. 

   왼손으로 끝없이 이어지는 푸른 상어 수조를 토닥이듯 어루만지며, 천천히, 소리 없이 걷습니다. 상어들은 바닥에 가라앉은 채 랑랑을 바라보거나, 혹은 랑랑의 손이 닿는 수조 옆을 스칠 듯 가까이 헤엄칩니다. 


   랑랑은 복도 중간쯤, 아니 어딘지 알 수 없는 지점에 문득 멈추어 섭니다. 빛도 소리도 모두 차단된 복도에는 어떤 사람도 존재하지 않고,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으며, 다만 거대한 수조의 어슴푸레한 물빛이 상어의 움직임에 따라 일렁이며 랑랑의 얼굴을 비출 뿐입니다.     



   양치를 끝낸 김은 점심시간 종료까지 십오 분을 남기고 자리에 돌아와 앉습니다. 

   맞은편 자리의 오 과장이 걸 그룹의 뮤직비디오를 보고 있습니다. 옆 팀의 이 대리가 오 과장의 뒤에서 얼굴을 들이 밀고, 두 남자는 함께 모니터를 보며 입을 헤 벌립니다. 김은 가방에서 이어폰을 꺼내 귀를 틀어막고 책상에 엎드립니다. 

   나 말고는 아무도 없는, 아무도 나를 보지 않는, 또 아무에게도 내가 보이지 않는, 그런 곳에 있고 싶다고 김은 생각합니다. 그러나 오직 화장실 마지막 칸만큼의 고독이 이 사회 속에서 자신이 누릴 수 있는 자유의 최대치임을 김은 알고 있습니다. 고작 그 한 뼘. 

   이제는 지긋지긋해진 어떤 감정이 또다시 스멀스멀 기어오르는 찰나 책상을 울리는 진동이 김의 뺨에 고스란히 전달되고, 김은 고개를 들어 휴대전화의 네모난 화면을 봅니다. 

   


   제나가 애써 경쾌한 목소리로 통화를 하는 동안 애인은 남아 있는 침입의 흔적을 찾아내려 거실을 구석구석 살피고 있습니다. 

   둘이서 발자국과 소금을 닦아내는 데 꼬박 반나절을 보냈는데도 여기저기서 흰 가루는 자꾸만 나타나고, 그때마다 애인은 울상이 됩니다. 제나는 애인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애인이 가장 좋아하는 식당에서 저녁식사를 하기로 했습니다. 


   - 거기 오늘 저녁에 갈 수 있대? 예약 안 찼대?


   응, 대답하며 제나는 표면에 살짝 묻은 소금을 털어내고 애인의 입 속으로 빨간 체리를 넣어줍니다. 

   톡, 과육이 터지는 소리가 나고 체리를 오물거리는 애인의 턱 밑에 손을 내밀자 애인은 체리 씨를 뱉어내더니 웃습니다.

   제나와 애인은 알고 있습니다. 아주 작고 사소하지만 결국 사랑을 이루는 요소는 바로 이런 순간들이라는 것을. 무엇도, 누구도 이 순간을 앗아갈 수 없다고, 그렇게 놔두지 않겠다고, 제나는 다시 한번 다짐합니다. 

 

   그리고 제나와 애인은 소금을 쓸어내듯 애써 슬픈 기분을 치우며, 가볍게 입술을 맞댄 뒤 손을 꼭 잡고 보드랍고 푸른 침대보가 깔린 그들의 침대를 향해 함께 걸어갑니다. 제나는 여전히 오른손에 체리 씨앗을 꼭 쥔 채입니다.     



   랑랑은 주차된 차의 운전석에 앉아 핸들에 머리를 대고 엎드린 채 남편이 청혼했던 홍콩의 호텔 바, 그 후덥지근한 바람과, 밤하늘에 별 대신 반짝이던 붉은 네온사인을 떠올리고 있습니다. 


  대학을 졸업한 뒤 이곳저곳을 전전하다 함께 창업한 회사가 중국의 IT붐을 타고 막 떠오르기 시작하던, 달콤한 예감을 차고 넘칠 만큼 누리고 있던 한 때. 

   잔뜩 긴장해 엉거주춤 무릎을 꿇고는 떨리는 손으로 반지를 내밀던 남편은 촌스럽지만 사랑스러웠습니다. 너무나 아득하게 멀리 떠내려가 마치 전생 같지만 불과 오 년도 되지 않은 일입니다.


   랑랑은 고개를 들고, 조수석의 가방에서 노트북을 꺼내 아직까지 오른손에 쥐고 있던 카메라를 연결합니다. 어둑한 조명과 룸의 인테리어 때문인지, 정지된 이미지의 특성 때문인지 남편과 애인의 나른한 표정은 실제보다 더욱 퇴폐적으로 보입니다. 

   화질은 좋지 않지만 얼굴을 알아보는 데는 큰 문제가 없는 사진 다섯 장을 꼼꼼히 뜯어보고 확대해가며 들여다보다가, 랑랑은 거칠게 노트북을 닫아버리고 맙니다. 남편은 이제 정신이 들었는지 아까부터 랑랑의 휴대전화를 시끄럽게 울려대고 있습니다. 


   랑랑은 양 발을 조여 오는 구두를 거칠게 벗어던집니다. 어찌 된 영문인지 손끝에 닿는 구두는 마치 물속을 헤매다 온 듯 축축하게 젖어있습니다.     




3편에서 계속됩니다.



이전 08화 [소설] 상어, 소금, 거울, 우주 (1)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