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소설
김은 편의점에서 구입한 비닐우산을 접으며 식당으로 들어섭니다.
비가 올 거라는 말은 없었는데, 하필 사무실을 나서자마자 소나기가 쏟아진 탓에 온통 엉망이 되었습니다. 어깨에 떨어진 빗방울을 털어내고 입구에서 남자 친구의 이름을 말하자 흰 셔츠에 까만 재킷을 입은 남자가 나서 김을 안내합니다.
식당은 조도가 낮고 테이블은 모두 칸칸이 독립되어 있어 마치 컴컴한 복도 같은 내부를 남자의 등을 따라 걷는 기분이 묘합니다. 그러니까, 일종의 기시감 같은 것, 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남자 친구의 낯익은 얼굴이 나타납니다.
- 피곤해 보인다.
맞은편에 앉는 김을 향해 남자 친구가 불쑥 말합니다.
- 어, 피곤해.
대꾸하는 목소리가 지나치게 싸늘해, 김은 스스로 말하고도 놀라고 맙니다. 하지만 남자 친구의 얼굴에는 어떤 표정의 변화도 나타나지 않고, 김은 내가 방금 이 말을 입 밖으로 내뱉어 전달한 것이 맞긴 한 걸까, 의구심이 생길 지경입니다. 혹은 그저 우리의 언어는 서로에게 아무런 영향도 미칠 수 없는 것, 그뿐인지.
불만과 권태를 깔고 앉은 채 음식을 먹습니다. 이 주 만에 보니 반갑네, 애써 즐겁다는 듯 말해보지만 남자 친구는 벌써 그렇게 됐나? 요즘 너무 바빠서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도 모르고 살아, 너는 야근 좀 줄었나 보네, 맥 빠지는 대답을 건네주고, 김은 아니, 요즘도 많지, 되받습니다.
주고받는 대화의 절반 이상은 함께 알고 있는 주변인들의 근황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대학 동기의 결혼식, 고등학교 후배가 개업한 가게, 직장 동료들의 불륜이 발각된 일, 짜증 나는 상사의 실수, 그리고 조카의 돌 선물 사이 어디쯤에서 김은 거슬리는 돌멩이 하나가 자꾸만 신발 속을 굴러다니며 발바닥을 괴롭히는 듯한 불편함을 느낍니다.
그때 남자 친구가 대뜸 말합니다.
- 다음 달에 부모님께 인사드리러 가자.
눈을 뜬 랑랑은 남편을 마주하고는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는 것을 느낍니다. 남편의 얼굴은 짐짓 걱정스러워 보이기도, 또 자못 인자해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랑랑은 그것이 몇 달 전 창업 초기 멤버이자 랑랑과 남편의 대학 동기를 일방적으로 해고할 때 남편이 지었던 표정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 걱정했잖아. 왜 전화를 안 받아.
이것 역시, 남편이 그 친구에게 했던 말과 똑같습니다. 랑랑은 생각합니다. 지금 내 얼굴에 떠올라 있는 표정 역시 당시 그 친구의 것과 똑같을까. 한 달 후에 아파트 옥상에서 몸을 던졌던 그 친구의 것과.
- 당신, 표정이 왜 그래. 그러지 말고 이거 좀 봐.
남편은 아직 침대에 누워 있는 랑랑의 곁에 자그마한 쇼핑백과 함께 걸터앉습니다. 그리고 짙은 푸른색 벨벳 상자를 꺼내어 랑랑에게 내밉니다.
- 내일이 우리 결혼기념일이잖아. 내가 당신 위해서 네 달 전부터 주문해놨다고, 전 세계에 딱 하나밖에 없는 거야.
- 어제,
랑랑이 남편의 말을 자릅니다. 최대한 유치하지 않은 방식으로 전하고 싶었는데, 고작 이런 거라니.
- 어제, 사진 찍었어. 당신.
남편이 상자를 내려놓더니 피식, 웃습니다.
- 그래서 어쩌겠다는 거야. 내가 끝나면 당신도 끝이야. 그리고 이따위 스캔들 별 이슈도 안 되는 거 알면서 왜 자꾸 어린애같이 굴어? 진정하고 잘 생각해봐.
- 잘 생각해봐. 그만한 남편감이 어디 있다고.
김은 휴대전화 너머 들려오는 친구의 목소리에 소리 없이 한숨을 쉽니다.
- 그래, 나중에 얘기하자.
전화를 끊고 김은 홍대입구역의 수많은 인파에 밀리다시피 걸어 지상으로 나옵니다. 토요일 오후의 찬란한 빛 속에 그 애가 서 있습니다. 까만 단발머리의, 수정.
- 대리님, 여기요!
환하게 웃는 뽀얀 얼굴을 보며 김은 사실 수정이 처음 입사하던 날부터 그 웃음을, 그 얼굴을 쭉 눈여겨봐왔다는 사실을 그제야 자각합니다.
공연이 열리는 라이브 클럽을 향해 걸으며 그 애에게 슬쩍슬쩍 가닿는 팔에 신경이 쓰이는 것은, 또 자꾸만 그 애의 머리칼을 만지고 싶어 지는 것은 어쩌면 아주 오래된 열망일지도 모른다고.
그래서 키가 작은 그 애가 공연을 보며 뛰고 춤추다가 갑작스레 목을 감으며 안겨왔을 때 김은 아주 자연스럽게 그 애의 등을 감싸 안았던 것입니다. 티셔츠 안으로 툭툭 불거진 등뼈가 고스란히 만져지는 그 애의 마른 몸에서는 언제나 그 애와 스쳐 지날 때면 풍겨오던 새콤달콤한 체리 향기가 피어오릅니다.
집으로 돌아와 반쯤 열려 있는 문을 보자 제나는 온몸에 퍼져 있던 나른한 술기운이 순식간에 달아나고 신경이 온통 곤두서는 걸 느낍니다. 제나에게 기대어 있던 애인이 고개를 들어 제나의 얼굴을 보고 제나의 시선이 향한 문 쪽을 봅니다. 애인은 공포에 질리고 제나는 힘을 주어 애인의 손을 꼭 잡습니다.
- 경찰에 전화 좀 부탁해.
제나는 애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덜덜 떨리는 손으로 가방에서 전화기를 꺼내는 걸 확인하고 조심스럽게 문을 엽니다.
어두운 벽을 천천히 짚어 스위치를 올리고 이윽고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는 순간 제나는 할 말을 잊습니다. 집 안은 흰 가루와 부서진 가전제품의 잔해로 엉망입니다.
애인과 함께 골랐던 새 소파는 칼질을 당해 속을 처참하게 드러내고 있고, 체리는 알알이 떨어진 채 밟히고 으깨어져 있습니다. 여기저기 금이 가고 깨진 통유리 창으로 싸늘한 밤바람이 새어 들어와 바닥에 흩어진 소금에 기묘한 무늬를 그리고 있습니다.
다리가 부서진 탁자와 바닥에 떨어져 깨진 텔레비전과 찢긴 옷가지들이 함부로 널브러진 가운데, 집 안에 온전한 물건은 못 보던 커다란 십자가뿐입니다.
십자가는 침입과 장악을 증명하듯, 거실 한복판에 높게 쌓인 소금의 산 위에 당당하게 꽂힌 채 위용을 뽐내고 있습니다.
제나는 신발을 벗고 집 안으로 걸어 들어가며 부드럽게 발바닥을 감싸는 고운 소금을 마치 눈처럼 꾸욱 꾸욱 밟습니다. 흰 벽에는 커다랗고 붉은 글씨로 성경의 한 구절과 이곳을 떠나라, 라는 말이 쓰여 있습니다.
제나는 거실에 서서 부서진 카메라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발끝을 소금 산 아래쪽에 대고 아주 약간 힘을 주어 밀어냅니다. 커다란 십자가가 천천히 제나의 발등을 향해 기울어지고 제나는 무언가 툭, 쓰러지는 소리를 듣습니다.
랑랑은 달리고 있습니다. 계기판은 시속 백팔십 킬로미터를 가리키고 있고, 도로는 텅 비어 마치 우주를 날아가는 듯합니다. 남편이 애지중지하는 스포츠카를, 박살 낼 기세로 달립니다.
속도를 늦추지 않고 그대로 오른손을 뻗은 랑랑은 보조석에 얌전히 놓인 가방을 뒤져 담배를 찾습니다. 문제없이 라이터를 찾아 입에 문 담배에 불을 붙이고, 랑랑은 드디어 연기를 후, 내뿜습니다.
아주 오랫동안 담배를 피우지 못했던 것 같은 느낌입니다. 매캐한 후련함이 랑랑의 몸 구석구석 퍼지고, 창문을 살짝 열자 새벽의 청량한 바람이 불어와 담배 연기를 멀리 날려 보냅니다.
남편이 옷을 갈아입고 집에서 나간 후 랑랑은 침대에서 일어나 작은 벨벳 상자를 열어보았습니다. 랑랑이 좋아하는 푸른 보석이 박힌 아름다운 백금 시계였습니다.
남편은 아주 오래전부터 랑랑이 시계를 찬 모습을 유난히 좋아했지요. 스물한 살의 랑랑은 싸구려 가죽 시계를 차고 있었고 같은 대학에 다니던 스물두 살의 남편과 사랑에 빠졌습니다. 둘은 늘 두 손을 꼭 붙잡고 파티에 가거나 인터뷰를 했습니다.
남편은 랑랑을 존경한다고 말했습니다. 어느 순간 그 존경은 사랑이나 애틋함이 제거된 무언가로 변질되었지만, 남편이 랑랑을 필요로 한다는 것만은 아마 시계에 박힌 보석의 단단함만큼이나 변하지 않는 사실일 겁니다. 남편의 온갖 부정을 모른 척 눈감아주었던 건 아마 그 때문이었지만.
랑랑은 흘낏 시간을 봅니다. 이제 몇 시간 후면 랑랑이 누리던 한 때의 달콤함은 전형적인 방식으로 종지부를 찍게 될 것입니다. 다 끝났다, 생각하며 랑랑은 담배를 창밖으로 던집니다.
그리고 어느새 랑랑은 상어들과 함께 헤엄치고 있습니다. 몸은 가볍고, 또 자유롭습니다. 미지근한 물이 랑랑의 뺨을 간질이고, 중력의 무거움을 완전히 벗어버린 랑랑이 두 팔을 그 어느 때보다 더 부드럽게 앞을 향해 내 뻗을 때, 랑랑은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어두운 클럽 복도의 랑랑을 발견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여자의 얼굴을 하고 이쪽으로 간절하게 손을 내밀 어보지만 이내 유리벽에 가로막히고 마는 저쪽의 랑랑이 너무나 가여워서, 랑랑은 상어들과 함께 벽을 부숴버리기로 합니다.
하나, 둘, 셋. 상어 떼가 한꺼번에 돌진하자 유리벽은 산산조각 나고, 이쪽의 랑랑은 저쪽의 랑랑과 하나가 되며 푸른빛 가득한 물속을 향해 헤엄쳐 나아갑니다.
김이 불현듯 잠에서 깨자 화장실은 온통 물바다가 되어 있습니다. 배수관이 터졌는지, 혹은 어딘가에서 물이 새는지 김이 깔고 앉았던 휴지는 물론이고 속옷과 원피스 자락, 벗어둔 구두까지 온통 축축합니다.
짜증을 내며 일어나 휴지로 구두를 닦고 원피스에서 뚝뚝 떨어지는 물을 쥐어짜 냅니다. 검은색이라 티가 나지 않는 것이 다행이라고 스스로를 위안하며 휴대전화를 들어 시간을 보자 이미 아홉 시입니다. 알람도 듣지 못하고 여기서 이 자세로 오십 분이나 자다니, 김은 놀랍니다. 일주일에 서너 번은 화장실 마지막 칸을 찾지만 이런 건 처음입니다.
화장실 거울에 비춰 머리와 옷매무새를 정리하다가 김은 문득 밀려오는 기시감에 휘청거립니다. 그러고 보니 이런 장면을 꿈속에서 본 것 같기도 합니다. 아주 애틋하고 씁쓸했던 꿈. 그렇지만 꿈의 결말만은 아무리 떠올리려 해 보아도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그때 남자 친구의 문자메시지가 도착합니다.
- 모레 뭐 사 가지고 갈까.
토요일 점심에 남자 친구가 인사드리러 올 거예요, 전하자 부모님은 드디어,라고 말하며 안도의 한숨을 작게 내쉬었습니다. 김은 답장을 하지 않은 채 그대로 화장실의 유리문을 열고나옵니다.
업무 시작 전에 나가서 담배를 피우고 올까, 잠시 생각했으나 어쩐지 이미 한 개비를 온전히 다 피운 것만 같은 느낌입니다. 머릿속이 영 몽롱해 눈을 잠시 감았다가 뜨자 멀리서 뽀얀 웃음을 띠며 다가오는 수정이 보입니다.
- 재랑 언니.
한 걸음에 달려온 수정이 배시시 웃으며 조용하고 은밀하게 김의 이름을 부르고, 김은 드디어 꿈의 마지막 장면을 기억해냅니다.
꿈의 마지막은 상어와 헤엄치던 랑랑입니다. 그리고 서로의 품에 단단하게 안겨 있는 제나와 애인의 모습. 흰 가루가 흩날리는, 온통 무너져 내리는, 부서진 폐허 속에서 온전하게 서 있는 것은 오직 제나와 애인의 곧은 다리뿐이지만, 제나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제나는 눈을 떠 애인의 얼굴을 바라봅니다. 애인의 얼굴은 어느새 수정의 얼굴이 되어 있고, 함부로 짓이겨 놓아도 여전히 달콤한 체리의 향기는 점점 더 진해져, 마침내 세 개의 우주를 가득 채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