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소설
소년은 걷고 있었다.
스니커즈의 얇은 밑창을 통해 아스팔트의 열기가 계속해서 발바닥을 두드렸다. 몇 시간째였나, 며칠 째인가. 몸이 길과 하나가 된 듯했다. 발이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인지, 아스팔트가 뒤로 밀려나가고 있는 것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그래도 소년은 걸었다. 해가 떠 있는 동안은 쉬지 않고 걸었다. 이곳의 길은 아무리 걸어도 끝이 나지 않았다. 이따금 차들이 빠른 속도로 소년의 곁을 스쳤다. 그러고 나면 뜨거운 바람이 훅, 위로하듯 소년의 얼굴을 덮어 어루만지고는 이내 사라졌다.
아주 더운 날씨는 아니었지만 목덜미의 땀은 쉬이 마르지 않았다. 옷에, 머리칼에, 또 손톱과 피부에, 진득한 땀 냄새와 흙먼지 냄새가 깊숙하게 뱄다. 냄새를 짐처럼 이고 소년은 계속 걸었다.
목이 마르면 등에 짊어진 커다란 배낭의 오른쪽 포켓에서 생수병을 꺼내 마셨다.
배가 고프면 배낭의 왼쪽 포켓에서 딱딱한 크래커나 유통기한이 아주 긴 빵을 꺼내 먹었다.
빵에서는 방부제의 향기가 났고 아무 맛도 나지 않았다. 소년의 땀이 한 방울, 뚝, 마른 빵의 표면 위에 떨어져 소리 없이 흡수되었다.
운이 좋으면 태양이 소년의 반대편, 길의 끝에 걸려 마지막 붉은 빛을 강렬하게 쏘아내며 타들어가듯 사라지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숨이 넘어갈 듯 대기가 어지럽게 흔들리고, 눈 닿는 모든 것이 시뻘겋게 물들어 가는 시간. 소년의 눈은 그러나 그 흔들리는 광경 속에서도 늘 태양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위대하고, 강하고, 찬란하며 뜨겁지만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 소년의 태양이 이내 그 모습을 감추고 하늘의 끝자락에 등장한 별이 두어 개 반짝거릴 무렵이 되면 소년은 어디에서든 우뚝 멈추어 섰다. 갑자기 작동을 멈추어 버린 컨베이어 벨트처럼, 방전된 시계의 시침처럼.
하루 종일 움직인 소년의 두 다리에서 이내 미세한 경련이 일어나기 시작하지만 소년은 함부로 주저앉지 않았다. 꼿꼿이 서서 사방을 바라본 후, 별이 가장 크고 밝게 빛나는 하늘 아래까지 걸어가 돌들을 골라내고 마른땅에 침낭을 펴고 나서야 소년은 비로소 다리를 쭉 펴고 앉았다. 그리고 물과 마른 빵을 꺼내 하루의 마지막 식사를 마친 후 오랫동안 별들을 바라보다가 주머니에서 작은 휴대용 나이프를 꺼내 손에 꼭 쥐었다. 침낭 안에 들어가면 지퍼를 머리끝까지 완전히 잠근 채 잠을 청했다.
가끔 잠이 들기 전 멀리서 개과의 동물이 우우, 길고 낮은 울음소리를 내는 것을 들었다. 늑대일까. 눈이 어둠 속에서 빛나고 있을까. 굶주린 늑대가 어둠 속에서 침낭을 물어뜯는다면 나의 작은 나이프는 과연 늑대의 가죽을 뚫을 수 있을까.
물론 소년은 늑대에게 공격당하지 않았다. 훗날 소년은 그것이 정말 늑대였을까, 생각했다. 한 번도 두 눈으로 마주 보지 못한 그 울음소리의 주인공은 어쩌면 조금 떨어진 농가에서 키우는 양치기 개 따위가 아니었을까. 나의 두려움은 과연 적합한 대상을 향해 있었을까, 아니면 그저 환상의 목덜미를 긋고 뜨거운 피와 짐승의 냄새 속에 쓸쓸하고 격렬하게 죽어가는 상상을 반복한 것뿐이었나.
밤은 빠르게 지나갔다. 피곤한 육체는 단순한 잠으로만 이루어진 밤을 선물한다는 사실을, 소년은 그때 알았다. 도시의 푹신한 침대에 누워 뒤척거리던 가수면 상태의 나날들은 거짓말처럼 아득하게 밀려나갔고, 밤은 곧 죽음 같은 잠이었다. 해가 뜨면 곧 침낭 안에 차오르는 지면의 열기로 소스라치며 잠에서 깼다. 소년은 다시금 걸었다. 언젠가부터 소년의 손목시계는 멈춰 있었지만 시간 따위는 아무래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지나가는 차를 얻어 타고 근처 휴게소나 주유소 등에 물과 빵을 구하러 갈 때도 있었다. 보통 이삼일에 한 번 정도였지만 언젠가는 닷새가 되도록 아무도 소년을 위해 멈추지 않았다. 물은 이미 바닥이 났지만 소년은 걸을 수밖에 없었다.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마시지 못하고 또 아무도 소년을 돌아보거나 말을 걸지 않는 세상의 어느 한 구석에도 새까만 아스팔트는 탄탄하게 깔려 있었고, 소년의 발은 꾸준히 길을 밟고 있었다.
걷다가 죽을 수 있을까.
걷다가 죽을 수 있다면.
그 순간 소년의 유일한 바람이었다. 다만 걷는 것. 걷다가 죽는 것. 쓸 데 없이 젊고 싱싱한 육체를 마지막 한 방울까지 짜내어 소모해버리는 것. 이유 없이 아름다운 저 풍경 속에서, 아무런 의미 없이 계속되는 이 삶이 어서 끝나기를.
그러나 그때 먼지를 뒤집어쓴 푸른 트럭 한 대가 소년 옆에 천천히 다가왔고, 소년은 주저 없이 양 손을 흔들었다. 히스패닉 운전사가 물은 없고 마실 거라면 이거 정도, 라며 이름 모를 술이 담긴 유리병을 내밀었다. 소년은 주저 없이 반쯤 비어있는 병을 받아 들고는 찰랑이는 황금빛 액체를 꿀꺽꿀꺽 마셨다. 그리고 아주 오랜만에, 길고 긴 꿈을 꾸었다.
꿈에서 소년은 언젠가 가족과 함께 갔었던 어느 바닷가에 있었다. 아직 모두가 살아있던 때.
어린 소년의 그림자가 초여름 오후의 태양 아래 일렁거렸다. 조그마한 한 쌍의 맨발이 모래 위 자신의 그림자를 밟기 위해 풀쩍, 뛰었다. 두 누나들과 부모님은 보이지 않았지만 소년은 그들이 소년을 멀리서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수영복 바지를 입고 적당히 달구어진 모래 위에 앉아 혼자 모래성을 쌓던 소년은 문득 시야의 가장자리에 걸린 검은 형체를 발견했다. 파도가 하얗게 거품을 뿜어내는 백사장 한 귀퉁이에서 규칙적인 리듬에 맞춰 조금씩 흔들리는 것을 향해 가까이 다가선 순간, 소년은 그것이 이미 썩어가고 있는 동물의 사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기분 나쁘게 미끌미끌한 표면은 원래 그런 것인지 물속에서 썩어버린 사물들의 특징인지 알 수 없었다. 초점을 잃은 눈동자에서 진액 같은 바닷물이 왈칵, 쏟아졌다. 다리가 많은 벌레 한 마리가 부패하는 시체 위를 기이한 움직임으로 빠르게 기어 올라가는 것을 목격한 후 소년은 뒤돌아 뛰기 시작했다. 그러나 모래는 발을 디딜 때마다 푹푹 꺼지며 작고 가냘픈 소년의 몸을 무겁게 잡아채고 있었고 두 누나와 부모님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소년은 절망 속에서 그들의 이름을 부르짖었으나 그 목소리는 인간의 언어가 되지 못한 채 개과의 동물처럼 아주 낮고 길게 울려 퍼졌다.
이윽고 파도가 밀려왔다.
소년이 잠에서 깨었을 때 밖은 어두웠다. 트럭은 앞이 보이지 않는 컴컴한 도로를 빠른 속도로 덜컹거리며 달리고 있었다. 비쩍 마른 트럭 운전사는 이국의 언어로 알 수 없는 노래를 흥얼거리다가 소년이 자신을 바라보는 것을 깨닫고는 소년에게 역시 노래하듯 말했다.
네가 영 일어나질 않아서 말이야. 나는 다섯 시간 내에 A시에 가야만 하거든. 여기서부턴 멈출 수가 없어. 미안하지만 A시까지 나와 함께 가야 할 것 같아. 아, 대신 아까 물과 먹을 것을 좀 사두었어. 배가 고프면 얼마든지 먹으라고.
이국적인 악센트가 강한 운전사의 말투는 투박했으나 여유롭고 다정했다. 소년은 아직까지 품에 안고 있던 묵직한 배낭을 조수석 바닥에 내려놓고 허겁지겁 생수병의 뚜껑부터 땄다. 혀와 식도와 위를 차례대로 적시는 물은 차갑고 달았다.
생수 반 병과 콜라 한 캔, 그리고 칠면조 샌드위치까지 쉬지 않고 먹어치운 뒤 그제야 소년은 남자에게 고맙다고 얘기하며 얼굴을 조금 붉혔다. 소년은 남은 돈의 액수를 머릿속으로 헤아려보았다. 샌드위치 값이라도 건네주어야 할 것 같았지만 당장 A시에 도착하면 여비가 턱 없이 부족할 게 분명했다. 도시의 물가는 비쌌고 도시의 거리에 침낭을 펴고 누웠다간 싸늘한 시체로 발견될 것이다. 소년은 늑대보다 사람이, 텅 빈 황야보다 건물들이 훨씬 더 무서웠다.
운전사는 계속 알 수 없는 노래를 흥얼거렸고 이따금 소년에게 맥락 없는 말을 건넸다. 몇 살이니, 어디서 왔니 같은 질문은 하지 않았다.
둘은 라디오를 듣거나 두서없는 대화를 주고받으며 몇 시간을 달렸다. 도로는 텅 비어 있었고 단 한 대의 차도 스치지 않았다. 끝없는 암흑만이 시야를 메웠다. 우주를 날아가는 기분이었다. 영원히 이대로 달릴 것만 같다, 생각하는 순간
쾅.
갑자기 충격이 소년의 몸 전체를 관통했다. 동시에 트럭이 끼익 소리를 내며 급하게 멈춰 섰다. 안전벨트를 매고 있었는데도 상체가 튕겨나가 소년은 전면 유리창에 머리를 부딪치고 말았다. 얼얼한 반동에 소년이 혼비백산한 와중 운전사가 황급히 안전벨트를 풀고 차 문을 열더니 깜깜한 어둠 속으로 뛰쳐나갔다.
어딘지 가늠할 수 없는 외진 도로 한복판이었다. 새벽이 다가오는지 남자가 열어젖힌 차 문을 통해 냉기가 감도는 공기가 훅, 트럭 안으로 밀려 들어왔다. 전조등에 음산한 습기와 희뿌연 안개가 비쳤다. 소년은 잠시 고민하다 천천히 조수석의 문을 열었다.
운전사는 트럭 앞 도로에 쪼그리고 앉아 전조등의 불빛에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다행이다. 그냥 개야.
아직 머리가 멍한 탓인지 앞 문장과 뒷문장의 뜻이 잘 연결이 되지 않았다. 소년이 운전사를 바라보자 그는 도로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소년에게 아주 빠르게, 거의 횡설수설하며 말했다.
순록 같은 거였으면 우린 죽을 뻔했다고. 그 놈들은 거의 황소만 해. 게다가 뿔이 유리창을 뚫고 나온다고. 내 동료 중에 한 명 있었지. 저 북쪽 도로를 달리다 겨울에 순록과 부딪쳐 왼쪽 눈을 뿔에 제대로 받힌 놈. 망할 순록은 죽고, 그놈은 살았지만 말이야. 아, 생각해보니 오른쪽 눈이었던가. 아무튼 이리 와서 이거 좀 같이 옮기자고. 거 참 더럽게 큰 개로군.
남자가 턱으로 가리킨 곳을, 소년은 보고 싶지 않았다. 이대로 배낭을 들춰 메고 멀리 달아나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 운전사가 뭐라 투덜대며 트럭의 짐칸을 뒤적이는 사이 싸늘한 새벽 공기에 몸을 슬쩍 떨며 서 있던 소년은 끈적끈적한 느낌에 무심코 아래쪽을 바라보고는 화들짝 놀랐다. 경사진 도로를 따라 흘러내린 개의 피가 소년의 스니커즈 밑창을 빨갛게 적시고 있었다. 머리가 핑 돌았지만 어째선지 발을 뗄 수 없었다. 손에 쥔 휴대용 나이프의 가죽 케이스가 살갗을 파고드는 듯 손바닥이 욱신거렸다.
개는 아주 크고 무거웠다. 부서진 뼈와 튀어나온 내장, 그리고 피가 말라붙은 잿빛 털 뭉치를 소년은 똑똑히 보고, 또 만져야 했다. 생생한 죽음의 현장이었다. 그 무게는 흰 뼛가루와 부재의 방식으로 전해졌던 죽음과는 사뭇 달랐다. 소년은 피가 굳어가고 있는 개의 터진 배를 두 손으로 틀어막듯 안아 올렸다. 아직 빛을 잃지 않은 검은 눈이 소년을 마주 보았다. 소년이 개의 눈동자를 골똘히 들여다보는데 남자가 다가와 개의 눈꺼풀을 손으로 덮었다.
도로 옆은 풀이 거의 자라지 않는 황폐한 모래땅이었다. 새벽의 습기가 모래를 돌덩이처럼 굳혔기 때문에 소년과 운전사는 트럭에 실린 삽으로 힘겹게 구덩이를 파냈다. 개의 시체를 던져 넣고 구덩이를 모래로 완전히 덮고 나자 어느새 멀리서 태양이 어둠을 밀어내고 있었다.
남자는 손도 닦지 않고는 트럭에서 술병을 꺼내와 뚜껑을 열고 한 모금 마신 뒤 말없이 소년에게 병을 내밀었다. 소년 역시 한 모금을 길게 마신 후 다시 병을 남자에게 건넸다.
잠시 후 남자가 개의 무덤 쪽을 향해 손으로 십자를 그으며 짧고 조용하게 기도했다. 그것은 이 나라의 언어가 아니었다. 아마도 그의 모국어일 것이다. 소년은 단 한 개의 단어를 알아들었다. 아버지, 라는 뜻이었다.
기도를 마친 남자가 황금빛의 독주를 몇 모금 더 마시는 동안, 소년은 아직 손에 남아있는 개의 온기를 가늠하고 잠시 덕지덕지 엉겨있는 피와 흙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양 손을 가슴 앞에 모으고 눈을 감았다. 아주 어릴 적 양 옆에서 누나들이 짓고 있었던 표정과 그들이 외던 기도문을 떠올려보았지만 이제는 잘 생각이 나지 않았다.
둘은 잠시 말없이 서서 붉어지는 지평선을 바라보았다. 길을 걷는 동안 해가 지는 모습은 자주 보았으나 이상하게도 해가 뜨는 모습을 본 기억은 없었다. 저녁의 태양과는 다른, 부드럽고 온화한 빛을 띠고 태양은 천천히 솟아올랐다.
남자가 커다란 손바닥으로 소년의 등을 두어 번 두드렸다.
2015년 7월에 나온 독립문예지 ‘더 멀리’ 2호에 수록된 짧은 소설이다.
2014년 봄에 쓴, 생전 처음으로 ‘완성한’ 소설.
일 년을 묵혀두었다가 ‘더 멀리’에서 엽편 소설 투고를 받는다기에 짧게 다듬어서 보냈고, 실렸다.
세상에 내보내는 첫 소설이라 설레기도 했고 부끄럽기도 했다.
거의 7년 전에 쓴 소설이라 부족한 점이 많지만, 그래도 나름 애틋한 마음을 담아 올린다.
- 소설은 삶과 죽음과 성장에 대한 이야기이다.
- 어쩌면 내게는 개의 죽음이 사람의 죽음과 비슷한 무게이다.
- 원래는 주인공의 모티브가 된 한 소년에게 선물하기 위해 쓴 글이다.
- 엽편 분량으로 다듬으면서 실제 소년의 사연은 모두 잘려나갔는데 이 쪽이 소설로서는 더 마음에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