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 그렇게 다를 게 있을까요 우리 인생?
이 글은 여자가 하는 게임에 편견을 가진 남자들을 향한 항변이자, 게임하는 남자 친구를 이해할 수 없다는 여자들을 향한 대변이다.
"야 너네 동생 미쳤어. 벌써 8시간째 돌리고 있어"
고등학생 때, 나는 처음 FPS(First Person Shooter) 게임에 빠져들었다. '카운트 스트라이커'라고 1인칭 시점으로 진행되는 총 게임이었다. 한참 그 게임 때문에 매일 같이 컴퓨터 앞에만 앉아 있던 오빠의 플레이를 어깨너머로 지켜만 보다 직접 해본 게 시작이었다. 오빠가 외출했을 때, 재밌을 것 같은데 나도 한 번 해볼까 싶어 오빠 아이디로 몰래 접속했는데 이럴 수가, 말 그대로 신세계였다. 심장이 쫄깃해지더니 내 몸에 흐르는 피가 활발해지고 아드레날린의 분비가 급속도로 증가했다. 게임이라곤 슈퍼마리오 밖에 모르던 내겐 그 짜릿함이 충격적일 정도였다. 나는 그날 학원도 빼먹고 오빠 친구들로 추정되는 무리들과 채팅을 하며 내리 8시간 동안 꼼짝 않고 총질을 즐겼다.
나는 게임을 혐오하는 여자 중 한 명이었다. 과하다 싶을 정도로 게임을 좋아했던 오빠 덕분에, 공부도 안 하고 엄마 저금통을 털어서 게임하러 가고, 또 그걸 걸려서 아빠한테 회초리를 맞고도 그 기분을 풀러 다시 게임하러 가는 그런 오빠 덕분에 의식적으로 게임을 피했다. 앞날 걱정 없이 게임만 하고 있던 오빠가 한심스럽기까지 했다. '저건 나쁜 거야, 사람 인생 하나 망치는 거야, 절대 하지 말아야 해, 마약 같은 거야.' 그리 생각했었다.
하지만 내가 직접 경험해봄으로써 게임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지울 수 있었다. 간간이 스트레스를 풀고 싶을 때마다 게임은 즐거운 놀이가 되었고, 그렇게 증오하던 오빠와도 친해질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학창 시절, 공부에 방해가 되었냐 묻는다면 도구는 쓰는 사람 나름이라 답하겠다. 나는 대단한 대학은 아니었지만 서울에 있는 대학에 장학금을 받고 입학했고 오빠는 끝내 대학은 진학하지 못했다. 그래서 게임이 인생을 망치냐 묻는다면 지금 나는 퇴사자 나부랭이고 오빠는 나름 대기업에서 꽤 괜찮은 연봉을 받으며 잘만 살고 있다 말하겠다. 사람 인생, 게임 하나 때문에 좌지우지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술을 마시지만 모든 사람이 알코올 중독자가 되는 건 아니지 않은가. 그와 같은 이치라 생각해도 무방하다.
대학생 때는 '서든어택'을 잠깐 했었고, 요새는 '오버워치'에 빠져있다. 서른이 넘었음에도 나와 오빠는 주말이면 이따금 오버워치에서 만나 서로의 안부를 묻는다. 누가 "취미가 뭐예요"라고 물으면 이젠 당당히 말한다. "게임이요."
나는 꽤 진지하게 게임을 즐기는 유저 중 한 사람이다. 새로운 캐릭터가 나오면 사람들이 분석해 놓은 정보를 찾아보거나 유튜브로 그 캐릭터의 활용법을 미리 숙지한다. 게임 속 세계관이 궁금해 애니메이션을 챙겨보기도 하고, 팀플레이의 기본은 브리핑이라는 생각으로 '여자가 있어서 망했네' 따위의 소리를 들으면서도 절대 팀 보이스를 끈 적이 없다.
친구들과 만나서 연애 얘기를 하다 보면 게임 때문에 남자 친구와 싸웠다는 사연을 종종 듣는다.
"아니 나이 서른 넘어서 아직도 애들처럼 PC방 가서 게임질인데 어떻게 이해해?"
"친구들이랑 한 번 가면 4시간은 기본이라니까, 완전 시간 낭비 아니냐?"
"인생에 아무 도움도 안 되는 그런 걸 왜 하고 있는지 모르겠어."
나도 그렇게 생각했던 적이 있었지만 즐겜 유저로서 그 말을 듣는 내내 기분이 나빠져 속으로 분을 삭히느라 쉽게 그녀들의 의견에 반박하지 못했다.
'그러는 너는 서른이 넘었는데 아직도 애들처럼 초콜릿을 입에 달고 사냐.'
'너도 친구들이랑 카페에서 수다 떨면 4시간은 기본이지 않냐.'
'너의 현재도 네가 인생에 도움 되는 것만 하고 살았다고는 보이지 않는구나.'
조목조목 하나하나씩 같은 논리로 따지고 싶었지만 큰 싸울 될까 마음에만 담아두었다. 대신 조금 더 현실적이고 그들의 이해에 도움이 될만한 대답을 해주었다. 나는 인간이 어딘가 하나에는 '몰입'되어야 즐거움을 느끼는 존재라 생각한다고. 그게 누군가에게는 쇼핑이고, 운동이고, 영화이고, 책이고, 상당수의 남자들에겐 게임인 것뿐이라고. 차라리 게임하는 남자가 건전한 사람이라고, 그 몰입의 대상이 술과 여자여서 친구들이랑 만나면 여자 친구 몰래 클럽이나 룸살롱 다니는 남자들도 세상에 천지라고.
"세상에 이렇게 믿을 놈 없는데 친구들이랑 PC방 가서 얌전히 게임만 하다 오잖아. 얼마나 바람직하냐. 중간에 라면 하나 먹어도 4시간 노는데 돈 만 원이 안 넘어요. 너네 남자 친구가 막 엄청 있어 보이는 근사한 취미 생활이 있다고 치자. 근데 유지비용이 많이 들어서 거기에 돈을 엄청 써요. 그럼 그거는 괜찮아? 있어 보이는 취미니까 그건 이해해줄 수 있을 거 같아? 내가 봤을 땐 아닐걸. 너네는 그것도 못마땅할 거야. 빨리 돈 모아서 결혼해야 되는데 뭐 하고 있는 거냐. 돈 낭비가 심한 거 같은데 이 사람 믿고 만나도 되겠냐. 또 이해 못 해줄걸? 어차피 사람은 자기가 안 해보면 몰라. 그게 그 사람 인생에 도움이 되는지 안되는지 아무리 사소한 거라도 쉽게 판단할 수 없는 거라고."
빈말이 아니라 나는 요새 오버워치를 하면서 인생을 배우고 있다. 이 게임은 기본적으로 6명이서 함께 하는 팀 경기라 한 명이라도 자신의 역할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면 패배할 확률이 매우 높아진다. 온라인 상에서 처음 만나는 사람끼리 한 팀이 되어 손발을 맞추기란 생각보다 어렵다. 그래서 첫판에 무기력하게 지고 나면 팀 보이스로 각종 욕설이 날아온다. 처음에는 나도 당하고만 있는 성격은 아니라서 욕이 날아오면 똑같이 욕을 퍼부었다. 엄마를 찾고 아빠를 찾는 똑같은 패륜아가 되어 있었다. 그렇게 서로 기분이 상한 채로 누구 한 사람이 그 판을 던지면(포기해버리면) 더 해볼 것도 없이 그 경기는 패작이 되었다.
즐겁자고 하는 게임인데 왜 이렇게 기분이 나쁠까. 한 번은 정말 진지하게 생각해보았다. 이기고 싶은 마음은 다 똑같을 텐데 꼭 매번 싸워야 할까. 나한테 욕한다고 똑같이 욕을 해주면 내가 저 사람보다 나은 게 뭐가 있을까. 한 번 졌다고 바로 포기해도 괜찮은 걸까. 게임이니까 쉽고 당연한 이러한 일들이 비단 게임 속에서만 벌어지는 일이라 장담할 수 있을까. 현실에서의 내 인격과 게임 속에서의 내 인격을 완벽히 분리할 수 있을까.
게임 하나 하는 거 가지고 뭘 그렇게까지 진지하냐 우습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삶이란 원래 사소한 것에서 소소한 의미를 찾으며 사는 게 아니던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기에 게임 속에서 남 탓 하기를, 욕하기를, 포기하기를 멈추었다. 대신, 내 탓을 하는 팀원에게 먼저 사과했고, 욕설을 하는 사람에겐 단호했고, 포기를 하려는 팀원에겐 '할 수 있다' 격려했다.
"야 너네 포기하지 마, 우리 져도 돼, 져도 되는데 대신 어렵게 지자. 기분 나쁘게 맥없이 지지 말고 재밌게 지자고. 그리고 이렇게 밀리다가 이기는 판이 진짜 짜릿하지 않냐?"
어떻게 이기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지느냐를 생각하니 싸울 이유가 없었다. 그러자 결과는 생각보다 놀라웠다. 승률은 어마어마하게 올랐고, 멘탈이 마음에 든다며 같이 하자는 유저들도 심심치 않게 생겨났다. 변화를 체감할수록 한 편으론 조금 아쉬운 마음도 들었다. 왜 현실에선 이러지 못했을까. 조금 더 참고 이해해볼 걸 후회되는 관계들이 떠올랐다. 특히 팀으로 일하는 직장생활에서의 아쉬움이 제일 컸다. 다음에는 정말 잘 해봐야지, 혹시라도 정말 만약이라도 다음이 있다면 말이다.
아, 게임이 재미있는 이유 하나 더! 게임은 현실과 다르게 명확하게 다음이 존재한다. 실패해도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모두에게 공평한 다음의 기회가 주어진다. 어쩌면 나는 내 뜻대로 되지 않았던 현실의 상처들을 그런 게임을 통해 위로하며 다스렸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거 게임 좀 하는 거 가지고 뭐라 하지 맙시다. 여자가 하는 게임이라고 무시하지도 말구요.
그럼 오늘도 사랑을 담아서 즐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