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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엄마표 교육이 아니라 나다

by 채채

엄마표 영어, 엄마표 한글, 엄마표 숫자놀이, 엄마표 놀잇감, 엄마표..., 엄마표...

유독 엄마표가 많이 붙는 교육열풍이 불던 시기였다.

사교육에 몸담고 있던 나는 일찍 배워도, 늦게 배워도 할 때가 되어야 배움도 효과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고 또 부모가 내 자식을 가르치기란 참을 인자 골백번의 수행이 아니면 쉽지 않은 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서둘러 엄마표 교육을 시작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대신 내가 제일 잘하는 걸 매일매일 해주는 걸로 아이와 교감의 시간을 늘리는 것에 집중했다. 그림책을 읽어주고 동요를 따라 부르고 아이와 눈을 맞추며 자주 웃어주고 사랑한다는 말을 많이 해주었다.


하지만 나도 어쩔 수 없는 엄마라서 같은 유치원 다니는 친구 아이가 벌써 띄엄띄엄 자기 이름을 쓴다는 둥, 그림보다 글자가 많은 그림책을 읽는다는 둥 하는 소리를 들으면 마음이 편치가 않는 것이다.

누구 집 아이가 벌써 기저귀를 떼고 소변기를 쓴다는 소리에 혹시나 하는 마음에 배변훈련을 어떻게 시작해야 하는지 알아보는 것이 엄마의 마음이고 또 어느 집 아이가 낮잠 안 자고 밤에 통잠을 잔다고 하면 낮잠 시간에 슬그머니 놀이터로 아이를 데려가 보기도 하는 것이다. 이 모든 게 엄마가 처음인 내가 나의 기준에 맞춰 아이를 키우다 보니 하게 된 실수 아닌 잘못이었다.


기저귀를 떼려다 스트레스받은 아이가 여기저기 온 집안에 데려온 지 3일 된 강아지마냥 찔끔찔끔 오줌을 싸놓은 걸 보고 기겁해 병원에 데려갔다가 소아과 선생님께 엄청나게 혼이 나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이들마다 성향도 다르고 크는 시기도 다른데 심지어 기저귀를 이르게 뗀 아이는 2월 생이고 내 딸은 11월 생이라 거의 1년 가까이 차이가 나는데도 내 욕심에 아이를 힘들게 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렸다.

어릴 적 공갈젖꼭지를 떼지 못해 국민학교 3학년 때까지 물고 있던 나의 작은 트라우마 때문에 아이가 너무 오래 공갈젖꼭지를 물고 있지 못하게 했고 결국 손가락 빠는 버릇이 생기게 만든 것도 나.


매일매일이 실수투성이고 잘못이었고 더 나아가 죄책감에 시달려야 했다. 그러지 말걸, 안 했으면 좋았을걸...이라는 자기반성을 잠자는 시간 빼고 늘 했던 것 같다. 엄마표 교육이라는 게 사실은 엄마와 아이의 교감을 더 높이는 게 아니라 아이는 스트레스받고 엄마는 죄책감에 시달려야 하는 과정인가 싶을 정도로 한글의 시작은 쉽지 않았다. 서점에 나와있는 교재 중에 가장 쉬운 책을 사고 색색깔 예쁜 색연필과 커다란 스케치북 10권을 사면서도 얼마나 고민이 많았는지 모른다. 다른 아이들과 비교해서 결코 이르지 않은 한글교육인데 나는 왜 무엇 때문에 이리도 망설이는 건지, 차라리 학원을 보내버릴까, 아니면 집으로 오는 방문교사 신청을 해볼까 수많은 고민 속에 엄마인 나조차도 이런저런 생각으로 결정이 어려운 시기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조금 더 마음 편하게 생각해도 됐을 텐데 그땐 초보엄마의 조급함만 있던 시기였기 때문에 외동을 키우는 엄마의 고충을 알 것 같았다. 확실히 주변에 둘째나 셋째인 경우 아이를 키우는 데 있어서 훨씬 마음의 여유가 있어 보였다. 어느 엄마나 아픈 손가락은 있겠지만, 그때의 나는 선배 엄마들의 여유로움이 그렇게 대단해 보일 수가 없었다.


한글을 떼보겠다고 엄청 거창하게 시작한 것부터가 잘못이었던 걸까. 유치원 들어가자마자 시작한 7세 한글은 초등학교 입학 때까지 지지부진한 채로 끝이 났다. 자기 이름 석자 쓰는 것에 만족했던 해맑은 내 딸은 이후 받아쓰기로 마음고생이 이만저만 아니었고 그 이후엔 친구들과의 사이에서도 서툰 읽기로 인해 한동안 왕따에 시달려야 했다.


정말 중요한 건,

그때까지도 나는 내 딸이 난독증이라는 걸 몰랐다는 것이다. 이름도 생소한 난독증이라니. 어느 누가 내 아이가 그런 어려움이 있다고 생각하겠는가. 그저 말이 늦되었으니 글도 조금 늦될 뿐이라는 어른들의 말씀으로 도피하고픈 엄마의 얄팍한 마음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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