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감정은 소중하다
봄이 돌아왔다. 팝콘같은 벚꽃들이 만개하며 봄이 돌아왔음을 알린다. 동네 아파트 단지안에 핀 벚꽃을 보며 꼭 멀리 벚꽃놀이를 가지 않아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벤치에 앉아 바람에 흩날리는 벚꽃을 보고 있다보니 정희가 떠올랐다. 남자친구의 바람피는 현장을 목격한 후 그녀는 꽤 오랫동안 불행했다. 몇 번의 위로를 해보기도 했지만 결국 그 문제는 정희 스스로 극복해야 할 감정들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녀에게 어줍잖은 위로를 건네느니 ㅡ 겪어보지 않은 나로서는 도저히 공감할 수 없는 문제를 공감한다고 말하는 것이 오히려 그녀를 괴롭히는 것만 같았다 ㅡ 그녀가 혼자 이겨낼 수 있도록 지켜보는 것이 최선이라 생각했다. 인생의 크고 작은 굴곡 속에서도 늘 그녀는 다시 일어섰으니까 말이다.
연인과의 이별을 포함해서 우리는 살아가며 다양한 '불행'을 맞닥뜨린다. 예측가능한 불행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다. 나 또한 여러 가지 '불행'을 마주 했는데 돌이켜보면 그 감정을 외면하지 않았던 덕분에 여기까지 왔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마주한 첫 불행은 아빠의 회사 부도로 인한 빚이였다. 점점 더 어려워진 형편은 짜장면 한그릇도 시켜 먹지 못할 지경까지 이르렀다. 가끔 짜장면을 먹으러 가면 한 그릇으로 나와 내 동생이 나눠먹었고 엄마는 늘 우리 모습을 보기만 하셨다. g.o.d의 '어머님은 짜장면이 싫다고 하셨어' 노래를 듣고 나는 우리 엄마 이야기가 아닌가 하고 화들짝 놀랬던 적이 있다.
처음엔 이런 상황이 꽤 원망스러웠다. 하지만 원망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물론 태어날 때부터 좋은 조건과 환경을 가진 사람도 있다. 그러나 모두 삶에 대한 고민은 똑같이 한다. 적어도 내가 생각하기엔 그렇다. 부자가 있으면 가난한 사람도 있고, 운이 좋은 사람이 있다면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의지가 강한 사람이 있는 반면 나약한 사람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어느 쪽에 있다고 해서 그 상황을 원망할 이유는 하나도 없다. 모든 인간에게 인생은 모험이니까 말이다. 이걸 깨달은 나는 마음이 어지럽고 분주할 때마다 '작은 것'들을 발견하려고 했다. 길가에 피는 꽃,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 그리고 매일 밤 엄마 손을 꼭 잡고 잠드는 일 같은 것들 말이다. 나는 불행을 겪으며 잊고 지냈던 것들의 소중함을 다시 깨달았다.
우리가 느끼는 모든 감정은 소중하다. 나는 '불행하다는 감정'을 외면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행복'을 발견할 수 있었다. 행복은 찾는게 아니라 발견하는 것이었다. 찾는다는 것은 어떤 목표와 목적의식을 갖지만 발견한다는 것은 아무런 목표를 갖지 않기 때문에 어떤 것이든 의미가 있다. 지금 이 인생이 의미가 있고 없고의 전체적인 판단은 지금 중요하지 않다. 사실 당장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현재가 '과거'로 남을 때 가능하다. 그러니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주어진 이 인생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이다. 이것만이 가장 중요한 문제다. 한정적인 시간 속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는 전적으로 내가, 우리가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문제기 때문이다. 그 외 환경적인 요인은 어떻게 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내가 비록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다고 하더라도 '어떤 사람' 이 되는지는 오롯이 나만이 정할 수 있다. 혹은 처절하게 사랑의 배신을 겪고 흐느적거리는 상태라 하더라도 지금 이 문제를 덮고 '일어날 수 있는' 힘은 그 누구도 아닌 '나'에게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불행했던 기억들은 이따금 우리에게 삶의 실마리가 된다. 그리고 삶의 강력한 동기를 만들어주기도 한다. 이런 경험이 없다면 언젠가 끝을 알 수 없는 구렁텅이로 빠져들지도 모른다. 이따금씩 찾아오는 '불행'이 오히려 나의 '삶의 힘'이 되는 것이다. 아파트 벤치에 앉아 이런 생각을 줄줄이 이어 하던 중 정희에게 전화가 왔다. 생각보다 밝은 목소리의 그녀는 날씨도 좋은데 드라이브나 가자고 했다. 새로 태어난 사람처럼 그녀의 목소리는 싱그럽고 명랑했다. 나는 흔쾌히 가겠다고 했다.
아무리 춥고 어려운 겨울이었어도 꽃은 늘 다시 핀다. 웅크리고 있던 그 힘만큼 더 활짝, 더 크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