델타 일식 여행 ② 토파즈 뮤지엄
1941년 말 일본이 진주만을 공습한 후 미국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은 별도의 수용소에 들어가야 했다. 미국 정부의 갑작스러운 명령이었다. 언론은 반일 정서를 부추겼고 모든 일본인들의 시민권을 박탈하고 그들을 추방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일본인들을 대상으로 한 테러와 린치도 늘어났다. 일본인들은 살던 집도, 하던 일도 놓고 쫓기듯 떠나야 했다. 많은 이들이 하루아침에 삶의 터전을 잃고 낯선 곳으로 옮겨갔다. 그들 중 일부가, 대략 1만 1천 명이 ‘토파즈’라는 수용소에 갇혔다.
수용소는 문과 벽이 있어 막사라 할 뿐 열악했다. 창문과 지붕이 없는 곳이 있었고 있다 해도 사막 특유의 극심한 더위와 추위, 먼지 폭풍을 막아주지 못했다. 열려서 문이고 가려서 벽이었다. 막사는 온통 흙과 먼지투성이였다. 칸칸으로 나뉘어져 있었지만 이쪽 끝에서 말하는 소리가 저쪽 끝에서도 들렸다. 공용 화장실을 써야 했고 흐르는 물은 화장실과 공용 식당에서만 사용할 수 있었다. 화장실과 욕조는 수용 인원에 비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불결한 환경과 영양 부족으로 병을 앓는 이들이 많았다. 허가를 받으면 외출을 할 수도, 쇼핑을 하러 나갈 수도, 근처에서 일자리를 구할 수도 있었지만 감시탑이나 철조망 가까이 가면 총에 맞았다. 총을 쏜 경비원은 무죄 판결을 받았다.
이들은 미국에 대한 충성도 조사에도 임해야 했다. 두 가지 질문이 핵심이었다. 미국 군대에서 전투 임무를 수행할 의향이 있는가? 일본 천황 대신 미국에 무조건적인 충성을 맹세하겠는가? 두 질문에 No라고 답한 이른바 ‘No No Boys’들은 반체제 인사로 분류되어 다른 캠프로 옮겨졌다. Yes라고 답한 이들은 입대해 전투에 참여했고 적잖은 수가 목숨을 잃었다.
전쟁이 끝날 무렵인 1945년이 되어서야 미국 정부는 수용소를 폐쇄하고 수감된 이들을 풀어주었다. 살던 곳으로 돌아간 이들도 있었지만 돌아가지 못한 이들도 있었다. 남은 이들은 낯선 곳에서 집과 일자리를 찾아야 했다. 막사는 허물어지고 수용소는 해체되었다. 미국 정부는 그렇게 하면 자신들의 과오가 없어지기라도 할 것처럼 수용소의 흔적을 깡그리 지워버렸다.
하지만 피해를 겪은 이들이 남아 있었다. 이들의 고통은 사라지지 않았다. 이들은 미국 정부의 책임과 배상을 끈질기게 요구했고 1988년 미국 정부는 공식적인 사과와 함께 피해 구제를 약속했다. 이들은 자신들이 겪은 일이 잊히지 않고 그럼으로써 같은 비극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2007년 수용소가 있던 지역에 박물관을 세웠다. 그곳에 머물렀던 이들의 희망과 저항, 지키고자 했던 존엄, 분노를 기록했다. 그곳이 토파즈 박물관이었다.
토파즈 박물관에는 당시 수용소에 갇힌 이들의 생활상이 다양하게 전시되어 있었다. 당장 이곳을 떠나라는 미국 정부의 명령서, 미국인들에게 테러를 당한 집과 상점들, 수용소로 옮겨 오면서 들고 온 달랑 하나뿐인 수트케이스, 폐자재를 모아 만든 의자, 책상, 서랍장, 옷가지, 그들이 읽었던 책, 아이들이 쓴 일기장, 그릇, 접시, 그리고 사진들……. 사진 속 수감자들은 대부분 웃고 있었다. 밑에는 카메라 앞에서 사람들은 웃게 된다, 이들의 웃음이 어떤 의미였을까 생각해보자는 설명이 붙어 있었다. 막사를 재현한 곳에는 딱딱한 나무 침대와 옷장, 서랍장 같은 간소한 가구들이 있었다. 거기에 대여섯 명이 살았다고 했다. 박물관 건물 뒤편으로는 레크레이션을 즐기던 공간도 설치되어 있었다. 나무판자를 성기게 댄 막사는 한눈에 봐도 낡고 허름했다.
내게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그들이 생필품만 만든 게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들은 장기말과 장기판을, 죽은 이를 모시는 불단을, 신문과 잡지를, 그림을, 시를, 글을 만들었다. 나는 여기서 묘한 위안을 얻었는데 이 감정을 잘 설명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니까 수용소에 갇힌 암울한 상황에서도 가구를 만들기에도 빠듯한 나무를 깎고 다듬어 놀 거리를 만들었다는 것이, 제 삶도 추스르기 버거운 중에도 죽은 이를 기리는 불단을 만들었다는 것이, 정보와 소식을 공유하는 신문과 잡지를 만들었다는 것이, 하지 않아도 사는 데 아무 지장 없었을 그림을 시를 글을 만들었다는 것이…… ‘생존’을 넘어 인간으로 ‘존재’하고자 했던 그 노력들에 배어 있는 희망과 긍정이 애틋하고 소중했다. 희망과 긍정의 크기에 비례했을, 어쩌면 훨씬 더 깊었을 절망과 비탄이 느껴졌기 때문에 더더욱 그러했다.
자신의 존엄을 지키고자 했던 도구 중 하나가 예술이었다는 것은 예술가 또는 예술가이고자 하는 사람으로서 더욱 인상적인 지점이었다. 수용소 안에 예술 학교를 만든 사람들이 있었고, 수감자들이 그림을 그리고 시를 지을 수 있게 도왔다. 그렇게 예술가가 된 이들이 있었고 그들은 이때의 시간을 그림과 소설과 시로 남겼다. 기약 없는 감금의 시간을 예술로 만들어냈다. 그리고 썼기 때문에 살아남은 것인지, 살아남아 그리고 쓸 수 있었던 것인지는 모르나, 분명한 것은 까마득한 암흑 속에서 창작이, 먹고 사는 데 아무 짝에도 쓸모없다고 하는 예술이 누군가에겐 빛이고 숨구멍이었다는 사실이었다. 어쩌면 삶 그 자체였을 지도 모르고.
그들이 지은 그림과 시 앞에서 나는 내가 하고자 하는 예술, 내가 하고 싶은 예술이 무엇인지 다시 한 번 깨달았다. 작은 틈이라도 숨구멍이 되는, 빛을 볼 수 있게 해주는 글을 짓고 싶다고 새삼스레 다짐했다.
그곳에서 나는 그들의 고통과 좌절을 애도하고, 고통과 좌절로 그치지 않고 당당히 반성과 사과를, 구제와 배상을 요구해 얻어낸 이들의 투지에 감동했으며,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는 호소에 공감했다. 이런 일이 절대로 반복되어선 안 된다. 절대로.
그리고, 그러나, 그러면서 동시에 나는…… 일제강점기 동안 조선인들이 겪은 고통과 수모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독립운동가들을 가둔 감옥과 잔혹한 고문 도구들, ‘위안부’ 여성들의 피폐한 얼굴들과 그들이 머물렀던 공간, 광산으로 공장으로 강제 징용된 노동자들, 군대에 끌려가 다치고 죽은 젊은이들, 그 외에 일본이 저지른 수다한 만행과 죽임들을.
토파즈 박물관에는 막사의 열악한 환경을 보여주는 전시물들이 많았다. 그런데 아무리 창이 없고 지붕이 없다 한들 거기엔 딱딱한 나무 침대와 매트리스와 담요가 있었다. 대여섯 명이든 서너 명이든 가족끼리 머물 수도 있었다. 맛없고 저급한 음식이나마 꼬박꼬박 제공받았다. 학교도 다니고 운동회도 하고 졸업식도 하고 졸업 사진이라는 것도 찍었다. 춤도 악기도 배우고 농구도 야구도 즐겼다. 결혼식도 올릴 수 있었고 무도회도 크리스마스 파티도 열었다.
기록상으로 총에 맞아 죽은 사람은 한 명이었다. 만여 명이 넘는 수감자 중 총에 맞아 죽은 사람이 한 명. 고작 한 명 죽은 걸로, 이런 말을 하려는 게 아니다. 한 명이든 수만 명이든 목숨은 똑같이 귀하고 죽임은 똑같이 죄일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나도 모르게 속으로 하지만 당신들은, 그러나 당신들은…… 이런 말들을 중얼거리게 되는 것이다.
영상 속에서 수용소 생활을 증언하며 눈물을 흘리는 이들에게 나는 당신들은 당신들의 나라가 저지른 일들도 알고 있냐고, 훨씬 끔찍했다고, 그것들에 대해서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냐고, 피해를 입은 국가와 국민들에게 미안한 마음과 죄책감을 안고 있냐고 묻고 싶었다.
그들이 알든 모르든 그들이 겪은 피해는 엄연한 피해이며 국가의 죄가 곧 국민의 죄가 아님에도, 그걸 머리로는 알면서도. 내가 알고 있는 끔찍한 사실과 사진들을 들이밀고 싶었다. 이것, 이것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냐고.
일본인이라고 칭했지만 그들 중에는 이른바 잇세이一世라고 하는 이민자 부모들을 따라 왔거나 미국에서 나고 자라 미국 시민권을 가진 니세이二世, 산세이三世들이 있었다. 엄연히 미국 국민이었지만 일본인으로 묶여 강제 이주를 당했다. 미국에서 나고 자란 이들 중에는 일본인이라는 의식이 없는 이들도 있지 않았을까? 그들은 얼마나 일본인이었을까? 일본인 부모를 두었기 때문에 그들은 무조건 일본인인가? 얼마만큼 일본인이고 얼마만큼 아니었을까?
이들은 전쟁을 벌이고 진주만을 습격한 당사자도 아니다. 그런 결정을 한 군부도, 습격에 참가한 군인들도 아니다. 민간인들이었다. 국가가 저지른 범죄를 일개 국민, 그것도 민간인인 개인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다. 탓할 수도 없다. 그래선 안 된다.
물론 그들 중에는 그들의 조국이 벌이는 짓에 동조하고 지지하는 이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반대하는 이들도 있었을 것이다. 아무 생각 없는 이들도 있었겠지. 이들까지도 일본인이라는 이유로 잡아들이는 건 얼마나 부당한가? 하지만 동시에 반대했든 아무 생각이 없었든 그들의 조국이 저지른 수탈과 착취의 이득을 직간접적으로 취하지 않은 자는 또 얼마나 될 것인가? 그렇다면 이득을 본 이들이라면 잡아들이는 게 정당한가? 이득을 보았다는 것은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전쟁을 찬성하고 후원하고 대 일본 제국의 영광을 자랑스러워한 이들이라면 잡아들이는 것은 어떠한가?
다시 글의 처음으로 돌아간다. 이런 생각을 하는 나는 얼마나 한국인인가?
내가 토파즈 박물관을 둘러보는 동안 이만치 분노하고 빈정거리고 복잡한 마음을 느끼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저 한 인간으로서 인간들이 저지른 악행에 느끼는 감정일까. 아니, 아니다. 내가 그저 제3자의 입장이었다면 이렇게까지 복잡한 마음이었을 리가 없다.
그 고통을 겪은 조선인들이 남이 아니라 나의 조상들이라서다. 내 어머니의 어머니, 그 어머니들이, 내 아버지의 아버지, 그 아버지들이 겪은 일이라 그렇다. 지금도 여전히 피해와 상처가 고스란히 남아 있고, 일본은 자신들의 과거를 인정하지 않고,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고, 하여 그들의 일인 동시에 나의 일이기 때문에 그러하다.
같은 이유로 나는 노동 착취를 당한 인도인들에게, 학살당한 베트남인들에게, 홀로 아이를 키우는 필리핀인들에게 부끄럽다. 그들이 피해를 입은 당사자가 아니고 내가 피해를 입힌 당사자가 아니라 해도 나는 그 나라 사람들을 마주하면 죄책감을 느낀다. 그들이 한국을, 한국인을, 나를 무슨 말로 욕하고 조롱해도 할 말이 없다고 생각한다. 어느 정도의 모욕은 감내해야 한다고 여긴다. 그거라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거라도. 동시에 한국이 공식적으로 잘못을 인정하고 사죄하고 배상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런 생각이, 나 따위의 반성과 부끄러움과 주장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내가 한국인인 걸 선택한 적 없고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거의 의식하지 않는다 해도 그게 뭐 어쨌단 말인가. 그들에게 그것이 알 바인가. 한국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들에게 나는 그저 한국인이다. 어쩔 수 없이 한국인이다. 기꺼이 부끄러워하며 고개를 숙이는 것 말곤 할 수 있는 게 없는 무력하고 무책임한 한국인.
토파즈 박물관은 내게 이런 물음들을 던졌다. 물음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고 어떤 물음도 명확한 답에 이르지 못했다. 이렇게 길게 글을 쓰면서도 혼란스럽고 정리되지 않은 단상들을 나열할 수 있을 뿐이다. 아주 아주 복잡한 마음이 들었다고밖에 말할 수 없는. 일본인들에게, 미국인들에게 이곳이 어떤 의미일지는 내가 알 수 없을 것이나 한국인인 나는 이러한 이유로 토파즈 박물관이 이곳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수많은 질문들을 던지기 위해, 답이 없는 질문들을 건네고 또 건네기 위하여. 박물관을 나오며 고맙다고 건넨 나의 인사는 그리하여 진심이었다. 토파즈 박물관이 부디 그 자리에 오래오래 남아있기를 바란다.
©출처 표기되지 않은 이미지들은 모두 토파즈 박물관 홈페이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