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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채홍 Oct 27. 2023

언제쯤 나는 친절과 환대가 몸에 밸까

대도시 집배원 K를 생각하며

마포구 일대에서 오래 일했다. 

프리랜서 북디자이너로 독립한 초창기에 편집자 두 사람과 함께 사무실을 공유해 6개월 정도 썼고, 선배 사무실에 얹혀 두 군데서 1년 여, 그리고 지금의 오피스텔 건물에 개인 사무실을 얻어 6년 정도 지냈다(8층에서 3년, 14층에서 3년). 다섯 군데 장소 모두 마포구다.


맨 처음 공유 사무실 때부터 집배원 K가 우체국 택배와 우편물을 전해 주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담당하는 구역 사람들을 K가 얼마나 기억할는지는 모르겠다. 만약 K가 나를 기억한다면 좀 신기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내가 머물렀던 다섯 군데 장소 중 네 군데(한 군데는 K 배달 구역이 아니었다)로 내 우편물을 배달해 주면서 얼굴을 보았으니까. 거의 7년의 기간 동안 말이다. 집배원 K는 우편물에 찍힌 내 이름을 어쩌면 알 것이고, 나는 배송문자에 찍힌 집배원 K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 음···. 오랫동안 얼굴과 이름만 아는 사이라···.


회사 근처를 오가는 길에서 집배원 K가 오토바이에서 소포를 내리는 모습도 가끔 보았다. 최근에 K의 모습을 보니 눈에 띄게 늘어난 흰머리와 전보다 마른듯한 체구가 눈에 들어왔다.

'이제 저이도 나이가 제법 들었구나···. 여기가 도시가 아니라 변두리 시골 마을이었다면 K와 말이라도 트고 지냈을까, 음료수라도 준비해 뒀다가 다음에 보면 건넬까···.'


그러던 어느 날 오전, 우체국택배가 왔다. 


1. “똑똑”(초인종 고장으로 노크)

2. “네”

3. “띠리링”(문 열림)

4. (집배원 K가 덤덤한 표정으로 내게 택배를 건넨다.)

5. “고맙습니다.”

6. (집배원 K, 재빠르게 사라진다.)

7. “띠리링”(문 닫힘)

항상 이 순서인데···.


오늘 예기치 않게 6번부터 상황이 바뀌었다.

6. “저··· 물 한잔 주시겠습니까?”

7. “아, 네.”(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

8. (재빨리 주방 쪽에서 브리타 정수기와 잔을 가져와 물을 따른다.)

9. “여기, 드세요.”

10. (K, 고개를 돌려 물을 마시고, 잔을 돌려주고 목례를 하고 재빨리 사라진다.)

11. “수고하세요.”(가는 뒷모습에 대고)

12. “띠리링”(문 닫힘)

 

아, 이런···. 잠깐이라도 사무실 안으로 들어오게 했어야 했는데···.

오래도록 서로 얼굴과 이름을 알고 지낸 두 중년 남성의 어색한 물 잔 교환.

50대 중반에도 여전히 친절과 환대가 몸에 배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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