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3. 아이와의 조금 긴 여행, 세계일주는 아니지만
쨍쨍한 햇빛을 받으며 눈을 떴다.
이국의 태양이다. 우습게 볼 게 아니다.
엠과 별은 벌써 깨어 있었다.
별은 디즈니 방송에 빠져있다.
베트남 성우가 그 나라 말로 혼자 설명하는 변사의 무대 같은 방식이다.
화면만 봐도 빠져드는 별이 신기했다.
설마 베트남 말을 알아듣는 건 아니겠지.
부모에겐 어떤 자녀든 천재로 보인다.
시계를 보니 9시 조금 넘은 시간.
바로 조식을 먹으러 갔다.
이곳 조식은 기대가 크다.
쉐라톤은 조식만으로도 가치가 있다는 후기를 봤다.
일단 규모가 어마어마했다.
2층의 절반을 툭 잘라서 조식 레스토랑으로 운영하고 있었다.
입구에서 룸 넘버를 말하고 입장했다.
그런데 이런 곳을 올 때 궁금한 점, 외부인이 아무 룸 넘버를 말하고 입장하는 경우는 없을까.
설마 그 정도까지 뻔뻔하고 배고픈 사람은 없는 걸까.
노숙인이라면 한번 해볼 만한 모험 아닐까.
결혼식이나 장례식은 이런 식으로 슬쩍 들어와서 취식하는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들은 기억이 난다.
난 대체로 쓸데없는 생각을 자주 하는 편이다.
음식 가짓수가 상당했다.
하지만 막상 따지고 보면 먹을만한 것은 한정됐다.
조식 뷔페에도 루틴이 생겨버렸으니.
좀 더 어렸을 땐 하나씩 모두 먹어보겠다는 의지에 차오르기도 했다.
엠도 그런 시기가 있었는데.
우리가 처음 만나서 여행을 다닐 땐 둘 다 식욕이 대단했다.
벌써 10여 년 전의 일이지만.
우선 화이트 커피로 시작했다.
음료 코너에 있는 직원에게 주문하니, 환하게 웃으면서 한잔 건네줬다.
그러면서 한 마디 덧붙였다.
we call it "wake up coffee".
아하, 바로 이해하고 미소를 지었다.
정말 웨이크 업하게 만드는 커피네요.
그나저나 이곳 커피에 완전히 빠졌다.
달달한 맛이 좋다.
원래 나이를 먹으면서 단맛 자체를 싫어하게 됐다.
술을 마시면서부터 아닐까.
그런데 이 커피의 단맛은 좋다.
더위사냥을 녹인 맛 같은데, 이상하게 끌린다.
결국 이날 아침에도 커피만 두 잔 마셨다.
조식을 먹으면서 이날 저녁 크리스마스 파티에 대해서 문의했다.
파티는 이곳 레스토랑에서 열린다.
그럼 음식도 조식에 몇 가지 추가하는 정도려나.
룸 넘버를 물어보길래, 나중에 다시 오겠다고 얼버무렸다.
별과 바로 옆 놀이방으로 갔다.
전날부터 별이 놀러 가자고 노래를 하던 곳이다.
전날 흘끗 봤을 때도 아이들이 없었는데, 이날 아침에도 텅 비어 있었다.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우선 매우 작다.
아마 처음 만들 때 담당자가,
놀이방? 그런 것도 있어야 되나? 대충 만들어 봐.
하고 만든 느낌이다.
하긴 바로 앞에 비치가 펼쳐져 있고, 위엔 근사한 풀이 있으니 놀이방은 필요 없는 걸까.
방 안 구성도 초라했다.
대충 매트가 깔려있고, 커다란 블록 몇 가지가 흩어져 있다.
이 방의 하이라이트는 바로 벽화.
디즈니 캐릭터를 흉내 낸 것 같은데 그 독특함에 웃음이 났다.
우선 가운데 엘사는 스피드 스케이트 선수처럼 생겼고,
그 옆 스벤은 피카소 그림의 등장인물처럼 3차원으로 그렸다.
특히 눈길을 끈 건 한쪽 면의 알라딘 커플.
자스민으로 보이는 인물 앞에 있으니 알라딘을 표현한 것 같긴 한데,
저 모습은 붓다의 모습이 아닐지 ㅋㅋ
별과 함께 한참 웃었다.
조금 놀다 보니 치명적인 약점을 하나 더 발견했다.
바로 모기.
왱왱거리면서 날아다니는 녀석들이 꽤 많다.
모기를 피해서 얼른 탈출했다.
이번엔 6층 풀장을 구경했다.
역시 근사한 뷰다.
이런 걸 인피니티 풀이라고 부르나 보다.
수영장에서 바로 끝없는 바다가 보인다.
그 끝에 앉아서 바다를 배경으로 사진을 남긴다.
그 사진을 인스타 같은 곳에 올린다.
뭐, 이런 느낌일까.
하지만 별에겐 꽤 깊어 보였다.
수영을 해도 될지 모르겠다.
발만 담글 수 있는 얕은 곳에서 놀면서 수영장을 구경했다.
아침부터 수영을 하는 사람들이 제법 있었다.
러시안으로 보이는 여성이 빨간색 비키니를 입고 효도르 형에게 사진을 부탁했다.
참 멋진 풍경이다.
별은 벌써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있었다.
물을 강으로 상상하면서 힘겹게 건너는 척을 한다.
나도 옆에서 오버를 하며 힘겹게 건넜다.
난 이런 놀이에 박자를 잘 맞춘다.
수영장 위층엔 사우나와 피트니스가 있었다.
나중에 따로 구경을 가기로 했다.
별과 같이 놀다가 바람이 찬 것 같아서 방으로 들어왔다.
이날 점심도 멀리 가기 귀찮아서 1층 피자샵으로 갔다.
이곳에서 메뉴 선택을 하긴 아주 수월하다.
피자 종류가 3, 4, 5라는 식이다.
피자 위에 올라간 치즈의 수를 가리키는 말 같았다.
어젠 4를 먹었으니 5로 주문했다.
엠이 다른 파스타를 먹겠다고 해서, 이날은 내가 초록색 바질 파스타를 주문했다.
완전 내 입에 딱이니.
드래프트 비어도 주문했다.
역시 맥주는 생이지.
맥주가 먼저 나와서 꿀꺽 마셔버렸다.
크으, 입에서 씹히는 느낌이다.
바질 파스타는 한국에 가서도 생각날 것 같았다.
초록색 파스타 위에 아몬드를 뿌려서 고소했다.
5 피자도 훌륭했다.
피자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내 입에도 맛있었다.
특히 아이 입에도 맞는 것 같다.
별은 피자를 혼자 먹겠다며 고집을 부렸다.
한 조각씩 얻어먹으려 열심히 설득해야 했다.
이날은 하루 종일 숙소에 머물기로 했다.
엠과 별이 방에서 쉬는 동안 사우나를 하러 갔다.
사우나는 7층에 있었다.
입구 프런트엔 여직원 혼자 무료하게 앉아 있었다.
나를 보더니 흘끔 놀라는 걸로 봐서 사우나에도 손님은 드문 모양이다.
키를 받고 사우나로 가다 보니 GX룸으로 보이는 공간이 보였다.
요가라도 하는 걸까.
하지만 여직원에게 물어보니 따로 수업은 없지만 이용은 할 수 있다고 한다.
혼자 요가 수련을 하는 사람을 위한 곳일까.
예상대로 사우나는 아주 자그마했다.
건식과 습식 사우나가 하나씩 있고, 안에 샤워기 하나, 그리고 작은 욕탕이 있는 게 전부.
안에는 중년 남성 혼자 탕에 몸을 담그고 있었다.
탕으로 들어가는 계단이 없어서 난감했다.
탕으로 들어가려면 담을 넘는 것처럼 넘어가야 했다.
나체로 그런 꼴을 보여야 하나.
망설이다 훌쩍 넘어갔다.
그래도 탕에서 보는 경치는 근사했다.
바로 바다가 보이는 전망이다.
잠시 후 중년 남성도 나가버려 사우나에 홀로 남겨졌다.
나도 대충 씻고 나가기로 했다.
그런데 씻고 나니... 타월이 없었다.
설마 방에서 가져와야 되는 시스템인가.
잠시 당황했지만 이런 상황에선 침착함이 중요하다.
옆에 있는 휴지로 대충 닦았다.
어차피 엘리베이터를 타면 바로 방이니.
(나중에 알고 보니 스탭이 리필을 안 해놓은 것 같았다. 게으른 스탭.)
방에 오니 엠은 누워있고, 별은 티비에 빠져 있었다.
잠시 누워있다가 전날 봤던 카페가 생각났다.
리의별을 챙겨서 카페에 간다니까 엠과 별도 따라온다고 했다.
한낮의 나짱 시티는 분주했다.
새벽 3시의 풍경과는 전혀 달랐다.
오토바이를 피하면서 간신히 길을 건넜다.
적응하려면 좀 더 내공이 필요할 것 같다.
고트 커피.
입구엔 에일리언처럼 생긴 생물이 뛰어가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아마 고트를 표현한 건가 보다.
별에게 베트남 염소는 참 특이하지? 하고 물으니,
베트남 염소니까 그렇지. 모두 다른 거야.라는 답이 돌아왔다.
우문현답이로세.
나는 고민할 것도 없이 바로 화이트 커피를,
엠과 별은 과일빙수를 주문했다.
가격은 커피는 2천 원 정도. 빙수는 4천 원 정도.
한국의 반값 정도다.
2층 창가에 자리를 잡고 책을 읽었다.
별은 가져온 탭을 보는가 싶더니, 금세 다른 테이블을 얼쩡 거렸다.
나도 책에 집중이 안 돼서 밖을 쳐다봤다.
여자 경찰로 보이는 사람이 밖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이 건물을 지키는 사람일까.
화이트 커피는 역시 맛있었다. 최고다.
그런데 이곳 커피에 대한 불만 한 가지.
잔얼음이 너무 많다.
몇 번 빨아들이니 커피가 바닥났다.
벤티 사이즈는 없는 거야?
백다방 커피는 이곳 베트남에서 영감을 받았는지도 모른다.
하긴 백다방 초기엔 연유 커피를 팔았다고 한다.
베트남 스타일의 커피. 지금이라면 열심히 팔아줄 텐데.
옆 테이블을 넘나드는 별 덕분에 카페에 앉은 지 30여분 만에 일어났다.
그러게 혼자 온다니까.
아이를 데리고 카페에 가는 건 사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