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막. 원아웃
1. 서울의 외야석
원아웃
고교 야구부의 외야석에서는 야구장 전체가 한눈에 들어왔다. 야구장은 프로와 달리 한산했다. 관객이 거의 없었다. 관중석엔 선수들의 지인들이 애타는 표정으로 그라운드를 향해 응원을 보내고 있었다.
스포츠 에이전트인 우형진 실장은 외야석 한편에 앉아 그라운드를 지그시 바라봤다. 며칠 동안 매섭던 날씨가 꽤 포근해졌다. 그래도 아직 바람이라도 불면 추위가 느껴졌다. 우 실장은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 잔을 홀짝였다. 몸 구석구석 카페인이 퍼졌다. 정신이 좀 맑아진 느낌이 들었다.
사람들은 야구장에서 맥주를 마시며 낭만을 찾는다지만 우 실장은 야구장에서 항상 커피를 마셨다. 남들처럼 놀이터가 아니었다. 우 실장에게 야구장은 차가운 뇌로 선수를 채점해야 하는 전쟁터였다.
그라운드엔 많은 선수들이 있었지만 우 실장의 관심을 끄는 선수는 두셋이다. 각 팀의 에이스. 머릿속엔 그 선수들의 고교시절 데이터가 입력돼 있었다.
“여기 계셨군요. 실장님.”
바로 옆에서 김 부장이 손을 비비며 말했다. 얼굴엔 우 실장의 눈치를 살피듯 비굴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어제 계약 수고 많으셨습니다.”
“에이, 내가 뭐 한 거 있나. 다 자네들 덕분이지.”
김 부장에게 손을 저으며 대답했다.
“지금 대한민국 야구계에서 가장 핫한 분이 바로 실장님 아니십니까. FA 몸값 150억 시대를 연 슈퍼 에이전트.”
“에이, 아직 멀었어. 다음엔 200억 넘게 뜯어내야지.”
김 부장에게 겸손하게 말했지만 목소리는 평소보다 한 톤 높아졌다. 입꼬리가 저절로 귀에 걸렸다.
“김 부장, 내가 영업 비밀 하나 알려줄까?”
“뭐, 좋은 꿈이라도 하나 꾸셨나요?”
김 부장에게 슬쩍 다가가서 속삭였다.
“덧셈 뺄셈을 잘하면 돼. 될 놈은 더하고 뺄 놈은 빼고. 그라운드는 숫자야. 다른 건 볼 필요가 없어.”
“아, 네…….”
김 부장이 옆에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우 실장의 시선을 피했다.
우 실장은 김 부장이 자신의 철학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야구에 대한 우 실장의 철학을 들으면 반감을 가졌다. 하지만 그건 다 속 편한 생각이다. 그라운드의 낭만 같은 건 만화책에나 나오는 소리다. 괜한 정에 이끌리는 시대는 지났다. 야구라는 스포츠는 매일 그날의 숫자가 기록돼서 나온다. 그라운드에서 믿을 건 숫자 하나뿐이다. 그게 프로의 세계다.
우 실장은 커피를 한 모금 더 홀짝이며 그라운드를 바라봤다.
레스토랑엔 이미 사람들로 가득이었다. 빈자리를 찾기 힘들 정도였다. 시간은 토요일 저녁, 장소는 강남 특급 호텔의 최고급 레스토랑. 미리 예약을 하길 잘했다. 아니었다면 한참 기다려야 했을 것이다.
대형 계약을 맺은 걸 축하하고 싶었다. 도 대표에게서 짭짤하게 보너스도 약속받았다. 계약 규모에 비해 좀 적긴 했지만… 짠돌이 도 대표가 이 정도라도 챙겨준 걸 다행이라고 해야 하겠지. 뭐, 앞으로 이 정도의 사치는 괜찮다고 생각했다.
예약은 정민선 주임이 도와줬다. 정 주임은 회사 인근에서 가장 괜찮은 레스토랑을 찾고 예약까지 해줬다.
하지만 가족들의 표정은 여전히 뾰로통하다. 처음엔 고급 레스토랑이라서 주눅이 들었나 싶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다들 내키지 않는 눈치다. 큰맘 먹고 고급 레스토랑에 데려왔는데…….
오랜만의 가족 외식을 제안한 게 어제저녁이었다. 앞으로 가능하면 주말마다 외식을 할 계획이었다. 이젠 사회에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으니 가족들에게도 슬슬 신경을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우 실장의 제안에 한별이 바로 소리를 꽥 질렀다.
“짜증 나게 무슨 외식이야. 나 내일 약속 있단 말이야!”
좋은 분위기를 만들려 했던 우 실장도 한별의 말을 듣자 화가 치밀었다.
“야, 넌 아빠가 하자면 하는 거지 무슨 말대꾸야!”
소리를 질러버렸다.
하지만 한별은 지지 않고 대들었다.
“아빠면 다야? 무슨 자기 맘대로 하면 다 되는 줄 알아? 그리고 언제부터 그렇게 가족들을 챙겼다고 유세야?”
누굴 닮았는지 성격이 드센 딸이었다. 한별은 스무 살이 넘어서도 질풍노도의 바다를 건너고 있다. 여전히 삶을 방황하고, 부모의 말엔 핏대부터 세운다.
아내 미선을 쳐다봤다. 아내는 멍하니 이쪽을 쳐다보다가 갑자기 정신을 차린 듯 한별을 타일렀다.
“한별아, 아빠가 가자고 하잖아. 그러니까…”
“아, 글쎄, 싫다니까. 우린 프라이버시가 없어? 갑자기 이러는 게 어디 있어?”
“아니, 얘가…”
미선은 우 상무와 한별의 눈치를 왔다 갔다 살폈다. 눈은 느리게 끔뻑거리고 있었다. 아들 한철은 옆에서 지겹다는 표정을 지으며 텔레비전을 쳐다보고 있었다. 하여간 엄마가 저 모양이니 애들도 저렇지.
우 실장은 새삼 자신의 가족들에게 화가 났다.
“아니, 이놈의 집구석은 만날 이 모양이야! 딸이라고 있는 건 바락바락 대들기만 하고, 마누라는 항상 뚱하니 있고, 아들 녀석은…”
말을 하면서 점점 화가 치밀었다. 요즘 들어 화가 많아졌다. 작은 일에도 확 열이 받는다.
“하여튼 가장이 하자면 무조건 하는 거야. 그게 조직이야. 조직이 싫으면 떠나! 떠나라고!”
우 실장의 고함에 한별이 “악!”하고 소리를 지르더니 자기 방으로 가버렸다. 이어서 한철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자기 방으로 사라졌다. 미선은 우 실장 쪽을 한번 흘끔 보고 어색하게 웃더니 텔레비전 리모컨을 잡았다. 텔레비전에선 한심한 삼류 드라마가 나오고 있었다.
항상 이런 식이다. 우리 집은. 남들은 가족끼리 외식을 하고 싶어도 못해서 난리인데 말이야.
어쩌다 이런 가족과 한 편이 된 걸까. 가혹한 운명이다. 유능한 리더와 무능한 조직원들.
결국 한별은 약속을 취소하고 따라왔다. 미선과 한철도 마지못한 듯 따라왔다. 가족들의 얼굴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런 고급 레스토랑에서 말이야, 그에 맞는 품격을 갖춰야지.
옷차림도 가관이었다. 한별과 한철은 집에서 입는 추레한 청바지를 걸치고 운동화를 질질 끌고 왔다. 청바지는 일부러 그랬는지 곳곳에 구멍이 뚫려 있었다.
하지만 더 가관인 건 미선이었다. 미선은 나름 꾸민다고 꾸민 것 같은데 그게 더 촌스러워 보였다. 무채색 원피스는 자신의 존재를 숨기려는 보호색처럼 보였다. 그 위에 우 실장이 언젠가 사다준 진주 목걸이를 하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아주 어색해 보였다. 가격이 꽤 비싼 목걸이였다. 우 실장이 출장을 다녀오는 길에 큰맘 먹고 사다 줬다. 하지만 목걸이는 있으면 안 될 곳에 있는 듯 초라했다.
표정들도 엉망이었다. 다들 머리 위에 시꺼먼 먹구름을 하나씩 달고 다녔다.
그래도 오늘은 화를 내지 말자. 우 실장은 스스로에게 타일렀다. 이제 나도 공인이라면 공인이다. 최근 계약 땐 선수와 함께 사진에 찍혔다. 그리고 그 사진이 포털에 쫙 깔렸다. 포털 사이트에서 우 실장의 이름인 ‘우형진’을 검색하면 제일 위에 뜰 정도다.
예약한 자리는 창밖이 보이는 테이블이었다. 좋은 자리다. 앞에 있는 창을 통해 한강의 야경이 보였고, 바로 옆으로 고개를 돌리면 피아노 연주자의 옆얼굴이 보였다. 역시 정 주임은 센스가 있다니까. 원래 그런 센스 있는 여자와 만나야 했다.
주변을 둘러봤다. 창밖으로 보이는 다리 위에선 헤드라이트 불빛이 흩날리고 있었다. 각 테이블 위엔 촛불이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고, 치즈 케이크처럼 부드러운 재즈 피아노 소리도 들렸다. 저 음악 어디서 들었더라. 달에 착륙한 사람하고 비슷한 이름이었던 것 같은데. 하긴 음악 따위에 신경 쓴 지 오래다. 한가한 짓거리에 허비할 시간은 없다.
레스토랑 안 사람들은 모두 행복해 보였다. 좋은 분위기다. 이런 게 모범적인 삶의 모습 아닐까.
슬쩍 가족들의 눈치를 살폈다. 예상은 했지만 역시였다. 가치를 모르는 눈치다. 아이들은 고개를 푹 숙이고 핸드폰이나 보고 있고, 미선은 손가락만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역시 아무도 말이 없다. 말주변들이 없는 것이다. 우리 가족은 사회성이 없다.
우 실장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할 수 없이 내가 대화를 주도하는 수밖에. 우선 헛기침을 큼 하고 했다. 다들 흘끔 쳐다봤다.
“어, 그 뭣이냐, 밖에 야경이 참 멋있네.”
우선 주변 사물로 대화를 시작했다. 비즈니스 대화의 기본이다.
하지만 반응이 없었다. 아이들은 다시 핸드폰으로 고개를 떨어뜨렸다. 한별은 인터넷 검색이나 하고 있을 테고, 한철은 게임에 빠져 있을 터였다. 한마디로 생산성 제로의 짓이다. 화가 치밀었지만 한 템포 참았다.
“저기, 너 말이다.”
한철을 불렀다. 한철이 고개를 쳐들었다. 귀찮다는 표정이다.
“뭐, 요즘 준비하는 일은 잘 되고 있나, 어쩌나.”
뭔가 권위를 가지고 차분히 말하려다 보니 말끝이 어색해졌다. 그러고 보니 한철과 대화를 하는 것도 정말 오랜만이었다.
“왜 또, 가, 가만히 있는 사람한테 시비야.”
한철이 더듬더듬 대답했다.
“아니, 너 말이다. 그 자격증은 어떻게 할 거야? 그러니까… 언제 딸 거냔 말이지.”
“그, 그놈의 자격증.”
한철이 눈알을 좌우로 굴리면서 중얼거렸다.
“야! 너 아빠가 어떻게 대학 보냈는지 몰라? 설마 아직도 그 바보 같은 짓거리 하고 다니는 거야?”
“바, 바보 같은 짓이라니.”
한철의 눈에 반항기가 서렸다. 우 실장도 순간 속에서 뜨거운 게 올라왔지만 꾹 참았다. 그리고 최대한 부드러운 말투로 말했다.
“이봐, 아들. 이게 다 너 걱정돼서 하는 소리야. 일단 자격증부터 따봐. 니가 꿈꾸는 그 무대, 거기 아무나 서는 거 아니야. 그러다가 실패하면 그땐…”
그때 갑자기 한철이 핸드폰을 쾅 소리를 내면서 테이블에 내려놨다.
“대, 대체 또 누, 누가 실패를 한다고, 차, 참나… 그리고 좀 시, 실패를 하는 게 대순가.”
그리고 그대로 우 실장을 째려보더니 휙 하고 일어서서 나갔다. 저, 저놈이. 우 실장은 허망하게 아들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아이 씨, 시끄러워 죽겠네. 난 그냥 편의점에서 라면이나 먹을래!”
한별도 따라서 일어섰다.
결국 아이들 모두 사라지고 테이블엔 우 실장 부부만 남게 됐다. 미선을 보면서 쓴웃음을 지었다. 답답한 마음에 혼자 와인만 들이켰다. 안주도 없이 벌컥벌컥 마셨다. 금세 취기가 올라왔다.
왜 가족과 대화만 하면 이렇게 꼬일까. 밖에선 다르다. 회사에선 말 한마디만 하면 다들 달려와 귀를 기울인다. 김 부장 같은 사람은 고개를 끄덕이며 메모를 하기도 한다. 그런 게 경청의 기본 아닐까.
돌아오는 차 안에서도 말없이 창밖만 쳐다봤다. 괜한 짓을 했다는 후회가 밀려왔다. 자신의 가치를 알아주지 않는 가족들에게 답답함만 더 커졌다. 특히 한철을 생각하면 속이 꽉 막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