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막. 원아웃 2
차례.
프롤로그.
서울의 외야석
- 원아웃
- 투아웃
제주의 그라운드
- 1루
- 2루
- 3루
다시, 웃기는 외야석
에필로그, 홈.
대표실은 실장실보다 한층 위에 있었다. 층의 절반을 나눠 별도의 출입문을 달았다. 덕분에 그 안에 들어가면 바깥의 소음과 차단돼 조용했다.
우 실장은 대표실 앞에서 큼큼 소리를 내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대표실 바로 앞 복도에 놓인 도 대표의 사진을 잠깐 쳐다봤다. 사진 속 도 대표의 눈썹은 실물보다 더 진하게 강조돼 보였다.
천천히 문을 두드렸다.
“우 실장?”
안에서 도 대표의 굵은 베이스 톤의 목소리가 들렸다.
“네, 접니다. 대표님.”
우 실장은 조용히 문을 열고 대표실로 들어섰다. 도 대표는 우 실장을 보더니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우리 사랑하는 동생 왔나.”
도 대표가 팔을 쫙 펼치며 다가왔다.
“그래, 어제 계약도 잘 마무리된 거지?”
“네, 대표님. 한국 프로야구 최고 금액으로 받아 냈습니다.”
“그래, 그래. 우리 동생이 해낼 줄 알았지.”
도 대표는 우 실장을 가볍게 한번 끌어안더니 껄껄 웃어댔다. 기분이 좋아 보였다.
“자, 여기 앉지. 어떻게 추운데 따뜻한 커피나 한잔?”
“네, 대표님. 감사히 마시겠습니다.”
아침에 이미 커피를 마셨다는 생각이 났지만 공손하게 대답했다. 일하다 보면 커피는 언제나 한도 초과다.
“에이, 둘이 있을 때는 형님이라고 하라니까 그러네. 우선 거기 앉지 그래.”
도 대표는 비서에게 커피 두 잔을 주문하고 다리를 쭉 펴면서 소파에 기댔다. 도 대표의 배가 공중으로 뽈록 튀어 올라왔다.
“그럼 이제 남은 건 둘인가?”
우 실장을 보면서 턱을 괴며 물었다.
“네, 대표님. 구경남이랑 김성민 둘 남았습니다.”
“그래, 구경남인지, 구성남인지 하는 친구는 우 실장 마음대로 하시고… 그 김성민은 이번에 메이저리그 포스팅 문제없는 거지?”
“네, 벌써 네 개 구단 정도가 관심을 보이고 있습니다.”
도 대표는 열성적인 팬처럼 손뼉을 짝짝 치면서 좋아했다. 입으론 호우~ 하고 추임새를 냈다.
“이대로면 메이저리그 포스팅에서 최고 금액을 뜯어낼 수도 있겠군.”
“맞습니다. 지금 데이터 상으론 메이저에서도 충분히 통한다고 나옵니다. 입질이 올 겁니다. 메이저에서도 선발 투수는 귀하니까요. 언론에서도 우리 YJ 엔터테인먼트를 제대로 빨아줄 겁니다. 이미 언론 쪽에도 조치를 했습니다.” 그리고 덧붙였다. “이번에 외화 한번 제대로 땡겨보시죠, 대표님.”
도 대표는 만족했다는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테이블에 놓인 담배 한 개비를 집어 들더니 호탕하게 웃었다.
“동생은 정말 자본주의, 그 자체로군.”
우 실장은 재빨리 손을 뻗어서 라이터에 불을 붙여서 건넸다. 도 대표는 담배를 한번 쭉 빨더니 아주 천천히 연기를 뱉어냈다. 담배 연기가 사무실에 조용히 퍼졌다. 연기와 함께 진한 담배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도 대표가 문득 생각난 듯 우 실장 쪽을 향해 몸을 숙이더니 가까이 오라는 손짓을 했다. 도 대표 쪽으로 몸을 당겨 앉았다. 도 대표는 주변을 한번 두리번거리더니 우 실장에게 은밀하게 속삭였다.
“만약 이번 포스팅에서 최고 금액만 받아낸다면, 지난번 약속한 대로 스포츠 지분은 자네 몫이야.”
우 실장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 말씀은?”
“그래, 우리 스포츠 부문은 새로운 대표를 맡게 되는 거지. 바로 우형진 대표를 말이야.”
우 실장은 자리에서 일어서서 도 대표에게 넙죽 고개를 숙였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대표님.”
“아니, 대표님이 아니라 형님이라니까 그러네.”
도 대표가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
“아닙니다. 대표님.”
“음… 그래.”
도 대표는 눈을 가늘게 뜨고 우 실장을 쳐다봤다. 그리고 이를 보이며 미소를 지었다.
“내가 아무에게나 이런 제안을 하는 건 아니라고. 잘 알지?”
지방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도 우 실장의 가슴은 뛰었다. 드디어 손에 잡힐 거리다. 대표라는 직함.
도 대표는 분명 약속했다. 항상 술자리에서 떠들어대던 그런 장황한 주사와는 달랐다. 분명히 눈을 쳐다보고 약속했다. 스포츠 부문을 떼어준다고.
현재 도용준 대표가 이끌고 있는 YJ 엔터테인먼트의 사업은 확장세다. K 콘텐츠의 붐을 제대로 타고 있다. 소속된 연기자가 출연한 드라마에 펀딩을 했고, 그 드라마가 대박이 났다. 글로벌 OTT에서 탑을 찍었다. 연기자의 몸값도 올랐다.
미국 출신 도용준 대표는 엔터테인먼트 쪽으로 탁월한 감각을 보여줬다. 대기업 임원 자리를 박차고 나와서 차린 사업이 대박이 났다. 미국에 있는 가족들과 떨어져 혼자 한국에서 사업을 이끌고 있다. 고집이 세긴 하지만 그만큼 의지가 강한 사람이었다.
여기에 우 실장이 맡고 있는 스포츠 엔터테인먼트 부분도 업계에서 탑자리에 올랐다. 이번 FA 계약도 기존의 최고 금액을 훌쩍 뛰어넘는 수준에 도장을 찍었다. 일부에선 한국 시장에 비해 과도한 금액이라고 욕했지만 대꾸할 가치도 없는 소리였다. 구매자가 나서는데 그럼 어떻게 하라고? 먼저 나서서 금액을 깎으란 말인지.
이번 메이저리그 구단 포스팅까지 마치고 나면 해외 시장에도 도전할 계획이었다. 이미 회사에서 임원 대접을 받으며 실장 자리에 올랐지만 그 정도로 만족할 수는 없었다.
우 실장은 검은색으로 코팅된 창밖을 쳐다봤다. 창밖으로 휴게소 하나가 스쳐 지나갔다. 풍경을 따라서 지나간 날들이 떠올랐다.
그동안 정말 치열하게 살았다. 시골 출신으로 여기까지 왔다. 맨 주먹으로 업계의 가장 높은 곳에 서게 됐다. 앞만 보고 달린 결과다.
우 실장은 주먹을 꼭 쥐었다. 손에서 땀이 나와 곧 축축해졌다.
그때 전화기가 울렸다. 번호를 보니 미선이었다. 잠깐 인상을 쓰다 전화를 받았다.
“여보, 다음 주 한철이 생일인 거 알지?”
미선은 한가한 소리를 하고 있었다. 하여간 눈치 없기는.
“생일인데 어쩌라고?”
퉁명스럽게 되물었다.
“아니, 한철이 이제 곧 졸업인데 당신이 뭐라고 좀 해봐. 요즘 애가 힘이 빠져있다니까. 무슨 일이라도 있는지…”
“그걸 왜 나한테 미뤄? 그냥 내비 둬. 아빠 말도 안 듣는 녀석은.”
“쳇, 언제는 아빠만 믿으라고 하더니…”
미선이 투덜거렸다.
“하여튼 시끄러워. 끊어.”
전화기를 탁 끊었다.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졌다. 바락바락 대드는 한별도 문제지만 한철은 정말 속을 모르겠다.
원래 한철은 야구 선수였다. 간신히 고등학교 야구부까지 갔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이곳은 냉정한 프로의 세계다. 가뜩이나 남들보다 실력이 떨어지던 한철은 고등학교에선 아예 벤치로 밀려났다.
속이 상했지만 우 실장은 냉정해야 했다. 아는 선배에게 부탁해서 한철을 대학에 특기생 신분으로 밀어 넣었다. 우 실장이 관리하는 선수 중 하나를 대학으로 보내는 조건이었다. 이런 청탁까지 해야 하나, 하는 자괴감이 들었지만 잠깐만 고개를 숙이기로 했다. 자식을 그라운드의 패배자로 살게 할 순 없었다. 우 실장, 자신처럼.
하지만 한철은 대학에 간 뒤 나날이 음침해졌다. 그리고 갑자기 말을 더듬기 시작했다. 원래 말수가 많은 애는 아니었지만 더듬지는 않았었다. 처음엔 꽤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스스로 이겨내야 할 과제라고 생각했다. 한철에게 대학에 가면 공부에만 열중하라고 당부했다. 교사 자격증을 따서 인생을 안정적으로 살길 바랐다. 철밥통이라도 끼고. 고생은 나 혼자로 족하다고 생각했다. 쓸데없는 환상을 좇아 젊은 시절을 날려버린 자신의 인생을 따르진 않았으면 했다.
하지만 우 실장은 그럴수록 한철과 더 멀어져 갔다. 서로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왜 아들 녀석은 점점 어려워만 지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