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채강D Sep 23. 2024

우실장과 웃기는 외야석-1막.원아웃3

1막. 원아웃 3

차례.     

프롤로그.

서울의 외야석

   원아웃

   투아웃

제주의 그라운드

   - 1

   - 2

   - 3

다시웃기는 외야석

에필로그.


이날 협상을 담당하게 된 구경남이라는 타자는 삼십 대 중반이 넘은 퇴물 FA 선수였다. 한때는 한 시즌에 홈런 스무 개를 넘게 치는 슬러거였지만, 삼십 대를 넘어서면서 기량이 급격하게 쇠퇴했다. 선발 라인업에서 밀렸고 지금은 대타 요원으로 근근이 버티고 있다.

더군다나 성격이 아주 고약했다. 아직도 자신의 가치가 리그 최상위급이라고 착각을 하고 있다. 팀에서도 융화가 되지 않는다. 고참으로서 솔선수범하는 척이라도 해야 할 텐데 혼자 독야청청이었다. 이 선수는 데이터도 안 보는지, 원. 우 실장은 혀를 차면서 차에서 내렸다.

협상 장소는 구경남이 속한 드래곤스라는 지방구단이었다. 한때는 잘 나가던 팀이었지만 지금은 빙하기에 접어들었다. 주축 선수들은 대부분 삼십 대를 넘었고, 갓 들어온 신인급 선수들은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덩달아 그룹에서 주는 지원금도 삭감됐다. 한마디로 빼먹을 거 하나 없는 단물 다 빠진 알사탕 같은 곳이었다.

우 실장은 회색 코트를 챙겨 입고 앞머리를 뒤로 쓱 넘겼다. 그리고 항상 가져 다니는 검은색 서류가방을 챙겼다. 처음 사회생활을 하던 때부터 써오던 가방이다. 첫 월급을 받아서 큰맘 먹고 장만했다. 다른 선배들이 가지고 다니는 서류 가방이 그렇게 멋져 보일 수 없었다. 세월이 지나서 좀 낡긴 했지만 언제나 품에 지니고 다니는 우 실장의 마스코트다. 

구경남 선수는 로비에 서 있다가 우 실장을 보고 살짝 고개를 숙였다. 얼굴은 잔뜩 인상을 쓰고 있었다. 자신의 가치를 제대로 어필하지 못한다는 불만을 품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우 실장도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바로 협상을 하는 구단 사무실로 들어갔다. 여기서 쓸 시간이 많지 않다. 얼른 해치우고 메이저리그 포스팅에나 집중할 계획이었다.

“아이고, 우 실장님, 사진 잘 받으시데?”

드래곤스의 용 단장이 과장된 제스처로 맞아줬다. 상의는 구단의 상징인 파란색 점퍼를 목이 있는 곳까지 쭉 끌어올려서 입고 있었고, 하의는 검은색 정장 바지 차림이었다. 다리가 짧아서 바닥에 붙어있는 모양이었다. 운동화는 흰색 러닝화였다. 좀 괴상한 차림이지만 야구단 직원들 대부분이 이런 복장으로 일했다.

“단장님, 별말씀을요. 저야말로 지난번 유튜브 라이브 잘 봤습니다.”

“어휴, 말을 말아요. 요즘은 야구단 단장이 아니라 완전 유튜버라니까. 팬들 댓글에 일일이 답변하다 보면 혀가 꼬여요.”

용 단장은 허허 웃음을 지으며 손을 휘저었다. 하지만 기분이 좋은 듯 눈은 반달이 됐다. 눈 옆으로 깊게 팬 주름이 보였다. 그 모습이 용 단장과의 지나온 시간을 말해주는 것 같았다.

드래곤스 구단의 용우영 단장과 안지 벌써 삼십여 년 가까이 됐다. 우 실장이 있던 고등학교 야구부에 스카우터 자격으로 찾아왔을 때 처음 봤다. 당시만 해도 스카우터는 프로에 입단을 시켜줄 수 있는 전지전능한 신과 같은 존재였다. 까까머리 선수이던 우 실장은 먼발치에서 꾸벅 인사를 건넸을 뿐이다.

이후 용 단장은 야구단에서 이런저런 경력을 쌓더니 단장 자리까지 꿰찼다. 선수를 보는 안목이 인정을 받았다. 최근엔 구단의 유튜브 라이브에도 활발하게 참여하고 있었다. 명목은 팬들과의 소통이지만 실상은 그룹에 어필하기 위해서라는 걸 알 사람들은 다 알았다. 팀성적이 추락하면서 용 단장은 자신의 자리도 위태롭다고 느낀 듯했다.

용 단장과 악수를 하고 소파에 앉았다. 자리에 앉으니 창 너머로 드래곤스의 홈구장인 무진 야구장의 전경이 펼쳐졌다. 오프시즌을 맞아 그라운드 곳곳은 보수 공사 중이었다. 군데군데 방수포 같은 게 덮여 있었다. 하지만 녹색 그라운드는 언제 봐도 아름다웠다.

구경남 선수는 우 실장의 옆에 퍽 소리를 내면서 앉았다. 일부러 인상을 잔뜩 쓰고 다리까지 꼬고 있었다. 구단에 자신의 불만을 표현하려는 모양이었다. 어린애 같기는. 우 실장은 선수 쪽은 무시하고 협상을 시작했다. 미워도 우리 선수니까. 최대한 선수의 가치를 설명하려고 했다.

하지만 이날 협상도 지지부진했다. 구단은 처음에 정했던 금액에서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급할 것 없으니 얼마든지 다른 팀을 돌고 오라는 기색도 분명했다. 선수는 옆에서 얼굴이 빨개져 듣고 있다가 먼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실장님, 그만 가시죠.”

 우 실장은 용 단장의 얼굴을 쳐다보면서 쓴웃음을 지었다.

“단장님, 아무래도 선수가 아직 준비가 안 된 것 같네요.”

“네네, 그러시겠죠. 천천히 진행하시죠, 뭐. 겨울은 길잖아요. 안 그래, 구경남?”

용 단장은 아쉬울 것 없다는 표정으로 선수를 쳐다봤다. 선수는 단장의 시선을 외면하더니 불쑥 문을 열고 빠른 걸음으로 나가버렸다.     

구경남 선수는 복도에 서서 야구장 밖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흥분했는지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입에선 하얗게 김이 뿜어져 나왔다. 야구장 복도는 야외로 뻥 뚫린 개방형 콩코스 구조였다. 갑자기 바람이 불어서 몸을 움츠리게 했다.

우 실장은 크게 한숨을 쉬고 선수의 옆에 섰다. 잠시 그대로 둘이 나란히 서서 야구장 밖을 쳐다봤다. 멀리 8차선 대로를 지나가는 차들이 보였다.

“실장님, 너무 하신 거 아녜요? 에이전트면 선수 편을 들어야죠.”

선수가 결심을 한 듯 갑자기 우 실장에게 고개를 돌리며 쏘아붙였다. 우 실장은 가만히 다음 말을 기다렸다.

“아니, 제 장점을 정당하게 어필을 하셔야죠. 구경남하면 타점이잖아요. 가을 사나이 구경남 아닙니까? 에이전트가 이래서야 어디 믿고 계약하겠어요?”

저놈의 타점 타령. 우 실장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우 실장의 반응에 구경남 선수는 자존심이 상한 듯 버럭 소리를 질렀다.

“실장님! 지금 선수 무시하세요? 네?”

“이봐요, 경남 씨. 지금 타점 얘길 할 때가 아니잖아요. 타점은 예전에 중심타자 칠 때 얘기고, 지금 상황에 맞춰서 유리한 데이터를 내밀어야죠. 선수님은 데이터도 안 보세요?”

“지금도 타점 충분히 올리잖아요. 네? 자꾸 이러시면 저 에이전트 계약 해지합니다!”

선수는 아예 악을 쓰면서 협박했다. 흥분한 듯 침을 튀기며 소리치고 있었다. 우 실장은 선수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생떼를 부리는 어린아이를 보는 기분이었다.

타점. 그래, 좋지. 하지만 타점은 기본적으로 운이 필요한 기록이다. 한때 구경남이 중심타선에 들었을 땐 신나게 타점을 올리던 시절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처럼 벤치 워머 신세면 타점을 올릴 기회는 더 줄어들기 마련이다. 나이를 먹으면서 장타력도 뚝 떨어졌다. 구단도 당연히 그런 점을 잘 알고 있다.

선수와 같이 싸울 수는 없는 노릇이라 차분히 타일렀다. 타점도 좋지만 지금은 다른 가치를 어필해야 한다, 아직 출루를 할 수 있는 선구안이 있고 외야 수비도 살아있다는 걸 보여줘야 한다, 고참으로서 솔선수범하는 모습도 보여줘야 한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 구단 제시액보다 많은 금액을 받긴 힘들다고 말해줬다.

하지만 선수는 막무가내였다. 무조건 지금 금액보다 두 배 이상 받아오라고 다그쳤다. 그러더니 마지막엔 “실장님, 제가 이 팀에서 뛴 세월이 얼마인데요. 저와의 정을 생각해서라도 이러면 안 되는 거 아닙니까? 네?”라며 우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 결국은 정에 호소하는구나. 우 실장은 쓴웃음이 나왔다. 이보세요, 선수님. 그렇게 오래 뛴 구단에서 당신에게 매긴 금액이 겨우 그 정도예요. 이렇게 쏘아붙이고 싶었다.

어깨를 축 늘어뜨린 선수를 대충 달래서 차에 태워 보냈다. 최고급 외제 스포츠카였다. 자신의 분수에 맞지 않는 차를 타는 선수의 뒷모습을 한심하게 쳐다봤다.

그래, 에이전트 없이 한번 잘해봐라. 멀어지는 선수의 차를 보면서 중얼거렸다. 가뜩이나 시간도 없는데 저런 삼류 선수에게 매달리는 건 자신에게도 손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올라오는 차 안에서도 착잡한 기분이 이어졌다. 왜 선수들은 자신의 가치를 냉정하게 평가하지 못할까? 대부분의 선수들은 자신의 가치를 과대평가한다. 잘 나갈 땐 그런 걸 자신감이라고 부르지만 나중엔 결국 오만으로 돌아온다.

어린아이처럼 떼를 쓰는 선수의 모습에서 한철의 얼굴이 겹쳤다. 왜 그렇게 자신의 상황을 알지 못하는지. 답답한 마음이 들어 저절로 인상이 써졌다. 

핸드폰을 열어 어제의 기사를 클릭했다. 대형 계약을 맺은 A 선수의 사진 옆에 우 실장의 얼굴도 보였다. 우 실장의 얼굴은 선수만큼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비로소 마음이 가벼워졌다. 우 실장의 입장에서 구경남 같은 선수는 뺄셈이고 A 같은 선수는 덧셈이다. 에이전트는 그냥 냉정하게 덧셈, 뺄셈만 잘하면 되는 거였다.

그 바로 아래 기사에 ‘한국 야구의 위기’라는 타이틀이 보였다. 안 봐도 뻔했다. 시장 규모에 비해 선수 몸값이 비싸졌고, 그 중심엔 우 실장 같은 에이전트가 있다는 논리. 대꾸할 가치도 없는 주장이었다. 자신 같은 에이전트는 선수의 권리를 찾아주는 가드 같은 존재다. 다들 부러워서 하는 소리지.

우 실장은 혀를 끌끌 차면서 창밖을 봤다. 밖의 풍경이 아주 빠르게 뒤로 스쳐갔다. 이대로 인생의 액셀을 밟고 질주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이전 04화 우실장과 웃기는 외야석-1막.원아웃 2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