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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강D Sep 27. 2024

우실장과 웃기는 외야석-1막.원아웃4

1막. 원아웃 4

차례.     

프롤로그.

서울의 외야석

   원아웃

   투아웃

제주의 그라운드

   - 1

   - 2

   - 3

다시웃기는 외야석

에필로그.


전날 새벽에 집에 와서 위스키를 들이켰다. 바보 같은 협상에 매달리느라 너무 기를 써버린 것 같았다. 냉장고에서 식은 계란말이를 꺼내서 안주삼아 벌컥벌컥 마셨다. 마시다 보니 꽤 많은 양을 비웠다. 

덕분에 늦잠을 자버렸다. 눈을 떠보니 해는 벌써 중천에 떠 있었다. 슬쩍 거실로 나왔다. 소파엔 패잔병 무리들이 너부러져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괜히 심술이 나서 쿵 소리가 나게 발을 내디뎠다. 가장은 밖에서 힘들게 일하고 왔는데 말이야. 

하지만 다들 우 실장을 못 본 척했다. 나타나면 안 될 사람이 나타난 듯 거실 분위기는 차갑게 얼어 있었다.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컵도 없이 마셨다. 미선이 이쪽을 쓱 보면서 물었다.

“여보, 식사는 어떻게 -”

“됐어!”

만만한 미선에게 쏘아붙였다. 우 실장의 한 마디에 미선은 금방 풀이 죽었다. 요즘 들어 미선의 기가 부쩍 약해졌다. 혼자 웃다가 금방 또 혼자 우울해진다. 설마 벌써 갱년기인지…….

우 실장은 서재로 들어섰다. 테이블 앞에 있는 의자에 기대앉아 서재를 둘러봤다. 나만의 공간이다. 이 집으로 오면서 마련한 곳이다. 책장은 최고급 목재로 주문했다. 두꺼운 원서들도 가득이었다. 물론 장식용이었다. 한 번도 펴보지 않아 아직 새 책 냄새가 났다.

서재 한편엔 라텍스 재질의 매트리스가 깔린 우 실장의 침대가 놓여 있었다. 미선과는 자연스럽게 각방을 쓰게 됐다. 이 정도 나이가 되면 각자 자는 게 편하다.

그때 열린 문틈 사이로 핑키가 달려왔다. 이 집에서 우 실장을 반겨주는 유일한 식구다. 핑키를 안고 잠시 쓰다듬었다. 배를 간질여주자 몸을 뒤집었다. 핑키가 가장 좋아하는 자세다.

핑키는 올해 일곱 살이 된 강아지의 이름이다. 중학생이 된 한별이 졸라서 사줬다. 요크셔테리어라는 종이라고 했다. 태어나서 처음 들어보는 품종이었다. 한별은 그렇게 강아지를 사달라고 조르더니 금방 싫증을 냈다. 어느새 핑키는 뒷전으로 밀렸다. 핑키를 보면 괜히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뒷전으로 밀린 핑키의 모습에서 자신의 얼굴이 겹쳤다. 가끔씩 밥을 챙겨주다 보니 핑키도 우 실장을 따랐다. 그렇게 둘은 이 집에서 가장 가까운 친구 사이가 됐다.

잠시 핑키와 놀아주다 자리를 잡고 앉았다. 다음 날 있을 출장을 준비해야 했다. 중요한 출장이다. 이번 미국 출장에서 미리 메이저리그 구단의 담당자들을 만날 계획이었다. 은근히 포스팅에 대한 의향도 떠볼 생각이다. YJ 엔터테인먼트의 앞날이 걸린 계약이다. 우 실장, 자신의 미래도.     

다음 날 조금 늦게 일어났다. 괜히 설레서 늦게 잠이든 탓이었다. 불을 끄고 침대에 눕자 감회가 새로웠다. 눈을 감으니 지나간 시간이 주르륵 펼쳐졌다.

정말 열심히 일했다. 여기저기 출장도 많이 다녔다. 항상 누군가를 모시고 다녔다. 머리를 조아리는 게 습관이었다. 일단 고개부터 숙였다. 선수 출신으로서 자신을 어필할 수 있는 방법은 그것뿐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언제나 철저했다. 상대방의 의중을 파악하고 먼저 움직이려 노력했다. 의전은 한국에서 월급 생활을 하는 비즈니스맨의 기본이다, 처음 회식 때 도 대표에게서 들은 충고였다.

그리고 드디어 중요한 출장에 오르게 됐다. 다음 고지가 저기 눈앞에 있다. 스스로 대견한 마음이 들었다. 치열한 전투에서 살아남아 피라미드의 가장 꼭대기에 섰다.

결국 뒤척이다 새벽녘에 간신히 잠들었다.

눈을 비비며 천천히 식탁에 앉았다. 슬쩍 보니 애들은 아직 자고 있는 모양이었다. 하여간 가장이 출장을 간다는데 다들. 입맛을 다시며 자리에 앉았다.

숟가락을 들어 밥을 한입 떠 넣었다. 입에 삼키는 밥이 썼다. 매번 집에선 기분이 상한다. 자신 있게 뭔가를 하려고 하면 무언가가 막아선다. 밖에선 날개를 달고 어깨를 활짝 펴지만 집에선 널찍한 강이 흐르는 기분이다.

화장실에 가서 거울을 봤다.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거울에 비친 얼굴을 보니 흐뭇한 기분이 들었다. 피부는 반들반들 빛나고 눈동자는 자신감으로 차 있었다. 성공, 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흐뭇하게 웃으며 고개를 돌리는데 세탁물 가장 위에 마누라 팬티가 걸쳐있었다. 소스라치게 놀라며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결혼에 대한 환상이 깨진 건 한참 전이지만 기본적으로 지켜야 할 건 지켜야 하지 않을까. 속옷 정도는 모아놨다가 따로 빨던가 해야지.

그러고 보니 마누라가 여자라는 사실조차 잊은 지 오래다. 부부관계도 언제 했는지 기억에 없다. 결혼 전 미선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분명 뭔가에 반해서 결혼을 했을 텐데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거실로 나와서 미선을 째려봤다. 미선은 싱크대 앞에 멍하니 서서 창밖을 쳐다보고 있었다.

요즘 들어 미선이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사는지 모르겠다. 혼자 멍하니 있다가 크게 한숨을 쉬는 일도 잦았다. 화초를 키우는 취미가 생긴 것 같은데 언제부터 시작했는지는 알지 못했다. 베란다엔 이름 모를 풀들만 풍성했다.

얼마 전 새벽엔 물을 마시러 나오다 미선 혼자 물끄러미 창밖을 쳐다보고 있는 광경을 봤다. 미선은 불도 꺼 놓은 채 한참 창밖을 바라봤다. 그리고 노래를 중얼거렸다. 대충 이런 노래였다.     

아이 캔트 크라이(I can’t cry), 아이 캔트 크라이

그래 널 보내주겠어

그 무엇도 바라지 않아     

어디서 들었던 노래더라, 하고 머리를 굴리고 있는데 갑자기 미선이 훌쩍이기 시작했다. 볼을 타고 눈물이 한 방울 또르르 떨어졌다. 필름을 느리게 돌린 영화의 한 장면처럼 그 순간이 아주 천천히 재생됐다. 새벽에 혼자 노래를 부르다가 흐느끼다니… 보면 안 될 모습을 본 것 같아 조용히 방문을 닫고 침대에 누웠다. 가슴이 허했지만 애써 모른 척했다.

어디쯤에선가 아내와 인생이 엇갈린 느낌이다. 언제부터였을까. 분명하진 않지만 꽤 먼 일인 것 같았다. 되돌리기엔 늦었고 그럴 의지도 없다. 지금은 사회에서 내 자리를 지키기도 벅차다. 감정의 낭비는 은퇴 후에 해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원래 인생은 외로운 법이니까.

서재 앞 베란다에 서서 창문을 열었다. 날씨가 추워서 저절로 어깨가 부르르 떨렸다. 하늘에선 눈이 내리고 있었다. 눈이 내리는 방향을 따라 바닥을 내려다봤다. 땅엔 이미 눈이 쌓이고 있었다.

잠시 멍하니 땅바닥에 눈이 쌓이는 모습을 봤다. 여기서 저기까진 아주 멀어 보였다. 설마 저 바닥까지 추락하는 일은 없겠지. 어깨를 떨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베란다 창문을 닫고 돌아서는데 먼지 한 톨 없는 깨끗한 아파트 구석 어디선가 냄새가 올라왔다. 매일매일 승패를 주시하고 결과를 수치로 바꾸는데 능숙한 우 실장은 이 냄새가 어떤 것인지 알 것 같았다.

실패의 냄새.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실패한 결혼 생활이다.

인생의 원아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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