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막. 제주의 그라운드. 1루 ep2.
차례.
프롤로그.
서울의 외야석
- 원아웃
- 투아웃
제주의 그라운드
- 1루
- 2루
- 3루
다시, 웃기는 외야석
에필로그, 홈.
*
멀리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 커튼이 제대로 쳐져 있지 않은지 따가운 햇살이 눈을 찔렀다. 새가 지저귀는 소리도 들렸다. 머리가 무거웠다. 머리에 돌이 하나 얹어 있는 느낌이다. 좀 더 자고 싶다. 하지만 눈에 비친 햇살 때문에 저절로 인상이 써졌다.
“아이 씨, 커튼 좀 쳐!”
소리를 질렀다. 누군가 와 주실 바랬다. 하지만 아무도 반응이 없다.
“내 말 안 들려?”
짜증을 내면서 일어났다. 옆에 누가 있으면 가만히 두지 않으리라.
하지만 일어나다가 머리가 무언가에 부딪혔다. 쿵 소리가 나면서 머리엔 극심한 통증이 느껴졌다. 머리를 비비며 올려다봤다. 위층 침대였다. 거기에 머리를 부딪쳤다. 주변을 둘러봤다. 우 실장이 누워 있는 곳은 도미토리 침대의 1층이었다.
맞다. 서서히 현실감각이 돌아왔다. 여기는 제주도의 게스트하우스였지.
머리를 비비면서 생각했다. 어쩌다 여기까지 오게 됐을까. 지난 일들이 꿈처럼 느껴졌다. 불과 얼마 전만 해도 잘 나가는 스포츠 에이전트였는데… 그리고 한강에 빠진 한철이는 어떻게 된 걸까? 아무래도 여긴 뭔가 뒤틀린 세계인 것 같았다. 우선 주변 상황을 체크해 봐야겠다. 우 실장이 여기에 있는 이유가 있을지도 모른다.
방을 둘러봤다. 좁고 조악한 방이다. 조그만 방에 이층 침대 두 개가 놓여있다. 최대 네 명까지 구겨져서 자는 방인가 보다. 이런 단체 생활은 야구부를 그만둔 후엔 처음이다. 야구부 시절 사내들끼리 포개져서 자는 생활에 질려버렸다.
벽지는 흰색인데 꼴에 천장은 파란색이다. 구름 모양의 장식과 야광으로 빛을 내는 별 모양의 스티커도 붙어 있었다. 빈약한 상상력에 코웃음이 났다. 이거야 원, 어린이집 침실도 아니고.
침대와 침대 사이에 자신감 없는 모습으로 서랍장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그 위에 오래돼 보이는 라디오가 하나 놓여있다. 라디오라니… 이 사람들 현실 감각하고는. 라디오라는 물건을 마지막으로 본 지가 대체 언제인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정말 작동이 되나 싶어 전원 스위치를 눌렀다. 치지직 소리와 섞여서 노랫소리가 들렸다.
잠시 음악을 들어봤다. 딴다라 딴다 딴다~ 저 독특한 리듬 어디서 들었더라. 오블라디 오블라다… 가사도 익숙했다.
“네, 최양락의 재밌는 라디오. 신림동 김말순 씨의 신청곡, 비틀즈의 오블라디 오블라다였습니다. 언제 들어도 신나는 곡이죠. 오블라디 오블라다는 자메이카 말인데요, 뭐 그런 거지, 별 수 있겠어, 정도의 뜻이라네요. 우리 사는 것도 비슷하겠죠? 별 거 없죠, 하하하.”
음악이 끝나자 DJ의 멘트가 이어졌다. 촐싹대는 말투. 분명 한물간 개그맨이다. 한동안 텔레비전에서 안 보이더니 라디오에 정착한 모양이다. 그나마 피신처가 있어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잠시 DJ의 멘트를 들었다. 조금 뒤 DJ만큼 촐싹대는 게스트가 나오더니 오두방정을 떨면서 사연을 소개했다. 이런 삼류 만담이라니… 혀를 끌끌 차면서 라디오를 껐다.
한숨을 푹 쉬면서 거실로 나왔다. 벽엔 여전히 어제의 그 가족사진이 걸려 있었다. 꿈이 아닌 모양이다. 가운데엔 기분 나쁜 낯선 남자의 모습도 그대로였다. 남자의 얼굴을 소심하게 흘겨봤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부엌에선 한별과 한철이 토스트를 만들고 있었다. 둘이 함께 뭔가를 하는 건 처음 봤다. 원래 집에서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는 아이들이었다. 나란히 서 있는 모습도 낯설었다.
“어, 아저씨, 일어나셨어요?”
한철이 돌아보며 인사를 건넸다. 저놈이, 아저씨라니… 끙 하고 한숨을 쉬었다.
그러고 보니 한철이 말을 더듬지 않는다. 더군다나 우 실장을 보고 방글거리면서 웃기까지 한다. 내가 아는 아들놈이 맞나. 낯설어 한참 쳐다봤다.
“왜요? 아저씨? 저 잘생겼죠? 우리 아빠 닮아서. 하하하.”
되지도 않는 농담까지 한다. 더군다나 현재의 아빠라면… 고개를 돌려 슬쩍 사진을 쳐다봤다. 그리고 고개를 저었다. 하나도 안 닮았다.
토스트를 하나 들고 마당으로 나왔다. 한입 와삭 베어 물었다. 입에서 달착지근한 소스와 함께 양배추가 아삭 씹혔다. 우물우물 씹어봤다. 맛이 꽤 괜찮았다.
아침에 체크인을 하고 거실에 있는 컴퓨터로 검색을 했다. 우형진이라는 이름을 넣었지만 아무 정보도 나오지 않았다. 회사 홈페이지에서도 자신의 이름은 없었다. 마치 세상에서 자신의 존재가 지워진 것 같았다.
토스트를 먹으며 주변을 둘러봤다. 우선 이곳이 어떤 곳인지 세밀한 조사가 필요했다. 각종 데이터를 수집해서 분석해야겠다. 이곳은 가상현실이나, 그 비슷한 곳일지도 모르니까. 그런 영화를 본 기억이 났다.
돌아가야 돼. 무슨 경기인가 그것만 마치면 분명히 돌아간다고 했으니까. 우 실장은 그대로 앉아서 멍하니 마당의 잔디밭을 쳐다봤다. 푸릇한 잔디가 반짝였다. 바람을 타고 풀 냄새가 났다. 잔디 관리 하나는 잘했네. 누가 어떻게 관리를 했을까. 돈은 또 얼마나 들었을지.
돌담으로 어설프게 쌓아놓은 대문을 지나서 나왔다. 입구에 아기자기한 글씨로 ‘별이와 철이의 말랑말랑 게스트하우스’라고 적혀 있었다. 누군가 직접 손으로 쓴 글씨 같았다. 누가 썼을까? 미선? 한별? 설마 한철? 아무리 생각해도 가족들의 글씨체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돌담길을 따라 걸었다. 돌담 사이로 이름 없는 들꽃들이 피어있었다. 샛노란 유채꽃도 보였다. 그 뒤에 피어있는 흰색 꽃은 이름이 뭐더라. 어디서 본 기억이 나는데.
언젠가 들은 말이 생각났다. 제주에 색시를 데려오려면 봄에 데려오라고. 그만큼 아름다운 계절이었다. 제주의 봄은.
흙길을 따라 걸었다. 발밑에서 아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흙을 밟아본 지도 오래된 것 같았다. 도시에선 아스팔트뿐이다. 흙을 밟을 일은 전혀 없다. 신발에 밟히는 거친 느낌이 낯설었다. 어릴 땐 집 앞바다에서 물장구를 치던 소년이었는데.
우 실장의 고향은 여수 돌산도였다. 집에서 조금만 걸어가면 바닷가가 나왔다. 밤이 되면 솨아솨아 파도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가 무서워 어머니에게 달려가면 어머니는 품으로 꼭 안아줬다.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셨다. 얼굴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머니는 돌산도 끄트머리 바닷가에서 조그만 민박을 하면서 갓김치를 만들어 팔았다.
동네 친구들과 물장구를 치고 놀았다. 물장구를 치다 지치면 바위에 붙은 굴을 따서 먹었다. 비릿한 맛이 싫었지만 주린 배를 채울 수 있었다. 생굴은 입 안에서 비릿한 바다 향을 토해냈다. 그 향이 싫어서 대충 씹고 입에 꿀꺽 삼켰다. 그리고 다시 친구들과 물장구를 쳤다.
돌산도는 언제나 조용했다. 그 안에서 하루는 아주 길었다. 동네 아이들이라 봐야 몇 명 되지 않았다. 그 아이들 이름이 뭐였더라.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때 그 소년이 정말 나였을까. 낯설다. 남의 어린 시절을 훔쳐보는 기분이다.
갑자기 컹컹거리면서 개가 짖는 소리가 들렸다.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있던 우 실장은 깜짝 놀라 정신을 차렸다. 본능적으로 뒷걸음질을 쳤다. 덩치가 커다란 흰 개가 우 실장을 보고 미친 듯이 짖고 있었다. 개의 목엔 아무것도 달려있지 않았다. 마음만 먹으면 바로 달려들 기세였다. 우 실장의 몸이 움츠러들였다. 동시에 짜증이 났다. 이런 안전 불감증 같으니라고. 사람이라도 물면 어쩌려고. 시골 사람들의 무식함에 짜증이 났다.
슬금슬금 뒷걸음을 쳤다. 개를 만나면 시선을 피하지 말고 몸을 크게 만들면서 뒷걸음을 치라는 말을 들은 것 같았다. 개가 아니라 곰이었나. 지금 상황에서 따질 일은 아니다.
“홍홍홍.”
그때 안쪽에서 할머니 한 명이 웃으며 나왔다. 미친 듯이 짖던 개가 언제 그랬냐는 듯 꼬리를 살랑이며 애교를 부렸다. 가증스러운 개였다.
허리가 굽은 꼬부랑 할머니였다. 꼬부랑 고갯길을 꼬부랑 넘어갈 수준이었다. 요즘 세상에 저렇게 허리가 굽은 노인을 보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우 실장은 이때다 싶어 도망가려고 했다. 하지만 할머니가 먼저 말을 시켰다.
“여행 온 사람인가? 홍홍홍.”
“네? 아, 네, 뭐 그냥…”
대충 얼버무렸다.
“저기 별이네 손님인가 보구먼.”
할머니는 자글자글 웃으며 말을 걸었다.
“참말로 좋은 사람들이구먼. 애들도 착하고, 인사도 잘하고, 애 엄마도 착하고, 애 아빠도 참 좋은 사람이었는디…”
할머니가 뜬금없이 하늘을 쳐다보며 회상에 잠겼다. 아마 미선 네를 보고 하는 말인 것 같았다.
“잠깐만 기다려보라고.”
할머니가 안으로 쓱 들어가 버렸다. 꼬리를 치던 개가 다시 태세를 전환해 으르렁거리기 시작했다. 야, 인마. 우 실장도 투덜거리며 다시 방어모드로 전환했다.
개가 있는 쪽을 경계하면서 할머니가 들어간 곳을 관찰했다. 자세히 보니 선반에 과자 몇 가지와 각종 통조림이 놓여 있었다. 입구엔 조그맣게 ‘가게’라고 적혀있었다. 누군가 손으로 휘갈긴 글씨였는데 그마저도 거의 지워져 있었다. 동네 구멍가게인 모양이다. 가게 천장은 누렇게 빛이 바랜 천막이 가리고 있었다. 태풍이 오면 날아가 버릴 모양새였다. 가게 한 구석엔 냉장고도 세워져 있었는데, 그 안에 음료수는 전부 뒤집어져 있었다.
얼마나 오래됐기에. 기겁을 하고 있는데 할머니가 음료수를 하나 가지고 나왔다.
“별이네 손님이면 잘해줘야지. 홍홍홍.”
할머니가 자글자글 웃으며 음료수를 내밀었다. 노란색 바탕에 빨간 포인트의 캔, 쌕쌕이었다. 우 실장이 쌕쌕이라는 음료수를 마지막으로 본 지 십 년은 훌쩍 넘은 것 같다. 이 추억의 음료가 제주의 한 구멍가게 냉장고에선 아직 존재하는 모양이다.
계속 쳐다보는 할머니의 시선이 느껴졌다. 칭찬을 바라는 아이의 표정이다. 할 수 없이 캔을 따고 조금 마셨다. 조금 있다가 뱉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맛있었다. 귤 알알이 입에서 터졌다. 캔 바깥엔 제주산 감귤 함유라는 문구가 자랑처럼 새겨져 있었다. 내가 알던 그 쌕쌕이 맞나. 깜짝 놀라 할머니를 쳐다봤다.
“목마르면 또 오더라고. 상추도 있는데 그것도 줄까?”
할머니가 다시 가게로 들어가려고 했다.
“아, 아닙니다. 잘 마시겠습니다.”
재빨리 대답하고 돌아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