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막. 투아웃 4
차례.
프롤로그.
서울의 외야석
- 원아웃
- 투아웃
제주의 그라운드
- 1루
- 2루
- 3루
다시, 웃기는 외야석
에필로그, 홈.
다음 날도 좀 늦은 시간에 일어났다. 침대에서 일어나 창밖을 보면서 기지개를 켰다. 전날 마신 술 때문인지 약간의 두통이 느껴졌지만 기분은 훨씬 나아진 것 같았다. 어깨를 누르던 무거운 것도 조금 가벼워진 느낌이었다.
창밖을 보면서 잠깐 생각에 잠겼다. 지난 며칠간의 일들이 생각났다. 계속 이렇게 살 순 없잖아. 이제 뭐라도 해야지. 머릿속으로 그런 생각을 했다.
그때 전화기가 울렸다. 처음엔 몰랐다. 전화기의 존재 자체를 잊고 살았던 것 같다. 벨소리가 낯설었다.
조금 망설이다가 액정을 확인했다. 대학 야구부에 있는 지웅 선배였다. 한철이 대학을 갈 때 도움을 줬던 사람이다. 우 실장과는 고등학교 때 같은 야구부에 있었다.
“야, 우탱. 너 괜찮아?”
선배는 전화를 받자마자 큰 소리로 물었다. 우탱이라는 별명도 오랜만에 들었다.
“어, 선배. 나야 뭐… 그럭저럭…”
선배는 우 실장에게 몇 마디 위로를 건넸다. 그러더니 잠시 뜸을 들이더니 천천히 말했다.
“근데 너 한철이 소식 들었냐?”
“무슨 소식?”
“한철이가 집에선 얘기 안 하지?”
선배는 우 실장이 전혀 모르던 한철의 대학 시절 이야기를 해줬다. 한철은 대학에서도 계속 야구부에 가입해 운동을 했다고 말했다. 초반엔 꽤 괜찮은 성적을 거뒀다. 대학리그에서 주목을 받았고 프로구단 스카우터도 관심을 가졌다고 했다.
“그런데 지난번 여름에 대학 조별 리그에서 말이야… 에휴.”
한철은 올여름 예선경기에 등판했다. 선발로 나와서 5회까지 꽤 괜찮은 공을 던졌다. 현장에 프로구단 스카우터도 와 있었다. 하지만 6회 원아웃을 잡은 뒤 일이 벌어졌다. 공을 던지던 한철의 어깨에서 갑자기 퍽 하고 뭔가가 터지는 소리가 났다. 덕아웃에서 들릴 정도로 큰 소리였다. 한철은 그대로 어깨를 잡고 주저앉았다.
“그때 현장에 있던 동생한테 들었는데, 한철이가 그렇게 서럽게 울더래. 아마 걔도 알고 있었겠지. 정말 끝장나 버렸다는 걸.”
한철은 그 이후 학교도 빠지고 방황하고 있다고 했다. 최근 프로구단에 테스트라도 보려고 여기저기 알아봤지만 모두 거절당해서 힘들어하고 있다고 했다.
“오죽했으면 나를 다 찾아왔겠냐.”
선배의 깊은 한숨을 끝으로 차가운 침묵이 흘렀다. 전혀 몰랐다. 바보같이. 아빠가 돼서 아들이 어떤 상황인지.
전화를 끊자 희미하게 생각이 났다. 지난 봄 한철은 평소와 달리 들뜬 기색이었다. 여자 친구라도 생긴 모양이라고 짐작했었다. 그리고 여름 이후엔 급격히 어두워졌다. 전부 연애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아마 기브스 같은 것도 했을지도 몰랐다. 아빠에게 보여주기 싫어서 숨겼을 한철을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해졌다.
동시에 화가 났다. 대체 야구가 뭐라고, 그따위가 뭐라고 이렇게 인생을 거는지. 얼마나 대단하기에 아빠에 이어 아들 인생까지 망치려 하는지. 야구의 신에게 따지고 싶었다. 대체 우리한테 왜 이러냐고. 모든 게 다 지긋지긋해졌다.
한철에게 전화를 걸어봤다. 하지만 전화를 받지 않았다. 거실로 나가봤다. 미선은 어디 나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그때 문자메시지가 왔다는 신호가 울렸다. 구경남 선수였다. ‘실장님, 저 어떻게 한 번만 더 잘 말씀 좀 잘해주세요. 이렇게 끝내긴 너무 아쉽잖아요.’이런 메시지였다.
이 친구는 요즘 뉴스도 안 보는지. 지금 상황에서 우 실장에게 그런 메시지를 보낸 선수가 황당했다. 동시에 그 메시지에서 한철의 목소리가 겹쳤다.
신발을 신고 밖으로 나갔다. 왠지 한철이 어디에 있는지 알 것 같았다.
잠실야구장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겨울의 잠실야구장은 스산한 분위기였다. 상점들 문은 대부분 닫혀 있었다. 하늘에선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겨울이라서 해가 일찍 떨어져 하늘은 어두워지고 있었다. 우 실장은 걸음을 재촉했다.
잠실야구장은 우 실장과 한철, 둘의 추억이 있는 공간이었다. 한철이 어린 시절 우 실장이 쉬는 날이면 한철과 지하철을 타고 잠실야구장으로 소풍을 왔다. 대부분 야구가 없는 월요일에 방문해서 야구장은 한산했다.
야구장 바깥에서 한철과 캐치볼을 했다. 야구장 바로 옆, 강변에 둘 만의 캐치볼 장소가 있었다. 당시 우 실장은 아직 프로에 속한 선수였다. 비록 2군 선수였지만 언젠간 잠실야구장에 서겠다는 꿈을 가지고 있었다.
“아빠, 아빠도 그럼 이제 텔레비에 나오는 거야?”
아직 말이 서툴던 한철은 아이스크림을 빨면서 그렇게 물었다. 한철은 아이스크림만 먹으면 언제나 똑같은 질문을 했다.
“그럼, 아빠가 텔레비에 나오면 한철이한테 몰래 사인을 보내줄게. 카메라에 대고. 어떤 사인을 보낼까? 손가락으로 브이(V)라도 만들까?”
우 실장은 한철을 보면서 브이를 만들었다. 그리고 씩 웃었다. 그땐 정말 그렇게 될 줄 알았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1군 마운드는 아무리 노력해도 닿을 수 없었다. 자신의 재능은 여기 까지라는 한계가 느껴졌다. 여기에 곧 부상이 찾아왔다. 점점 벤치를 지키는 시간이 늘어갔다.
구단에선 오래 기다려주지 않았다. 이미 이십 대 후반에 이른 우 실장은 그렇게 프로에서 쫓겨났다.
우 실장은 야구장 정문 뒤편을 지나 소방서가 있는 계단을 지나갔다. 그리고 바로 옆 강변으로 갔다. 정말 있었다. 한철은 그곳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한철의 뒷모습은 등이 굽은 동물처럼 보였다. 아주 작고 힘없는. 왼손으론 허공에 야구공을 튕기고 있었다. 머리카락은 비에 젖어 엉망이었다.
한철을 보자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곧 화가 치밀었다.
“야, 우한철.”
한철은 깜짝 놀라 쳐다봤다.
“아빠, 여, 여긴 어떻게?”
“지웅 아저씨가 알려줬어.”
“아…”
한철이 쓴웃음을 지었다.
“너, 왜 그렇게까지 집착을 하는 거야?”
한철이 고개를 들어 쳐다봤다. 우 실장의 목소리 톤이 좀 더 높아졌다.
“아빠 보고도 몰라? 안 되는 일은 안 되는 거야. 왜 그렇게 미련해? 야구 따위가 뭐라고?”
“그, 그런 얘기하려면 돌아가.”
“아니, 오늘은 반드시 결론을 내야겠어. 너까지 나 같은 패배자로 살면 안 되잖아!”
“만날 그, 그놈의 패배 타령. 인생에서 패, 패배 좀 하면 어때서? 어, 어차피 내 인생인데.”
한철도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이 자식이…”
우 실장이 한철의 손을 잡아끌었다.
“일단 가자.”
“싫어.”
“글쎄, 가자니까.”
한철은 우 실장의 손을 뿌리쳤다. 그리고 그대로 강변을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우 실장은 그 뒤를 쫓았다. 하늘에선 이제 비가 퍼붓고 있었다. 날도 어두워져서 시야가 좁아졌다.
한철은 그렇게 한참 달리다가 강둑 한가운데서 멈췄다. 그리고 우 실장을 돌아봤다. 한철의 눈동자는 흔들리고 있었다.
“제, 제발 날 좀 내버려 둬.”
“한철아, 일단 이리 와서 얘기하자.”
“시, 싫어. 난 아빠 같은 인생 살기 싫다고.”
한철의 말을 듣고 절망감이 들었다. 왜 이렇게 아이들은 마음을 몰라주는지.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숨을 몰아쉬며 한철이 있는 쪽으로 한걸음 나갔다.
그때 한철의 몸이 한쪽으로 기웃했다. 어어, 소리를 내면서 한철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한철을 끌어안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한철의 발이 미끄러졌다. 우 실장도 한철을 따라 몸이 미끄러졌다. 그대로 한강에 빠졌다. 물에서 허우적댔지만 바닥에서 어떤 강한 힘이 잡아당기는 것 같았다. 소리를 질러보려고 했지만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잠시 후 코를 통해서 물이 들어왔다. 의식이 조금씩 멀어져 갔다.
설마 이렇게 죽는 걸까. 정말? 이렇게 허무하게?
이렇게 내 인생은 쓰리 아웃이 되는 건가?
우 실장은 희미하게 생각하다가 정신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