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막. 제주의 그라운드 1루 ep1.
차례.
프롤로그.
서울의 외야석
- 원아웃
- 투아웃
제주의 그라운드
- 1루
- 2루
- 3루
다시, 웃기는 외야석
에필로그, 홈.
2. 제주의 그라운드
1루
“깨어나세요, 우 선수!”
누군가의 속삭임에 눈을 떴다.
“한철아!”
우 실장은 벌떡 일어나 아들의 이름을 외쳤다. 하지만 주변에 아들은 없었다. 멀리 파도소리가 들렸다. 코에선 시큼한 악취가 풍겨왔다. 옆을 봤다. 바로 옆에서 어떤 남자가 앉아 우 실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머리는 오랫동안 감지 않았는지 떡이 돼 있었고, 위엔 두꺼운 외투를 걸치고 있었다. 얼굴엔 지저분하게 검댕이가 묻어 있었다. 노숙자인 것 같았다.
노숙자는 우 실장을 빤히 쳐다보더니 노란색 봉투를 내밀었다. 그리고 미리 선수를 친다는 듯 손을 휘이휘이 내저었다.
“나한테 물을 생각 마. 난 아무것도 몰라.”
봉투를 열어보니 오만 원짜리 스무 장이 들어 있었다. 백만 원? 이 돈 가지고 뭘 하라고? 따지려고 고개를 드니 어느새 노숙자는 사라졌다.
모래사장을 뛰어서 큰길로 나왔다. 마침 모자를 쓴 남자들이 러닝을 하고 있었다. 남자 중 한 명에게서 전화기를 빌렸다. 바로 119 번호를 눌렀다. 하지만 전화기에선 이상한 멘트가 나왔다.
“우 선수, 경기를 시작합니다.”
“거기 119 아닌가요?”
잘못 들었나 싶어서 우 실장이 다시 물었다.
“그럼 경기 규칙을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멘트는 계속되었다. 우 실장은 전화를 끊고 이번엔 112에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여기서도 이상한 멘트가 이어졌다.
“경기 규칙은 간단합니다. 경기를 9회 차까지 완료하면 다시 홈으로 돌아옵니다. 진행비는 봉투에 있습니다.”
우 실장은 한숨을 쉬면서 전화를 끊었다. 아무래도 물에 빠져서 정신이 어떻게 된 모양이었다.
그때 멀리 조그만 간판이 보였다.
‘별이와 철이네 말랑말랑 게스트하우스’
별이와 철이라면… 우 실장은 설마 하고 중얼거리며 발걸음을 옮겼다.
작은 집이었다. 검은색 돌담으로 쭉 둘러싸여 있었고, 작은 집 세 채가 마당을 사이에 두고 둥글게 서 있었다.
돌담을 보니 알 것 같았다. 아마도 여긴 제주도인 것 같다. 이 집은 전형적인 제주도 집이다. 집은 오래돼 보였지만 마당의 잔디만은 파릇했다. 제주도라니… 대체 여긴 왜….
눈을 비비고 집을 둘러봤다. 낯익다. 어디선가 봤다. 머리를 굴렸다. 이 집은… 비로소 생각이 났다. 미선의 먼 친척이 살던 집이다. 미선이 은퇴하면 내려가서 살자고 몇 번 말했던 기억이 났다. 친척이 돌아가신 후에는 비어있다고 했다.
언젠가 미선의 집에 인사를 하러 왔을 때 멀찍이서 봤던 기억이 났다. 들어가 보지는 않았다. 언제 게스트하우스로 바뀐 걸까.
“누구세요?”
갑자기 안에서 말소리가 들렸다. 우 실장은 깜짝 놀라 담벼락에 몸을 숨겼다. 급하게 움직이다 돌담에 무릎을 부딪치고 말았다. 아파서 소리를 지를 뻔했지만 간신히 입을 틀어막았다. 하지만 목소리가 더 빨랐다.
“오늘은 예약 손님이 없는데…”
슬쩍 고개를 들었다가 깜짝 놀랐다. 미선이었다. 그리고 미선 뒤에서 방글거리면서 서있는 아이들은… 한별과 한철이었다!
순간 두 손을 추켜올렸다. 가족들이 이렇게 반가운 건 처음이다. 아주 오랫동안 못 본 기분이었다. 재빨리 달려가서 미선을 안았다. 눈에선 눈물이 핑 돌았다.
하지만 미선은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팔을 풀었다.
“손님, 되게 반가우셨나 보다.”
가장에게 손님이라니.
“아저씨, 혼자시죠? 이쪽으로 오세요.”
한철은 한 술 더 떠 아저씨라고 불렀다. 어버버 소리를 내면서 그 뒤를 따라갔다.
“우선 여기 앉아 계세요. 차 한 잔 가져다 드릴게요.”
미선이 우 실장에게 자리를 권했다.
자리에 앉아 천천히 거실을 둘러봤다. 작은 거실이었다. 인테리어도 소박했다. 아기자기한 가구가 몇 가지 있었다. 모두 원색이었다. 커튼도 직접 염색을 했는지 색깔이 독특했다.
우 실장이 살던 오십 평대 아파트 거실이 생각났다. 커다란 벽걸이 텔레비전과 소가죽으로 만든 소파, 멋들어진 샹들리에가 있던.
거실을 둘러보다 한편에 있는 가족사진에 눈이 갔다. 자신도 모르게 억 하는 소리가 나왔다. 미선, 한별, 한철이 있었고, 그리고 그 옆에 아빠 자리엔 경박한 자세로 브이 포즈를 하고 있는 어떤 낯선 남자가 있었다.
“저, 저분은…”
우 실장이 더듬거리며 물었다.
“저희 바깥사람이에요. 애들하고도 잘 놀아주고 참 자상한 분이셨는데, 몇 년 전에 급하게 땅콩을 드시다 그만…”
미선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아스라한 눈으로 사진을 쳐다봤다.
우 실장은 화가 치밀었다. 뭐야, 대체 이게 무슨 장난인지.
그때 사진 속에 있는 남자가 갑자기 눈을 부라리며 우 실장을 쏘아봤다. 깜짝 놀라 눈을 비비고 다시 사진을 쳐다봤다. 사진 속 남자는 아예 주먹까지 쥐고 까불지 말라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우 실장은 눈을 깔았다. 이건 아무래도 꿈인 것 같다.
“그런데 손님, 배는 안 고프세요?”
미선이 물었다.
그 말을 들으니 갑자기 배가 고팠다. 한동안 위스키 외에는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음식을 먹고 싶다는 생각 자체가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갑자기 허기가 몰려왔다. 배를 채우고 싶었다. 특히 바닷가라 그런지 신선한 회가 먹고 싶었다.
“살아 있는 게…”
“네?”
“살아 있는 게 먹고 싶다고 했다… 요.”
반말도 존대도 아닌 어색한 말투가 나왔다. 미선은 잠시 생각하다 한철을 불렀다.
“한철아, 손님 회 드시고 싶으신가 보다. 한수 옹한테 가서 횟감 좀 얻어와.”
한철이 투덜거리며 나갔다.
그래, 일단 회로 배를 채워보자. 뭘 먹어야 머리도 돌아갈 것 같았다. 제주도 바닷가니까 자연산 회가 나오겠지. 꿈이라면 깨기 전에 실컷 먹어야겠다.
그때 미선이 우 실장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눈이 마주쳤다.
“근데, 손님. 얼굴이 되게 낯익네. 혹시 우리 어디서 본 적 있나요?”
우 실장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드, 드디어 알아보는 거야?
“앗! 나 누군지 알 것 같아.”
그때 한별이 옆에서 소리쳤다. 우 실장은 만세를 부를 뻔했다. 사건이 해결됐다.
“엄마, 진짜 몰라?”
한별은 미선이 답답하다는 듯 다그쳤다. 미선은 여전히 고개를 갸웃했다.
“글쎄, 누구지…”
한별이 가슴을 두 번 치고 소리쳤다.
“얼마 전 예능에 나오던 그 느끼한 개그맨!”
개그맨? 우 실장은 깜짝 놀라 한별을 쳐다봤다.
미선이 이마를 탁 치며 소리쳤다.
“맞다. 그래서 낯이 익었구나!”
미선과 한별은 한 편이 되어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우 실장은 고독함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