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부터 비가 내리더니 아침까지 장대비가 쏟아지고 있다. 이제 장마가 시작된 걸까. 투둑 투두둑. 우산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에 리듬을 맞춰 걷는다. 6월의 이른 더위를 식혀주는 비가 반갑다. 어제는 오랜만에 집 근처 뚝방길을 달렸다. 달리기를 시작한 지는 두 달이 채 안되지만 요즘 그 매력에 푹 빠져있다. 달리기 이야기를 하려는 건 아니다. 비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어제 오후, 달리기를 하다가 비를 홀딱 맞았다. 처음엔 한 두 방울 떨어지는가 싶더니 어느새 빗줄기가 굵어지는 게 아닌가. 가까운 교각 아래 몸을 피했다. 좁은 교각 아래는 휴일 오후 자전거를 타러 나온 가족들과 달리기를 하던 사람들로 가득 찼다.
‘금방 그치겠지?’ 근거 없는 희망을 믿으며 가볍게 스트레칭을 했다. 비는 예상했던 것보다 오래 내렸다. 기다리던 사람들이 하나둘 빗속을 뚫고 달려 나갔다. 어찌해야 하나 시커먼 하늘만 올려다보다가 문득 소리를 들었다. 교각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를. 비는 몇 십분 전부터 계속 내리고 있었고, 내 귀도 이상은 없었다. 불과 1분 전까지도 들리지 않던 빗소리가 그제야 들리기 시작한 거다. 내가 인식하고 있다 여기는 세계란 것이 얼마나 불완전한 것인지 다시금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교각 아래서 빗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교각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는 요란하지만 시원했고, 둔탁하지만 위엄이 있었다. 언젠가 읽었던 소설의 문장이 떠올랐다. 내가 서 있는 현재의 빗소리와 소설 속 빗소리가 가만히 오버랩됐다.
인생을 한 번 더 살 수 있다면, 아마도 이모는 정방동 136-2번지, 그 함석지붕집을 찾아가겠지. 미래가 없는 두 연인이 3개월 동안 살던 집. 말했다시피 그 집에서 살 때 뭐가 그렇게 좋았냐니까 빗소리가 좋았다고 이모는 대답했다. 자기들이 세를 얻어 들어가던 사월에는 미였다가 칠월에는 솔까지 올라갔다던 그 빗소리... (중략) 그 뒤로 이모는 한 번도 그런 빗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매일 밤, 밤새 정감독의 팔을 베고 누워서는 혹시 날이 밝으면 이 사람이 감쪽같이 사라지는 게 아닐까 걱정이 되어 자다가 깨고, 또 자다가 깨서 얼굴을 들여다보고, 그러다가는 다시 잠들지 못하고, 또 움직이면 그가 깰까 봐 꼼짝도 못 하고 듣던, 그 빗소리 말이다. 바로 어제 내린 비처럼 아직도 생생한, 하지만 이제는 영영 다시 들을 수 없는 그 빗소리.
소설 <사월의 미, 칠월의 솔> 中, 김연수
들어본 적은 없지만, 함석지붕 위로 내리는 빗소리는 교각 위로 내리는 빗소리보다 가볍고 경쾌하지 않을까. 마치 실로폰으로 미와 솔의 음계를 두드리는 듯한. 그 음계 안에는 막 사랑을 시작한 20대 여자의 설렘이 녹아있을 것이다. 가볍고 경쾌해서 좋긴 하지만, 그래서 왠지 금세 깨져버릴 듯한 위태로움... 이루어질 수 없는, 유부남과의 불안한 사랑을 시작한 20대 여자에게 그 빗소리는 때론 설렘으로, 때론 불안으로, 때론 어떤 위로로 느껴졌을지 모른다. 뜨거웠던 3개월의 사랑은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오듯 이내 끝나버렸지만, 먼 훗날 자신의 인생을 돌아볼 때 다시금 돌아가고 싶은 시절... 여자는 빗소리로 자신의 가장 아름다웠던 시절을 기억하고 있었던 거다.
'사월의 미, 칠월의 솔'
빗소리를 묘사한 문장 가운데, 단연 내 마음을 울리는 표현이다. 빗소리를 어떻게 이렇게 표현할 수 있을까. 그것도 함석지붕 위로 내리는 빗소리라니...
나는 비를 그냥 맞기로 했다. 몸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가 듣고 싶어 졌다. 교각 아래 있던 나는 빗속으로 뛰어들었다. 몇 분을 달렸을까, 말 그대로 비 맞은 생쥐꼴이 되어버렸다. 얼굴 위로 흘러내린 비가 눈 속으로 계속 들어가 눈이 아린 것만 빼고는 다 괜찮았다. 비를 맞으며 달리니 왠지 케케묵었던 마음의 찌꺼기가 씻겨져 내려가는 것도 같았다. 마치 숙세의 카르마(Karma)를 씻어내기 위해 갠지스강에 몸을 씻는 인도 사람들처럼.
어쨌거나, 내 몸 위로 떨어진 빗소리는 어떤 음계였을까. 4월은 지났고, 7월은 아직 오지 않았으니... 6월의 파(fa) 정도는 되지 않을까. 아, 상상력과 표현력의 한계가 아쉬울 따름이다. 잠못 이루는 밤이면 스마트폰 앱의 빗소리를 들으며 잠을 잔다는 그 사람이, 여름 한낮 내리는 소나기처럼 불쑥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