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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틈이 열리고...

by 조혜영


12시간을 잤다. 피곤했나 보다. 피곤하다고 해서 12시간이나 자는 경우는 별로 없는데, 작정하고 마음을 내려놓았었나 보다. 무언가 붙잡고 있던 마음의 끈을 툭하고 내려놓았던 모양이다. 아침에 일어나니 오래 누워있던 탓에 몸이 살짝 무거웠지만 금세 개운해졌다. 어제 잠들기 전과는 세상의 공기가 사뭇 달라진 것도 같았다. 어제까지의 내 삶이 까마득히 멀게 느껴졌다. 과거의 기억이 지워진 채 갑자기 우주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오늘 아침, 나는 그렇게 다시 태어났다.


가벼운 차림으로 집을 나선다. 밤새 비가 내린 덕분에 촉촉해진 흙냄새가 기분 좋게 코를 자극한다. 살갗에 닿는 바람이 상쾌하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빛을 머금은 듯 평소보다 더 선명하다. 나뭇잎들이 바람의 움직임에 따라 채도와 명도가 다른 녹색으로 각기 변주된다. 숨을 깊이 들이마시니 폐가 한껏 부풀어 오른다. 방금 마신 커피 향기가 혀끝에서 진하게 들려온다. 언젠가 한 번은 경험해본 것도 같지만, 확실히 다른 질감이다. 세계의 층이 미묘하게 열린다. 닫혀있던 대기에 틈이 벌어진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내가 살고 있던 평행우주의 시공간으로 미끄러져 들어간다.


지금 여기, 이 순간의 세계를 포착하고 싶다고 생각한다. 사진가라면 사진을 찍을 것이고, 화가라면 그림을 그릴 것이다. 시인이라면 시를 쓰겠지. 재주가 없는 나는 어쩌지 못하고 멍하니 서 있다가 글을 쓰기로 한다. 이 향기와 색채, 빛과 질감, 섬세한 마음의 일렁임... 을 제대로 표현할 재간이 없다. 다만 위안이 되는 건 내가 지금 온전히 이것들을 느끼고 있다는 것, 그리고 이 느낌들을 어떻게든 백지 위에 기록하고 있다는 것. 언젠가 오늘의 글을 다시 읽게 될 때 지금의 세계가 다시금 눈앞에 펼쳐질 수 있도록. 이 느낌을 몸으로 다시 기억해낼 수 있도록. 그러다 문득 깨닫는다.


남아있는 나의 모든 날 동안, 무엇이 됐든, 나는 글을 쓰게 되겠구나.

그렇게, 나는 점점 자유로워지겠구나.


이것은 의지나 다짐이라기보다는 일종은 현현(顯現) 같은 거다. 완전히는 아닐지 모르지만 그동안의 긴 방황이 끝나가고 있음을 알아차린다. 가끔 듣는 음악 중에 해금 연주가 정수년의 ‘세상에서 아름다운 것들(Beautiful Things in Life)’이라는 연주곡이 있다. 지금 쓰고 있는 평면의 글을 3차원으로 느낄 수 있다면 배경음악은 이 곡으로 하고 싶다.


하늘.jpg


안타깝지만 오늘의 세계도, 순간의 느낌도 이내 사라져 버리고 말 것이다. 세상의 모든 것은 유한하니까. 그래서일까, 세상의 아름다운 것들은 어떤 슬픔을 동반한다. 사라져 버리기에 슬픈 것이고, 그렇기에 더욱 아름다운 것이니까. 늘 꿈꿔왔었다. 먼 훗날 세상을 떠나게 될 때, 상처나 아픔 같은 건 다 잊어버리고 온전한 기쁨만을 느끼며 이별할 수 있기를. 세상의 아름다운 것들을 더 많이 기억할 수 있기를.


어쨌거나, 나는 글을 쓴다.

세상의 슬픈 것들과 아름다운 것들을 기록하고 싶어서.

한동안 내가 지구별에 살았다는 것을 누군가 한 명쯤은 기억해주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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