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 18일차

by 채윤희

나의 오랜 친구 세연이 집으로 찾아왔다. 세연은 낮에는 피아노 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밤에는 작곡에 몰두하는 작곡가이다. 2년 터울이 나는 우리는 서로의 사춘기 시절부터의 삶의 궤적을 공유했다. 내 기억 속 세연은 언제나 어른스러운 면이 있었고 때마다 즐거운 일을 자신의 길로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작곡을 하고 싶다는 일념 하나로 고등학교를 고민 끝에 자퇴하고 연습에 매진해 자신이 원하던 학교의 클래식 작곡과로 입학하기도 했고, 졸업 후 한동안 게임 음악을 만들기도 했고, 요즘은 케이팝 작곡을 재미있게 하고 있다고 했다.


무슨 말을 하든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어떻게 그렇게 빛났나 헤아려 보니 세연의 모든 일상에는 호기심이 묻어 있었고 조급함이 없었다. 하루는 당근마켓에서 산책할 친구를 구해 하루 종일 산책을 했는데, 알고 보니 그 사람은 에세이 작가였고 통하는 구석이 많아서 그 뒤로도 자주 보는 친구가 됐다고 한다. 또 어떤 하루는 아파트 커뮤니티에서 요가 수업을 한다기에 그냥 한번 신청해 봤다가, 요가 고인물 할머니들 사이에서 헉헉거리며 땀을 빼고 왔다고 한다. 재미있어 보이는 데에 일말의 주저함이 없었다.


생각해 보면, 예전의 나도 그랬다. 궁금한 일이 생기면 망설이지 않고 뛰어들었고, 온몸으로 부딪히며 그걸 내 것으로 만들어 갔다. 그 모든 과정을 기꺼이 즐겼다. 그런데 요즈음은, 무엇이든 시도해 볼 수 있는 시간이 차고 넘치는데도 아무것도 시도하지 못하고 있다. 뭐가 됐든 그게 직업으로 연결되지 않으면 무용할 것이라는 생각과 큰 돈을 지출하면 안 될 것 같다는 불안함이 있다.


하고 싶은 일이라면 몇십만 원쯤은 고민 없이 써 버리던 내가, 무용한 것들의 가치를 누구보다 소중히 여기던 내가, 퇴사 하나로 그렇게 변해 버렸다는 사실이 나에겐 제법 충격이었다. 내 삶이 송두리째 변해 버렸다는 걸, 세연의 눈을 보다 느꼈다. 세연은 피아노 학원이 돈은 크게 안 돼도 도움이 되어 좋다 그랬고, 가계부를 열심히 쓰면서 지출을 관리한다고, 그렇게 하루를 보내면 충분히 즐겁다 그랬다. 이미 충만해 보였다. 디저트를 깨작이며 조용히 끄덕였다.


세연은 늦게나마 생일을 축하한다며 내게 귀여운 델피늄 한 다발과 엽서집, 그리고 편지를 선물했다. 편지에는 그런 내용이 있었다.


언니는 요즈음 내가 원하는 멋진 어른이 된 것만 같아. 하고 싶은 걸 해내는 건 물론이고 해가 되는 것들을 끊어 내는 모습을 보면 그래. 그만두는 것도, 덜어내는 것도 용기가 필요하다고 그러잖아. 나는 언니가 늘 100%인 사람이 아니어도 좋아. 언니의 푸른색 마음이 50% 차 있다면 나는 내가 좋아하는 붉은색으로 나머지를 채워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 볼게.


편지를 읽으며 한참 생각했다. 내가 생각하는 멋진 어른은 오히려 너인데, 그만둘 수 있는 용기가 있었다는 것 하나만으로 내가 멋진 어른이 될 자격이 있나. 내가 생각하는 멋진 어른은 좋아하는 것을 끊임없이 탐구하는 사람, 오로지 그거 하난데. 내 세상이 뒤집혔다는 생각이 든다. 동시에 바로잡고 싶다는 생각도 든다.


생각이 많아지던 차에, 편지의 말미에 (정치적 언급 아님) 같은 사족을 보고는 와하하 웃어 버렸다. 세연은 나를 가볍게 안아 주었고 나는 또 보자는 말로 그녀를 보냈다.


오늘부터는 무용하지만 즐거운 일들을 나에게 마음껏 허락해 주기로 했다. 첫 단추로 코인 노래방에 가서 12곡을 부르고 나왔다. 좀 웃긴가? 나는 웃기다. 그리고 좋다. 이제는, 조금 웃긴 일들을 하며 살기 시작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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