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에게 잘 쉬어 보자 다짐한 첫날이었다. 느지막이 일어나서 분재에 물을 주고, 어제 선물받은 델피늄은 얼마나 더 피었나 살펴봤다. 하룻밤 만에 조금 더 피었어, 애인에게 자랑하곤 체리를 씻어 나눠 먹었다. 몇 알은 달콤하고 몇 알은 시큼했다. 씨앗을 입에서 한참 굴리다 퉤 뱉고 나는 책 한 권을, 애인은 노트북을 챙겨 집 앞 카페로 나섰다.
평일 대낮의 카페는 한산했다. 오전 11시에 필라테스 수업 가는 삶을 사는 게 인생의 목표라던 사람이 떠올랐다. 퇴사를 결심한 이유 중 큰 부분을 차지했던 건, 내가 가장 싫어하는 강남까지 아침마다 꾸역꾸역 찾아가 8시간을 보내야 했다는 점이었다. 이제는 더 이상 그걸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 내가 좋아하는 초여름의 낮 시간을 마음껏 보낼 수 있는 시기라는 것이 갑자기 피부로 느껴졌다. 불안이 조금 걷히고 나서야 즐길 수 있었다.
집으로 돌아와서 숫자에 맞춰 색을 칠하는 피포페인팅을 시작했다. 어제 세연과의 대화 중 충동적으로 도안과 물감을 구매했었다. 최대한 불안이 끼어들 틈을 주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잡념 들 겨를 없이 몰두하다 보니 저녁 약속을 나갈 시간이 됐다. 이전 직장의 리더를 만나기로 한 날이었다.
리더에게 연락했던 건, 내가 바닥을 치고 있었던 때였다. 싫은 일을 그만하고 싶다는 것 하나로 퇴사했는데 정작 내가 나와서 하고 싶은 건 무엇인질 모르겠고, 그나마 이건가 하고 도전해 봤던 아르바이트에서는 왕창 깨지고,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던 불안이 한꺼번에 몰려오니 삶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이 시기가 너무 당연한 것이라는 걸 깨닫고 난 뒤로는 점차 마음이 안정되어갔고, 조금은 여유를 찾은 뒤 즐거운 마음으로 저녁 약속에 나갔다.
정말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결국 결론은 '쉬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도 모르게 수많은 if를 붙이고 있음을 알았다. 만약에 다시 회사에 갔다가 비슷한 일이 또 벌어진다면, 만약에 내가 영영 밥벌이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진다면과 같은. 어차피 직접 겪어 보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보장할 수 없고, 내가 한두 달 쉰다고 해서 달라질 급한 현실도 없다. 나에게는 충분한 휴식을 주어도 된다.
쉬는 것조차도 배우고 연습해야만 할 것 같은 나는, 누군가 "쉬어도 된다"고 말해 줘야만 비로소 안심한다. 정당성을 찾아도 되지 않을 일까지 정당함을 확인받고자 하는 걸 보면 꽤 피곤하게 산다. 아무튼, 이제는 깨달은 대로 나에게 합당한 쉼을 부여할 때인 것 같다. 쉬는 것도 '잘' 해야 할 것 같은 마음부터 내려놓아 본다. 어떻게 내려놓는지는 모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