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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편지 (하)

마지막 장

by 채리 김

당신에게


지금까지 내 글을 읽어줘서 고맙다고 먼저 말하고 싶었어요. 사실 우리는 한 번밖에 마주친 적이 없죠. 로마의 ‘미미앤코코’ 레스토랑에서요. 당신은 몸집이 작지만 힘이 엄청 나서 한번에 파스타 그릇을 다섯 개까지 들 수 있었어요. 그리고 이탈리아 억양이 강하게 섞인 빠른 영어는 제 주문을 재촉했죠. 그래도 당신이 추천해 준 메뉴는 아주 훌륭했어요. 프로슈토와 멜론, 토마토 스파게티, 그리고 페로니까지. 워낙 바빠 보이는 탓에 감사 인사를 할 수 없었죠.


그러다 이주 뒤 로마로 돌아온 날 밤, 당신을 발견한 거예요. 그 자리에서 여전히 재빠르고 바쁘게 일하고 있었죠. 미미 앤 코코. 아마 미미겠죠? 코코보다는 좀 더 당신에게 어울리는 이름 같아요. 건너편 바 야외 테이블에 앉아 마지막 아프롤 슈프릿츠를 마시며 당신을 발견했을 때 제 안에서 굉장히 강한 무언가가 느껴졌어요.


사람.


여행 내내 전 의기소침했어요. 주변 풍경을 보며 신이 난 엠이나 조용히 타국의 언어를 학습하는 핌피나, 모두 각자의 목적으로 여행을 즐기는 것 같아 보였거든요. 제가 하는 일은 겨우 숙소에 돌아와 일기 쓰기 뿐이었어요. 실제로 당신의 이야기도 썼었죠. 그러나 저 혼자만이 오직 이 여행을 ‘잘못’ 취하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자꾸 내 안으로 파고드는 감정과, 아름다워야 마땅할 여행지 앞에서 전 다른 사람들을 보며 또 다른 사람들을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무슨 말인지 알까요? 당신은 이해할 것 같아요.


엠이 제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어요. 포로 로마노에서 자신은 어떤 유적지를 보면 3D스캔을 하듯 옛날의 모습이 보인댔어요. 길에 깔린 벽돌에 파인 홈을 가리키며, 옛날엔 마차가 이리로 다니던 길이었나 봐 바퀴 자국이야,라고 했지요. 그땐 난 그런 것이 보이지 않아 속상했는데, 당신을 보는 순간 깨달은 거예요.


난 내 앞에 앉은 정체 모르는 사람이 여기 로마까지 온 이유를 상상해요. 검은 매니큐어를 짙게 바른 노부인이 영감의 민트 캔디 한 알까지 까주는 모습을 보며 그들의 일평생 결혼 생활을 영화처럼 그려 보죠. 피노키오의 제페토 할아버지를 닮은 여행객이 승강장 엘리베이터를 놓쳤을 때 그와 눈인사를 한 건 저뿐이었어요. 그리고 전 엠이 기억도 못하는 당신의 정체를 단번에 알아보고 아는 체 인사를 하고 싶어 안달이 났네요. 그 차이였어요.


사람. 전 사람을 보고 기억하고 상상해요. 사람 사는 이야기에 신이 나요.


당신은 그대로 여기에 있네요. 제가 정체 모를 곳과 알 수 없는 사람들을 상상하며 돌아다니는 동안, 굳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어요. 피렌체의 바텐더도 산 지미냐노의 별장 주인도 그리고 베르나차의 서버도 그대로 그곳에서 일상을 이어나가고 있겠죠.


여행의 끝자락에서 나는 조금 침울했어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에. 여행은 신나는 것, 일상은 지루한 것. 나도 모르게 그런 등식을 만들고 있나 봐요. 당신을 보며 전 다짐해요. 한국으로 돌아가 다시 내 자리에서 당신처럼 열심히 일상을 살아갈 것이라고. 그것이 은은한 취기와 함께 여행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마땅한 방법 같아요.


차마 인사를 할 용기가 없었어요. 저는 하루 수백 명의 관광객 중 한 명뿐이었을 테니까요. 하지만 당신은 나에게 하나로 존재해요. 나의 미미. 그래서 이렇게 편지를 부칩니다.


잘 지내시길. 벌써 가을이 오고 있네요. 선선한 바람에 서빙의 땀방울이 날아가길 바라며, 이만 글을 마칩니다.


당신의 관광객

채리 김


이제까지 <Tutto Passa 이태리 여행기>를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모두 행복한 여행적 삶 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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